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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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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cd116><colcolor=#0072c6>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Alessandro Farnese, Duca di Parma | |
이름 |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Alessandro Farnese) |
출생 | 1545년 8월 27일 |
교황령 로마 | |
사망 | 1592년 12월 3일 (향년 47세) |
프랑스 왕국 아라스 | |
재위 |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의 공작 |
1586년 9월 15일 ~ 1592년 12월 3일 | |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 |
1578년 10월 1일 ~ 1592년 12월 3일 | |
배우자 | 포르투갈의 마리아 공주 (1565년 결혼 / 1577년 사망) |
자녀 | 라누초 1세, 마르게리타, 오도아르도 |
아버지 | 오타비오 파르네세 |
어머니 | 파르마의 마르게리타 |
종교 | 가톨릭 |
서명 |
[clearfix]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장군, 귀족. 북해 연안의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연안 저지대의 행정을 담당하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이자 펠리페 2세의 이복누이(서녀)인 마르가레테와 교황 바오로 3세의 둘째 손자 파르마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제[1]의 아들이다. 보통 본명보다는 작위인 파르마 공국 공작으로 더 많이 불린다.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화려한 공로를 세워 당대에도 최고의 장군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후세의 전사학자인 존 키건도 그 시대에서 제일 가는 장군으로 평가하고 있다.2. 생애
2.1.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의 활약
레판토 해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이후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돈 후안의 휘하에서 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578년 1월 짐블라우 전투를 치르면서 지휘관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파르네제는 1,2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봉에서 기동하던 중 약 2만 명에 달하는 네덜란드군과 접촉하게 되었다. 숫적으로 열세에 있었고 철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파르네제는 네덜란드군의 규율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 과감하게 기병 돌격을 가했다. 스페인 기병은 손쉽게 후방의 네덜란드 기병을 분쇄하고 이어 공포에 질린 본대까지 붕괴시켰다. 일부 네덜란드군이 간신히 재집결하여 저항했지만 이어서 공격해온 스페인 본대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전투로 스페인군은 12명의 전사자만 발생했으나 네덜란드군은 6,000명에서 1만 명이 전사하고 수백명이 포로로 잡히는 큰 손실을 당했다. 이 전투의 결과 네덜란드 독립군에게 공포가 전파되었으며, 수도 역할을 하던 브뤼셀이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자 독립군은 안트베르펜으로 수도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돈 후안이 1578년 사망하자 파르네제는 그 뒤를 이어 저지대의 총독이 되었다. 저지대 국가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로 여러 도시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여러 도시들은 능보와 해자를 갖춘 이탈리아식 성벽으로 보호 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도시들은 바다나 거미줄 같이 연결된 강과 수로, 운하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 강, 수로, 운하는 공자의 기동을 제한하고 도시들에게 유효한 보급로 역할을 할 수 있었으므로 공격자는 이 연결로까지 끊어내야 했다. 거기다 이 도시들을 상대로 공성전을 수행하려면 공격자도 참호를 파야했는데 저지대 국가들은 땅이 물러 참호를 파기 어렵거나, 참호를 파면 물이 차는 곳이 많았다. 당연히 이런 도시들을 일반적인 공성전으로 점령하려면 일반적으로 몇 달이나 되는 시간과 상당한 사상자를 내야했다. 스페인이 성공적으로 도시 주변을 장악하더라도 도시나 지원군이 피해를 감수하고 근처 제방을 허물어버리면 공성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스페인은 1572년 몽스 공방전에서 3개월의 공성전을 거쳐야 했고, 하를렘을 점령하는데 6개월의 시간과 수 천명의 사상자를 내야했다. 아무리 스페인군이 정예이고 그 장군과 병사들이 공성전에 조예가 깊더라도 성벽을 갖춘 도시들을 하나하나 공성전으로 점령하다가는 먼저 파산할 지경이었고 실제로 스페인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수행하던 중 파산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성전이 매번 성공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1573년 알크마르 공방전에서 스페인군이 실패한 것을 시작으로 델프트, 레이던도 스페인의 공격을 버텨냈다. 거기다 네덜란드에는 마스트리흐트, 브레다, 안트베르펜 등 다른 도시들과 비교하여 훨씬 더 강력한 성벽을 갖춘 대도시들도 많았다.
