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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8-08-23 18:22:03

한국 갑옷/삼국시대


1. 갑옷 양식
1.1. 판갑
1.1.1. 종장판갑(수신판단갑)1.1.2. 방형판갑1.1.3. 장방판갑1.1.4. 삼각판갑(삼각판단갑)1.1.5. 횡장판갑(횡신판단갑)
1.2. 찰갑(괘갑)
2. 투구(주)
2.1. 종장판투구(몽고발형주)2.2. 비늘투구(소찰주)2.3. 차양투구(미비부주)2.4. 충각부주2.5. 이형주2.6. 원주투구2.7. 농오리산성투구2.8. 금동장투구
3. 부속갑옷
3.1. 어깨가리개(상박갑)3.2. 치마갑옷(갑상)3.3. 목가리개(경갑)3.4. 팔보호대(비갑)3.5. 허벅지보호대(대퇴갑)3.6. 정강이보호대(경갑.脛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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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도(?). 왼쪽부터 백제의 황칠갑, 신라의 갑옷, 가야의 판갑, 고구려의 찰갑이다. 국내의 막장고증 드라마들에 비하면 월등히 우수한 고증이지만 일부 오류나 상상이 존재한다. 황칠갑의 경우 투구가 미비부주일 가능성은 적고, 가야, 신라 갑옷의 경우 흉갑이 종장판갑인데 가슴 부분에 붙어있는 두개의 뿔 모양 철판은 어깨 위에 세우는 것이며 종장판갑의 상박갑이 발견된 예는 없고 다만 상체의 방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증에 추가하는 것이다. 일단은 어느 정도 상상이 가미된 디자인으로 보는 것이 옳다.

1. 갑옷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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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나온 갑옷양식 이외에도 혁철법으로 엮은 찰갑이나, 누비갑옷(패딩아머) 등이 쓰였을 것이다.

1.1. 판갑

찰갑이 퍼지기 전까지 삼국시대 초기에 사용된 양식. 판갑은 결합 방식에 따라 혁철판갑(가죽끈으로 결합)과 정결판갑(리벳못으로 결합)으로 나뉜다. 발굴 빈도로 볼 때 정결판갑이 좀 더 높은 빈도로 나오고 있는 편.

한반도 남부에서 자체적으로 개발된 것이 종장판갑이며, 이에서 더 발전한 횡장판갑 계열 갑옷.. 이른바 대금계 갑주에 대해서는 한일 양측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한반도에서 건너가거나 한반도의 제철 기술을 습득한 현지 기술자들이 개발한 일본계 갑옷으로 분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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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금계 갑주의 경우 종장판갑의 완전한 직계 후손은 아니고, 고대 중국계 갑옷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백제의 방형판갑이 종장판갑과 함께 그 형태, 제작기법의 혼재가 이루어져서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쉽게말해 짬뽕. 아니, 사생아.. (참조)][1] 일각에서는 이 갑옷이야말로 고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의미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당연히 헛소리고, 고대의 백제, 가야, 왜 사이의 긴밀한 동맹관계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 역사학계의 결론으로서, 한국 학계에서는 백제, 가야 지방 고위 계층의 무덤에서 대금계 판갑이 발굴되는 이유에 대해 일본과의 교류와 군사적인 동맹관계를 상징하는 위세품(군사적인 과시에 의한)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출처 : PDF논문 - <한반도 출토 왜계 갑주(倭係 甲冑)의 분포와 의미/김혁중>)

