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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2:55:22

하인켈

1. 개요 2. 역사
2.1. 마가 낀 전투기 개발사
3. 창작물에서

1. 개요

파일:hik_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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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folding [ 하인켈 항공기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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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항기
<colbgcolor=#eee8aa,#000000> 단발기 He 70 ‧ He 58
쌍발기 He 111
3발기
4발기
군용기
전투기 He 100He 112He 113He 51 ‧ He 49 ‧ He 219
폭격기 He 111He 177He 70He 115He 274He 277He 343
급강하폭격기 He 50He 118
제트기 He 162He 176He 178He 280He 343
수송기 He 70He 111
연락기 및 수상기 He 1 ‧ He 49 ‧ He 51 ‧ He HD 55 ‧ He 59He 60He 114He 115
훈련기 He 172 ‧ He 42He 46He 72
수직이착륙기
VTOL 레르헤
취소선: 프로토타입 및 페이퍼 플랜 기체들
※ 제조사별 항공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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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ik_2.png
파일:hik_1.png Ernst Heinkel Flugzeugwerke GmbH
(Ernst Heinkel Fluzeugwerke AG)[1]

독일의 정밀기계 제조업체. 과거에는 항공기 제작업으로 유명했었다.

2. 역사

과거 한자-브란덴부르크 항공기 제작회사의 기사장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었던 에른스트 하인켈(1888~1958)은 1922년 하인켈 항공기 제작회사를 설립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베르사유 조약의 영향으로 항공기 생산에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재무장을 선언한 이후 1939년 세계최초의 단발 제트기 He 178의 시험비행, 1941년에는 쌍발 제트기 He 280의 시험비행을 성공하였으며 전쟁 내내 He 111 폭격기He 177 폭격기 등을 생산하여 루프트바페에 납품했다.

그러나 전쟁 말기 독일 국방군 고위층과의 불화를 겪어야 했고[2] 에른스트 하인켈은 이후 종전 때 체포되어 전범재판에 넘겨졌으나 풀려났다.

항공기 제작 회사 하인켈은 이즈음에 해체되었다. 그리고 1950년 새로 설립한 회사는 소형차나 모터바이크를 생산하면서 재기했고, 현재는 가스필터 같은 정밀기계를 제조하고 있다.

흔히 하인켈이란 성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독일어 표기법과 실제 발음상으로는 하'잉'켈이 정확하다. 독일어 -nk는 영어의 -nk와 마찬가지로 [nk]가 아니라 [ŋk]로 발음하기 때문.

2.1. 마가 낀 전투기 개발사

다만 밀덕들에게는 전투기 프로젝트에서 보여주었던 심히 무력한 모습으로도 유명하다. 야심차게 개발했던 He 112He 100은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Bf 109에게 물을 먹었고, 성능좋은 명작 야간전투기였던 He 219은 채택되었고 초도 물량 300기 계약에도 성공했지만 결국 높으신 분이 탑승한 상태에서 추락하는 대참사를 일으키면서 채택도, 대량생산도 물 건너갔으며, 세계 최초의 제트전투기였던 He 178은 군부의 무관심으로 잊혀지는 비극을 맞이했고 이후 이를 부득부득 갈고 만들어낸 He 280 마저도 끝내 Me 262에 밀려 생산되지 못했다. 창립자 에른스트 하인켈 역시 이걸 알았기에 그는 죽을 때까지 한번도 하인켈 사가 전투기 경합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 했다고 한다.

게다가 더 묘한 건 하인켈사는 정작 본국 독일보다는 독일의 동맹국들과 접접이 많았다. He 112는 비록 독일이 악성재고 처리용으로 넘긴 것에 가깝긴 하지만 자체적인 전투기가 적거나 거의 없었던 헝가리와 루마니아 공군이 유용하게 사용하였고, 일본도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했다.[3] 또한 일본 해군항공대는 He 100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독일과 일본의 전투기 운용 교리의 차이가 한몫했다. 붐앤줌 전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독일에게 화력보다는 속도 등 기동성에 많이 치중한 하인켈사의 전투기들은 그닥 매력적이지 못했으나, 제로센을 필두로 한 빠른 선회전에 집착하였던 일본,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군 해군 항공대에게는 정말 딱 맞는 기체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일본은 실제로 하인켈사의 기체들에 큰 관심을 보여 몇 기를 시범용으로 수입하기도 했으며 본토에 생산시설을 짓고 He 100을 생산한다는 게획도 세웠지만 그 전에 전쟁이 터지면서 인하여 끝내 무산되었다. 정말 끝까지 제대로 풀리는 게 없다.

참고로 폭격기 분야도 전투기 분야만큼은 아니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척 우울하다. 열심히 개발한 He 50은 지나치게 빨랐던 항공 기술의 발전으로 얼마 쓰이지도 못하고 곧바로 도태되어 Hs 123로 대체되었고, He 118은 종합적인 성능 면에서는 상당히 괜찮았으나 하필 경합 상대가 그 유명한 Ju 87였던 데다가 He 219와 비슷하게 에른스트 우데트가 시험 비행을 하던 도중 프로펠러가 부러지면서 추락하는 사고가 터지면서 망했으며,[4] He 177은 표면적으로는 괜찮은 기체였으나 답이 없는 엔진 문제[5], 그리고 출시 시기가 맞물려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그나마 제일 사정이 나은 게 He 111인데, 여기도 성능상으로는 Ju 88 계열에게 밀렸으나 엄연히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독일군의 주력 폭격기였고, 그 이후로도 해전이나 소련 공군을 상대로는 계속 꾸준히 성과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3. 창작물에서


[1] 1943년 3월 31일에 변경.[2] 사실 하인켈과 독일 군부의 관계는 항상 좋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에른스트 하인켈이 약하지만 반나치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독일 내에서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로 유명했던 포케불프사와는 대비되는 부분.[3] 하인켈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He 112는 여러 문제로 끝내 일본 수출에는 실패했지만, 연합군은 일본이 이 기체를 운용할 상황에 대비하여 제리리는 코드명까지 붙였다.[4] 그나마 우데트는 간신히 살아남긴 했으나, 높으신 분을 태우고 실험비행을 하다가 추락한 항공기가 정식으로 채택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5] 엔진의 연료 계통과 배기 계통이 너무 가깝게 붙어있어 툭하면 불이 붙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제국의 라이터. 전후 롤스로이스 기술진이 이 설계를 보고 경악했을 정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