파르네제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구교 신자의 수가 더 많고, 부유했던 남부의 벨기에 지역을 전투와 회유를 통해 다시 되찾기로 했다. 신교도가 많은 북부 네덜란드 지방과 구교도가 많은 남부 벨기에 지방의 종교, 경제적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히 꿰뚫어본 조치였다. 1579년 1월 파르네제는 협상을 통해 에노, 아르투르 등 벨기에 지역의 일부 주들과 아라스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으로 끌어들였고, 이에 북부의 7개 주가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여(이후 10개 주로 늘어났다) 펠리페 2세에게 대항하기로 하였다. 파르네제는 1579년 치열한 전투 끝에 강력한 요새도시인 마스트리흐트를 함락시켰으나, 같은 해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네덜란드인을 제외한 외국 군대(스페인 군대 포함)를 네덜란드에서 철군시켜야 했다. 이에 따라 파르네제는 15,000명의 왈롱 테르시오와 부족한 자원만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1581년 브레다와 투르네를 점령할 수 있었으며, 네덜란드 북동부의 흐로닝언도 왕당파의 손에 복귀했다. 뛰어난 외교관이자 행정가이기도 했던 파르네제는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을 상대로 약탈 금지, 특권 유지, 가톨릭으로 복귀 유보 등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여 스페인 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1582년 왈롱의 여러 도시들을 설득하여 스페인 군대를 끌어들여도 좋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6만 명에 달하는 스페인 군대를 활용할 수 있게 된 파르네제는 플란데런와 브라반트를 향해 맹공을 펼쳐 네덜란드의 강력한 요새들을 하나하나 점령해내갔다.
파르네제는 1583년 아인트호벤을 함락시켜 북부 브라반트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됭케르크, 니우포르트도 스페인의 손에 떨어졌다. 파르네제는 됭케르크 점령 이후 플랑드르 함대(Armada de Flandes) 건함에 착수하는 한편[2] 1583년 6월 브라반트에 위치한 스테인베르헌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앙주-잉글랜드 연합군을 대파하고[3] 스테인베르헌을 점령하였다. 이제 파르네제의 목표는 당대 플란데런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저지대 17개 주의 정치, 경제적 중심지였던 안트베르펜이 되었다.[4]
16세기 후반 안트베르펜은 인구 8~10만의 대도시로 테라문다, 브뤼헤, 브뤼셀, 겐트 등 여러 위성도시들과 강, 운하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대서양과 이어지는 쉘트 강과 해자, 10개의 삼각 보루를 갖춘 성벽으로 보호되는 강력한 요새이기도 했다. 파르네제는 알스트, 겐트, 이프르, 브뤼셀, 브뤼헤 등 안트베르펜의 주변 도시들을 압박하는 한편 1584년 7월 1만 명의 보병과 1,700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안트베르펜 공성을 개시했다. 파르네제는 쉘트 강에 교각 요새를 건설하는 한편, 보급을 막는 기발한 전략을 실행하면서 동시에 주변 위성도시들을 차례차례 점령, 안트베르펜을 고립시켰다.
스페인군은 쉘트 강 양안을 점거하고 교각을 건설하기 시작했지만 강폭이 넓은데다, 물살이 빠르고 수위가 깊어 교각을 건설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 파르네제는 1584년 9월 겐트 함락 이후, 겐트 성에서 32척의 선박을 노획하여 이를 기초로 교각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겐트에서 쉘트 강을 따라 교각 건설 지점까지 가려면 안트베르펜을 경유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안트페르펜의 포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이에 파르네제는 쉘트 강의 제방을 무너트려 인근을 물바다를 만든 뒤 거기로 운하를 파서 우회로를 만들었다. 쉘트 강에 선박이 도착하자 파르네제는 10피트 단위로 배를 배치하고 닻을 내린 뒤, 배들끼리 쇠사슬로 묶어 고정하고 갑판을 서로 연결하여 그 위에 구조물을 설치했다. 갖은 노력 끝에 1585년 2월 무려 2,400피트에 달하는 교각 요새가 완성되었다. 요새 위에는 방패와 목책, 대포가 설치되었으며,1,500명의 병사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배의 선수에 창 모양의 날카로운 구조물을 단 소형 선박들을 교각 앞 뒤로 배치하여 외부에서의 충돌을 방지하였다. 파르네제는 교각을 보호하기 위해 양측 강안에 능보를 설치하고 다수의 선박을 배치하여 두었다. 이로써 안트베르펜은 외부와 완벽하게 고립되었으며, 주변 도시들을 함락시킨 스페인군들이 속속 안트베르펜으로 모여들었다.