일본과 한국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다른 갑주들을 그래픽으로 복원해 다루는 사이트(참조) 에서는 전문가의 대금계 판갑의 기원에 대한 발언을 인용하고 있다. 前期中葉以降(4世紀後半)に現れる竪矧板革綴短甲と方形板革綴短甲は韓半島南部の縦長板釘結板甲の影響 を受けて、日本内で作られたものと考え、古墳時代の中期中葉(5世紀後半)に現れる鋲留技法の板甲、札甲(掛甲)、眉庇付冑などは韓半島の工人が日本列島に渡り、新しい体制によって生産し始めたものだ と説いた ("전기 중엽 이후(4세기 후반)에 나타난 방형판갑과 장방판갑옷은 한반도 남부의 종장판갑의 영향을 받고 일본 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분 시대 중기 중엽(5세기 후반)에 나타난 리벳기법의 판갑과 찰갑(괘갑), 미비부주 등은 한반도의 공인이 일본 열도에 걸친 새로운 체제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2007년 고흥에서 5세기 물건으로 추정되는 대금계 판갑과 투구가 나와서 학계의 관심을 받기도 헸다. 언론 보도에서는 해당 판갑이 횡장판갑이라고 했지만, <百濟甲胄의 形成과 그 背景(백제갑주의 형성과 그 배경)/이현주/ 부산임시수도박물관장> 논문에 따르면 해당 갑옷의 철판의 형태를 볼 때 대금계 판갑의 초기형에 해당하는 장방판혁철판갑이다. 일부 학자들은 해당 발굴을 근거로 기존의 학설과는 달리 대금계 판갑과 차양주 등이 한반도에서 건너갔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다만 시대를 특정지을 수 있는 토기 등이 발굴되지 않은 유적이기 때문에 해당 고분의 시대 배경은 5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수십년 간격으로 매우 유동적으로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시대상을 명확히 특정지을 수 있는 유적이 좀 더 나오기 전까지는 단언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링크에서 언급하듯이 반대로 해당 유적이 5세기 중엽으로 보고 부장자를 일본계라고 추측하더라도 그것이 임나일본부 설을 강화하는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고, 백제와 일본간의 깊은 관계를 증명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참조 포스팅, 참조 포스팅) 그러니 해당 유적을 5세기 초로 보느냐 중엽으로 보느냐와는 관계 없이 양자 모두 일단 판갑 계보에 대한 하나의 학설이 제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대 한국에서는 일본보다 앞서 더 방어력이나 활동성에서 유리한 찰갑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사용했던 후기형 판갑에 해당하는 갑옷들은 일본에서 제작한 것을 수입해 사용했거나, 한반도 내에서 해당 디자인으로 제작하여 사용했다는 것이 한/일 학계의 통설. 찰갑의 경우 제작, 보수가 어려운 점을 볼 때 찰갑이 보급된 이후에도 일반 보병용 방어구는 필요할 경우 판갑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한국, 일본의 판갑의 경우 모두 입고 벗기 편하도록 문짝처럼 열리는 형식으로 만들어 오른쪽 옆구리 부분에 가죽띠나 경첩(돌쩌귀) 형태의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다. 전자는 종장판갑에서, 후자는 삼각·횡장판갑에서 사용된다. 참고로 찰갑은 자체적으로 유연성이 있기 때문에 따로 개폐보조장치를 달지는 않았다.

1.1.1. 종장판갑(수신판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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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퇴래리 종장판갑종장판갑 복원품
왠지 갑빠에서 초고열선을 발사할 것 같은 색 배열이다.
9개~15개의 세로로 긴 철판을 연결해서 제작된 것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목갑/피갑 바로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판갑 중에서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며, 국내 출토 빈도도 가장 높게 나온다. 제작에 사용된 철판이 갑옷마다 다소 들쭉날쭉한 편인데, 당시의 제작 환경이나 제조기술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2] 종장판갑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양식으로써, 3세기부터 5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에 고르게 분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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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나 고구려 지역,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는 사실상 거의 출토되지 않고 낙동강 하류 지역인 김해와 부산, 그리고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만 출토되고 있어, 가야와 신라만의 독자적인 갑옷으로 분류된다.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으며, 고사리 모양 철판을 덧대거나 갑옷 테두리에 깃털로 장식하는 등 장식성이 많이 가미된 갑옷이다. 또한 세부적인 용어를 한복에서 차용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과거 가슴 부분에 반달 모양 장식을 붙이기도 했는데, 사실 그것은 어깨에 세우는 측경판이다.