안트베르펜도 이에 맞서 화약을 실은 배로 교각을 손상시키려 했다. 이 기발한 전략은 꽤 성공을 거둬 스페인군에게 800명이나 되는 피해가 발생했지만 안트베르펜 선박이 뒤늦게 공격에 나섰기 때문에 스페인군은 혼란 속에서도 교각을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스페인군은 화약선이 접근하면 교각 요새 밑을 받치는 선박을 풀어 그대로 화약선을 흘려 보내는 방법으로 교각 요새를 지켜냈다.
한편 홀란트-질란트의 네덜란드군 지원군이 도착했지만 교각 요새를 돌파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이들은 안트베르펜 인근의 코벤스타인(Kouwenstein) 제방을 공격해 무너트리기로 했다. 만약 이 제방이 없다면 밀물이 들어와 수위가 깊어질 때 네덜란드 독립군 선박이 교각 요새로 가로막힌 쉘트 강을 통하지 않고도 안트베르펜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독립군에게는 불행하게도, 파르네제는 일찌감치 제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요새화 시켜 둔 상태였다. 파르네제는 제방 끝에 '성 십자가'라는 보루를 건설하고, 제방 위에도 1마일마다 작은 보루 3곳을 설치하여 두었다. 네덜란드 지원군은 1585년 5월 7일 제방을 돌파하려 시도했지만 안트베르펜 수비군과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했다.
1585년 5월 21일 안트베르펜은 핀 델라 게라(Fin de la guerre '전쟁의 끝')이라는 거대한 함선을 출격시켜 교각 요새를 돌파하려 했다. 이 배는 24문의 중포와 500명의 머스킷병이 탑승할 정도로 거대한 배로, 건조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그러나 이 배는 강에서 전투를 치르기에는 너무나 무거웠다. 배는 여울에 좌초되어 버렸고 스페인군은 어렵지 않게 선박을 점거하고 대포들을 노획했다.
네덜란드 지원군은 5월 26일 재차 제방을 돌파하려 시도했는데 그 때 파르네제는 베베렌에 위치한 본부에 가 있었다. 지원군 선박들은 화약선으로 위장한 불 붙은 배를 흘려보냈고 스페인군은 교각 요새와 똑같은 일이 일어날까봐 제방에서 물러났다. 그 사이 네덜란드 군은 제방을 점거하고 무너트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미리 요새화 시켜둔 '성 십자가' 보루의 대포가 불을 뿜었고 다른 보루에 있던 스페인군도 반격을 시도했다. 스페인군은 외부의 네덜란드 독립군을 몰아낼 뻔 했으나 안트베르펜에서 출발한 지원군이 제방에 도착하여 스페인군을 막아냈다. 마침내 일부 구간이 무너지고 보급선이 제방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장소에 배치되어 있던 스페인군도 파르네제를 기다리지 않고 반격에 나섰고 사태를 파악한 파르네제도 서둘러 병사들을 이끌고 현장으로 향하여 보루에 대포를 배치한 뒤 보병을 제방 위에 투입했다. 좁은 제방 위에서 5,0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뒤엉켜 전투가 벌어졌으나 파르네제의 등장으로 사기가 오른 스페인 군은 여섯 차례나 되는 치열한 공방 끝에 제방을 재점거했다. 이로써 네덜란드군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투가 오래 지속되어 조류의 흐름이 썰물로 바뀌자 네덜란드 선박 다수가 좌초되었고 일부만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4,000명의 네덜란드 독립군 중 2,000여명이 전사했다.