1.1.2. 방형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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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형 지판의 투공을 서로 겹치지 않고 가죽끈을 이용해 유동성없이 단단하게 엮는 혁철법으로 만든 판갑이다.
종장판갑과는 달리 후술할 소찰주(비늘투구)와 함께 중국에서 그 형태와 양식을 들여와 4세기 백제에서 만든 갑옷이라는 의견과
혹은 기원전 10세기 무산호곡유적이나 고대 시베리아에서 쓰였던, 혁철법으로 엮어서 만드는 갑옷양식에서 약간 변화를 준 양식일 수 도 있다.(두 갑옷양식 모두 가죽끈으로 투공을 겹치지 않고단단하게 엮는 혁철법이란 제작기법을 공유하므로 같은 제작계통-지판혁철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송파구청에 재현된 갑옷 소품(일러스트)이 있는데, 방형판갑을 모티브로 만든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 고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으니 주의하는 것이 좋다.

1.1.3. 장방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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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 7단으로 구성되고 직사각형의 지판 여러장을 가로로 긴 테두리에 고정시킨 형태이다. 각 지판은 가죽끈으로 결합했으며, 방형판갑과 종장판갑의 제작기법이 혼재되어 생겨난 판갑으로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서 사용된 왜계 판갑인 이른바 대금계 판갑의 가장 초창기 형태에 해당한다.

1.1.4. 삼각판갑(삼각판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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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복원품/右 유물
삼각형의 지판을 이어붙여 만들었다. 부산·김해지역과 고령·합천 지역에서 출토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상당수 출토되고 있어서 고대에 이루어졌던 한일간의 교류를 반증하는 귀한 자료이다. 국내에서 출토되는 대금계 판갑 중에서는 가장 출토빈도가 높다.

1.1.5. 횡장판갑(횡신판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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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판갑과 동일한 형태로, 이 역시 가로로 긴 철판을 이어붙여 만들어졌다. 고령과 합천 그리고 망이산성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더하여 일본에서도 다수 출토되고 있으며,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의 갑옷으로 재현되었다.

1.2. 찰갑(괘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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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신라의 찰갑[3]복원된 가야의 찰갑

미늘갑옷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여러개의 철판들을 연결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된 갑옷 형태로써, 고구려에서 한반도 남부와 나아가 일본으로 전래되었고, 신라, 가야는 고구려의 것을 쫒아 찰갑으로 완전히 개량하였다. 이를 일본에서는 괘갑(挂甲)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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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찰이 앞으로 나오는 방향이 위쪽이냐 아래쪽이냐에 따라 외중식과 내중식으로 나뉘는데, 외중식은 아래쪽 갑찰이 앞으로 나오고, 내중식은 위쪽 갑찰이 앞으로 나온다.(참조) 기마병이 찰갑을 사용할 때에는 외중식 찰갑을 입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아래쪽에서 창칼 등이 찔러들어올 경우 내중식은 날이 그대로 파고들어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에서 사용된 찰갑은 모두 외중식이다.