외부 지원군이 격퇴되고 제방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안트베르펜은 희망을 잃었다. 구교도들은 파르네제와 협상에 나설 것을 요구했고 신교도들 일부도 이에 동의했다. 결국 1년에 걸친 공성전 끝에 안트베르펜은 1585년 8월 17일 스페인에게 항복했다. 파르네제는 관용을 베풀어 도시의 신교도들이 북부 네덜란드 지방으로 떠날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안트베르펜의 함락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트베르펜은 네덜란드에서 플란데런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통로였으므로, 스페인은 네덜란드에 맞서 플란데런을 지키는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네덜란드 중, 남부(현재의 벨기에)가 안정적으로 스페인에게 귀속되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도 위트레흐트 동맹은 1600년 플란데런을 공격한 것을 마지막으로 실상 벨기에 점령을 포기했다. 펠리페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너무나 신난 나머지 딸인 이사벨의 방에 들어가서 "안트베르펜이 우리 것이 되었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스페인이 안트베르펜을 점령하면서 입은 손실도 거대한 도시를 상대로 1년간 공성전을 치른 것 치고는 매우 경미한 것이었으므로, 파르네제는 안트베르펜 점령으로 엄청난 군사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파르네제에게도 문제가 발생했다. 파르네제가 이끌게 된 전력만으로는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는 네덜란드군을 제압하고 네덜란드 전역을 점령하기에는 부족했으며,[5] 남은 지역들은 대다수가 신교도였으므로 협상을 통한 점령이 쉽지 않았고 네덜란드인들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중 핵심지역인 홀란트와 자일란트는 육로로 접근하기 힘든 곳이어서 작전이 제한되었으며, 해군의 도움 없이는 도시들을 제압하기 어려웠으므로 제해권을 상실한 스페인군이 쉽게 공격하기 힘들었다. 거기다 파르네제의 활동을 심각한 위협으로 본 엘리자베스 1세도 위트레흐트 동맹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파견했다. 스페인의 재정상태가 파탄에 이르러 본국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없었으며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 공격을 추진하게 되자 파르네제도 네덜란드 정복에 진력하기보다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파르네제가 잉글랜드 공격 준비에 시간을 쏟는 사이 네덜란드군은 피해를 회복할 수 있었다.
1585년 스페인군은 현재의 네덜란드로 진군하였으나 심각한 보급 부족에 시달렸다. 다행히 파르네제 휘하의 스페인군은 엠펠 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을 격파하고[6] 보급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파르네제는 1586년 아버지를 이어 파르마 공작이 되었다. 파르네제는 그 해에 그라브를 점령하고, 쥣펀에서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을 격파하고 에이셀 강 동쪽에서 잉글랜드-네덜란드 세력권을 일소했다. 이어 1587년에는 아르마다가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한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슬루이스를 점령했다.
파르네제는 그 후 스페인의 잉글랜드 침공 작전 당시 브리튼 섬 본토에 상륙하기 위해 칼레에서 아르마다가 도착하여 함대에 합류하길 기다렸지만 아르마다가 칼레에 오기도 전에 개발살이 나는지라 그대로 손가락 빨고 벨기에에 주둔해야했다. 물론 파르네제가 잉글랜드 공격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펠리페 2세도 파르네제에게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파르네제는 칼레 해전 이후 베르헨엡줌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공성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데다[7] 겨울이 다가오고 마우리츠 판나사우가 지원군을 이끌고 오자 철수했다.
1589년 파르네제는 홀란트로 진입하는 중요한 길목인 헤이르트라위덴베르흐를 확보했지만 곧이어 질병 때문에 장기간 휴양해야 했다. 그 사이 자금부족에 시달린 휘하 병력들이 항명에 나섰고, 네덜란드는 젊지만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마우리츠 판나사우의 등장으로 활력을 되찾다. 반면 파르네제의 부장들은 별다른 전과를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1578년부터 1590년까지 파르네제의 전역은 대체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스페인은 지금의 벨기에 지역 뿐만 아니라 북부 브라반트[8] 네덜란드 북동부 지역, 동부 지역까지도 지배하고 있었으며, 네덜란드 독립군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17개 주 가운데 간신히 프리슬란트, 위트레흐트, 홀란트, 제일란트 4개 주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2.2. 프랑스와의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파르네제는 프랑스의 내전에서 구교 세력를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신교와 구교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춘 앙리 4세가 이끄는 신교 세력이 승기를 잡고 파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1590년 포위당한 파리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파르네제는 29,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 인근의 마른 강까지 진군했다. 앙리 4세가 일부 병력만을 파리에 남겨두고 자신을 요격하러 나오자, 파르네제는 전투를 회피하다가 기습적으로 마른 강에 부교를 설치 후 도하하여 반대편에 위치한 라니(Lagny)를 점령했다. 파르네제의 기동을 예상하지 못한 앙리 4세는 다급하게 도하 중인 신성동맹군을 공격했지만 파르네제는 이를 예상하고 도하 지점에 참호를 파고 후위대를 배치해 두었으며, 후위대는 앙리 4세의 공세를 격퇴했다. 파르네제가 프랑스군의 요격을 받지 않고 파리로 접근할 수 있는 우회로를 마련하자 앙리 4세도 별 소득 없이 파리의 포위를 풀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파르네제의 1차 파리 구원전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파르네제의 부재를 틈 타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군이 강력한 공세를 펼쳐 브라반트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기 때문에 파르네제도 다시 벨기에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마우리츠는 1591년까지 쥣펀, 데벤테르 등 네덜란드 북동부 지역을 공격하여 탈환했다. 파르네제는 1590년 12월 브뤼셀로 되돌아왔지만 오랜 원정에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곧바로 마우리츠의 공격에 대응할 수는 없었다. 한편 파르네제가 물러나자 프랑스 구교 세력과 스페인의 동맹(신성동맹)은 분열되었다. 또한 앙리 4세에게 병력 손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프랑스 구교 세력은 스페인의 지원 없이는 여전히 열세를 면할 수 없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앙리 4세를 상대로 맞설 수 있는 지휘관도 없었으므로 파르네제가 철군한 사이 앙리 4세는 다시 유리한 지위를 회복하고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신성동맹의 중요 거점 중 하나인 루앙을 공격했다.
네덜란드로 복귀한 파르네제는 1591년 스페인의 점령지인 네이메헨을 감제할 수 있는 크노드센부르그 요새를 공격했지만 마우리츠의 신속한 구원으로 점령에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정예 스페인 테르시오 연대가 네덜란드-잉글랜드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수 백명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자 파르네제는 더 큰 손실이 발생하기 전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파르네제는 밤을 틈타 5시간만에 수 천명의 군사와 물자들을 도하시켰다. 이와 같은 신속한 기동은 마우리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으므로 파르네제는 추가 손실 없이 험지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파르네제는 네이메헨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철수했다.
파르네제는 1591년 다시 한 번 프랑스로 향했고 앙리 4세는 소수 기병대만 이끌고 성급하게 움직였다가 오말에서 스페인 본대와 마주쳤다. 앙리 4세는 기병대를 이끌고 스페인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스페인군이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며 행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앙리 4세는 매복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것마저 실패로 돌아갔고, 자신도 상처를 입고 물러났다.[9]
전황이 유리하게 바뀌자 이제 프랑스 구교 세력이 파르네제가 루앙으로 입성하는 것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루앙은 파르네제에게 더 이상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고, 파르네제는 인근 도시인 피카르디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사이 부상에서 회복한 앙리 4세가 다시 루앙을 포위하자 루앙은 재차 파르네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앙리 4세는 피카르디에 있는 스페인군이 루앙에 도착하려면 20일은 걸릴 것으로 생각하고 오랜 전쟁으로 지친 여러 귀족들에게 휴식을 주었는데, 파르네제는 신속하게 기동하여 고작 6일 만에 루앙에 접근하자 당황하여 1592년 4월 20일 루앙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앙리 4세가 이끈 군대는 흩어져 있었고, 질병과 긴 전투로 지친 상황이었으므로 파르네제는 즉시 앙리 4세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구교 세력은 그보다는 루앙의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항구도시인 르아브르로 이어지는 경로에 위치한 신교 세력의 요새들을 점령하기를 원했고, 마옌 공작 샤를 드 로렌도 이를 위해 코드벡을 공격하길 권했다. 1592년 4월 23일 코드벡 공성전 도중 포대를 점검하던 파르네제는 팔에 심한 총상을 입었다.[10] 파르네제는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터라 상처는 계속 악화되었다. 결국 파르네제는 지휘권을 샤를 드 로렌에게 넘겨주고 몸져 누웠다. 그 사이 앙리 4세가 군대를 이끌고 코드벡으로 접근했지만 신성동맹군은 별 어려움 없이 코드벡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앙리 4세의 함정이었다. 코드벡은 센 강의 본류와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도시였으므로, 외부와 교통하려면 센 강의 도하지점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신성동맹군이 공성전에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에 다수의 잉글랜드, 네덜란드 분견대를 포함한 지원군이 앙리 4세와 합류했다. 이제 앙리 4세가 이끄는 군대는 25,000명으로 불어나 15,000명에 불과한 신성동맹군을 압도했으며, 7,000명에 달하는 강력한 기병과 네덜란드 해군까지 활용할 수 있었다. 앙리 4세는 네덜란드 해군을 동원하여 바다와 센 강의 본류, 지류를 모두 장악하고, 센 강의 도하 지점을 모조리 점령함으로써 신성동맹군을 코드벡에 고립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우세한 프랑스 기병은 신성동맹의 기병대를 격파하고 다수의 보급품까지 손에 넣었다. 신성동맹군은 이제 보급도 부족한 상태로 센 강과 바다 사이에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앙리 4세는 이제 신성동맹군을 서서히 압박해 들어왔고 신성동맹군은 (프랑스 기록에 따르면) 적지 않은 손실을 내며 연패하여 코드벡 북쪽에 위치한 이브토로 밀려났다.
하지만 파르네제의 정신은 여전히 예리했다. 파르네제는 먼저 센 강의 도하지점에 보루를 건설하고 대포를 배치하여 네덜란드 해군을 견제하고 교통로를 확보한 다음, 자신의 아들인 라누치오에게 후위대를 맡겨 프랑스군의 시선을 끌게 했다. 그리고 최대한 선박들을 끌어모은 뒤 야음을 이용하여 하룻밤만에 대부분의 병력을 도하시키는데 성공했다. 앙리 4세는 신성동맹군의 퇴각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가 후위대가 철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공격을 개시했지만 이브토에는 소수의 병자와 낙오자들만이 남아 있었고, 신성동맹군은 이미 이브토를 떠나 남쪽으로 탈출한 뒤였다.
파르네제는 파리로 이동하여 파리의 수비를 강화한 뒤 벨기에로 귀환했다.
2.3. 최후
그러나 아무리 파르네제가 멋진 철군 작전을 성공시켰다 한들 결과적으로 신성동맹은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전투에서 패배했고, 파르네제도 중상을 입어 더 이상 군대를 지휘할 수 없었다. 물론 파르네제가 일방적인 패배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 목적이었던 루앙 구원에도 성공했으며, 잘못된 전략적 선택을 했지만,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에 빠진 병력 대부분을 구해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신성동맹이 적지 않은 병력 손실을 보기는 했지만 루앙 구원에는 성공했고 종전보다 전황이 악화된 것도 아니었으므로[11] 파르네제가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실제로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파르네제에게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파르네제의 1, 2차 프랑스 구원이 앙리 4세의 전략을 좌절시켰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590년의 파리 공격과 1592년 루앙 공격은 각각 앙리 4세가 자력으로 파리와 루앙을 점령할 수 있었던 적기였으나, 모두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파르네제의 방해를 받아 좌절되었고, 결국 앙리 4세는 1593년까지도 파리와 루앙의 점령에 실패한 채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협상안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파르네제를 견제하던 펠리페 2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파르네제는 쓸쓸하게 벨기에로 귀국해야 했고 그를 시기하던 궁정은 그의 직책이던 네덜란드령 총독에서 해임했다. 심지어 펠리페 2세는 그를 스페인 궁정으로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펠리페 2세는 일단 파르네제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가 총독 직위에서 해임됐다는 사실을 감추고, 오히려 1592년 10월 다시 프랑스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러나 파르네제는 프랑스로 향하던 중 1592년 12월 2일 아라스 수도원에서 한창 나이로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뒀다.
3. 평가
파르네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지휘관이었고, 16세기 서유럽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미국의 잡지인 암체어가 선정한 100대 명장에 선정되기도 했다.파르네제는 짐블라우 전투에서 뛰어난 전술 능력을 발휘하여 열 배가 넘는 네덜란드군을 격파하는 위업을 보였다. 그 후로는 네덜란드군이 최대한 야전을 회피하여 그만한 화려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그는 습지와 요새가 가득한 저지대에서 바둑을 두듯 연달아 성공적인 공성전을 치러내어 전략적 거점들을 점령하였다. 1578년부터 1590년 사이에 스페인군은 무려 95개나 되는 도시와 마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 중 절반 가량은 상주 거주민이 수 백명 단위의 마을이었고, 모든 도시들이 직접적인 공성전을 거친 뒤 점령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95곳에 이르는 도시나 마을 중 60여 곳은 포위, 봉쇄와 같은 군사적 행동이 동반되었으며, 그 중 38군데의 도시, 마을은 직접적인 포격, 강습이 있었던 뒤에야 점령되었다[12] 16세기 후반 공성전의 난이도를 고려해 보았을 때 이러한 성과는 매우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맞수이자 명장인 마우리츠 판나사우, 앙리 4세도 예상하지도 못한 과감하고 신속한 기동을 선보이는 등 당대에서 손꼽힐만한 전략적 식견과 기동력을 보여주었다.
파르네제가 뛰어난 기량을 갖춘 스페인 군대를 지휘했으며 막대한 스페인의 군수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맞수들에 비해 유리한 지점은 있었다. 근본적으로 파르네제가 지금의 벨기에 지방을 스페인에게 되돌려 준 것은 그가 스페인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파르네제가 아라스 협약 이후 부족한 전력만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성공적으로 여러 작전을 수행했으며, 스페인 군대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게 된 이후에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어 고작 몇 년만에 벨기에 지방을 장악하여 스페인에게 되돌려 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파르네제가 명장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교관이자 행정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사적으로도 유능했지만 군사적 수단에만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외교와 협상을 이용해 여러 도시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으며, 주어진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군사들을 조직하고 배치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이는 전임자 중 한 명인 알바 공작이 뛰어난 군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태도를 유지하여 네덜란드 평정에 실패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파르네제는 (물론 스페인의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가장 큰 장점이 있었지만) 그의 뛰어난 재능으로 고작 몇 년만에 지금의 벨기에 지방을 스페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생애 후반에 이르러 그는 마우리츠 판나사우, 앙리 4세와 같이 그 못지 않은 명성을 지닌 뛰어난 명장들과 겨뤘다. 먼저 마우리츠와는 몇 차례 소규모 전투 외에 정면 승부를 치르지는 않았으며 그 당시 마우리츠는 20세 남짓의 젊은 청년이었다. 마우리츠는 파르네제가 벨기에를 떠나 있을 때와 파르네제 사후 브라반트를 절반이나 회복하는 군사적 성과를 내었다. 만약 파르네제가 프랑스로 가지 않고 계속 벨기에에서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성숙해진 마우리츠와 겨루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도 흥미로운 가정이다.
앙리 4세에게는 코드벡 전투에서 전략, 전술적으로 패배하기는 했지만 코드벡 전투 당시 파르네제가 정상적인 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은 감안해야 한다. 심지어 그 상황에서도 파르네제는 앙리 4세는 물론 아군들 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기동을 실현해내어 위기를 탈출하기도 했다. 또한 파르네제는 1, 2차 파병 모두 전투를 회피하면서 군사적 목적 자체는 달성해냈고 특히 파리 구원전은 앙리 4세를 전략적으로 완전히 농락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마우리츠와의 크노드센부르그 전투나, 프랑스 1, 2차 파병에서 보여준 파르네제의 기동[13]은 도하 작전의 난이도를 감안하면 군사 기동의 걸작이라 할만하다.
파르네제가 앙리 4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우려하여 전투를 회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파르네제가 정면승부로 앙리 4세를 격파한다는 장담도 없었을 뿐더러, 격파하더라도 전력에 손상을 입는다면 네덜란드 전선이 악화될 우려가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파르네제가 이끈 '플랑드르 군대'가 야전보다는 공성전에 익숙한 군대였음을 고려해 볼 필요도 있다. 물론 스페인군, 특히 보병대는 당대 최정예였고 야전에서도 충분히 강력한 군대였다. 그러나 파이크와 화승총의 등장 이후 보병이 기병을 압도했다는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16세기 후반에도 기병은 보병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스페인의 정예 보병들조차도 로크루아 전투의 분전이 인상적이어서 그럴 뿐 야전에서 아무 준비 없이 기병과 맞닥뜨렸을 때는 패배한 경험도 많았다. 프랑스군은 전통적인 기병 강국이었고, 그 중에서도 앙리 4세는 기병 통솔에 능숙한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효율적으로 기병 편제를 재편하는 등 기병 전력에서는 신교도군이 파르네제가 이끈 스페인군을 능가하고 있었다고 볼 여지가 많다.[14] 1637년 스페인 관료는 '반란군(네덜란드)을 정복하는데는 보병이 더 많이 필요하고, 프랑스를 공격하는데는 기병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던바, 파르네제가 이끈 플랑드르 군대는 대체로 기병보다는 보병 비중이 높았고, 보병 중에서도 기병 저지를 위한 파이크병보다는 화승총병의 비중이 높았으므로 앙리 4세가 이끈 강력한 프랑스 기병대는 상성상 파르네제가 이끈 플랑드르 군대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수 있다.
이를 고려하면 파르네제가 야전에서 앙리 4세를 상대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 파르네제가 직접 교전을 회피하는 대신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의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참호전과 도하 기동 등 전략과 공병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여 앙리 4세를 따돌리고 군사적 목적을 달성한 것은 그가 이끈 스페인군의 장점을 활용한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며, 그의 뛰어난 군사적, 전략적 재능의 편린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15]
[1]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의 동생. 당대 일류의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와 이들 형제의 초상이 남아있다.[2] 이 해군은 상선 보호, 작전 수행, 군사 수송 등에서 활약했지만 결과적으로 압도적인 숫자의 네덜란드 해군을 제압하는데는 실패했다. 1601년 한 스페인 관료는 '우리가 배 100척을 만들면 적은 400척을 내놓는다. 적들은 우리 배 1척을 격침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10척을 내놓을 것이다'라고 말했다.[3] 스페인군은 400명의 사상자만 발생했지만 앙주-잉글랜드 연합군은 3,000명이 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보급품과 화약도 대부분 망실했다.[4] 하지만 그 전의 병사들에게 펠리페 2세가 임금체불을 했었고, 악이 받친 스페인 군대는 안트베르펜을 약탈했었는데 이 때부터 저지대의 경제 주도권이 북쪽의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넘어가고 암스테르담이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17세기의 네덜란드를 황금의 17세기라고 부르지만 그 놈의 튤립 사재기 광풍이 불어닥쳤고 거품이 터지면서 네덜란드는 비실비실 거리다가 영국의 항해조례 이후의 영란 전쟁으로 결정적 크리를 먹게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 혁명 당시 돈이 모자란 국민 공회가 네덜란드의 은행을 털자는 목적하에 불란 전쟁이 벌어졌고 이 때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프랑스의 속국 정도로 몰락한다.[5] 당시 스페인이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대부분의 주를 지배하고 있었으나, 그 내부의 모든 지역을 확고하게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세력권은 점령한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를 잇는 선에 가까웠다. 따라서 스페인에 석권한 주 내부에는 여전히 네덜란드를 지지하는 일부 도시들이 점처럼 남아 있었다. 따라서 점령 지역이 늘어날 수록 스페인도 추가적인 수비군을 점령지에 배치해야 했다. 일례로 1639년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군은 약 7만 명에 달했는데, 그 중 최소한 34,000여 명은 208군데의 도시, 마을 수비를 위해 투입된 상태였다.[6] 당시 엠펠 인근에는 홍수가 나 있었는데, 밤중에 기적적으로 기온이 하강하여 강물이 얼어붙는 바람에 스페인군이 네덜란드군을 공격할 수 있었다.[7]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이 제방을 무너트려 주변 진영을 침수시킨 뒤 인근 쉘터 운하를 장악했기 때문에 스페인군은 공성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파르네제는 베르헨엡줌 북문 수비를 담당하는 빌렘 그림스톤을 회유하여 난관을 타개하려 했으나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은 이를 역이용하였다. 그들은 회유된 척 스페인군 2,000명을 북문으로 유인하여 함정에 빠트린 뒤 공격을 퍼부어 궤멸시켰다.[8] 다만 브레다는 1590년 3월 마우리츠의 기지로 네덜란드가 탈환하였다[9] 파르네제는 앙리 4세의 행동을 보고 "장군을 만나길 기대했는데 그저 기병 한 명을 봤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파르네제는 앙리 4세의 군사적 재능을 얕잡아보지 않았고 항상 경계했다.[10] 이미 4월 20일에 파르네제가 부상을 입었다고 보기도 한다.[11] 신교도군이 코드벡을 탈환했지만 이는 종전에 함락된 도시를 탈환한 것에 불과했다. 또한 코드벡은 루앙에서 르아브르로 가는 길목이었을 뿐 이를 점령한다고 루앙에 심각한 위험을 가져오는 요충지는 아니었다.[12] 22곳은 대포가 성벽을 포격하기 전 항복하였는데, 당시 관습상 이렇게 항복한 도시는 약탈을 면할 수 있었다.[13] 1차 파병에서의 마른 강 도하와 2차 파병에서의 코드벡 전투 이후 도하[14] 실제로 코드벡 전투 과정에서 신교도군은 신성동맹 기병을 압도했다.[15] 물론 파르네제의 탁월한 기동은 그가 잘 훈련된 스페인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은 앙리 4세와의 비교에서 고려해야 한다. 앙리 4세가 이끄는 부대는 상비군보다는 자원병이 많았으므로 파르네제의 기동을 따라하는데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