고구려(북방)계 찰갑은 부품수가 많고 관리가 힘들었지만, 다층구조에 의한 충격완화효과로 화살에 대한 방어력이 남부식 판갑에 비해 높았다. 판갑의 경우 금속판 하나로 화살을 방어해내야 했지만 찰갑의 경우 몇겹으로 겹쳐진 철편, 그리고 가죽으로 충격을 분산흡수한다. (참조 영상) 영상을 보면 판갑은 뚫렸지만, 찰갑은 화살을 일정 수준 방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두정갑도 유사한 이유로 단갑보다 방어력이 높은데, 영상에서 화살이 철판 한장은 뚫었지만 같은 철판으로 만든 두정갑은 뚫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4]
제철 규모가 현대에 비해 극히 작고 기술력이 떨어져 그 품질 균일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4~5세기 경의 철판과 철편으로 만든 판갑과 찰갑이라면 더욱 심한 차이가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찰갑의 방호력에 대한 실험이 아래 글이 지적하듯 실제 전투 상황의 장거리 사격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지의 여부를 반영하지 못한 것은 옥에 티. 화살의 운동에너지는 강궁이라도 약 180J 정도이며[5] 거리가 늘어나거나 곡사할 경우 더 떨어지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판갑으로 화살을 막았을 때와 찰갑으로 화살을 막았을 때 어느 수준의 방호가 가능한가의 여부는 불명확한 만큼 찰갑이 모든 상황에서 우월하다거나 판갑이 아예 못쓸 물건이라고 보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디펜스 코리아[6] 신재호의 기고문에서는 해당 실험이 지닌 한계에 대해 지적했다. 아래는 그 일부.

아래 사진은 KBS 역사 스페셜에서 2000년 1월22일 방송한 실험 장면으로 복원한 고구려 화살촉이 가야 판갑(板甲, 일명 단갑)을 관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용한 화살촉은 뾰족한 화살촉이다. 서울 구의동에서 출토된 고구려 화살촉의 강도(탄소량 평균 0.51%)를 참조하여, 이에 준하는 초강을 사용하여 화살촉을 제조했다. 판갑은 가야 갑옷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야에서만 사용한 갑옷은 아니며 이른 시기의 신라나 백제에서도 사용한 갑옷이다. 또한, 백제나 가야의 원군, 용병, 혹은 동맹군 자격으로 한반도상에 출전했을지도 모르는 왜군들도 이러한 판갑을 주된 갑옷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아래 사진에 보이는 실험 결과는 삼국시대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상대했을 이름모를 판갑 전사(板甲 戰士)의 죽음을 재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실험은 개인은 추진하기가 어렵고, 언론사나 공영 연구기관 정도는 되어야 실험이 가능한데, 공영방송인 KBS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기병사격을 재연하기 위해 먼거리에서 사격하지 못하고, 가까운 거리 (5m 이내)에서 사격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원거리에서 국궁 기병사격을 잘하는 인물이 없다) 실전적인 의미가 있는 거리 (50~70m 이상)에서도 관통할 수 있는지, 근거리라면 넓적한 화살촉도 판갑을 관통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았으면하는 아쉬움이 있다.

드라마 근초고왕, 대왕의 꿈, 칼과 꽃에서 고구려의 갑옷으로 사용했다. MBC 사극 계백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찰갑을 모티브로 한 갑옷이 등장하는데, 의외로 조각들을 엇갈리게 엮는 수결법에 있어 단순히 갑찰을 나란히 붙여놓은 KBS 사극에 등장한 찰갑옷보다 더 실제 찰갑에 근접한 형태를 하고 있다. 물론, 기본적인 색감이나 실루엣 자체가 판타지라 의미는 없다.

2. 투구(주)

2.1. 종장판투구(몽고발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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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붙인 형태의 투구. 마치 고대 로마의 투구를 보는 듯한 형태가 특징으로, 원형의 복발(투구의 꼭대기부분에 있는 일종의 뚜껑)의 형태가 지닌 북방계 투구와의 유사성으로 몽고발형주라고도 불린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도 있다.

독일에서 발굴된 아바르 족의 투구가 종장판주와 거의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목민족들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발굴 빈도를 보이고 있으며, 한반도를 대표하는 투구 형식이다. 삼국시대 모든 국가가 종장판주를 주력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보다 적지만 일본에서도 출토된 예가 있다. 크게 철판이 일반적인 돔을 형성하는 종장판주와 철판이 S자로 휘어있는 만곡종장판주로 나뉜다. 그리고 볼가리개와 수미가리개(뒤통수 가리개)가 달려있으며, 이들 가리개는 초창기에는 2~3매의 철판을 연결하거나 투구와 같은 종장판으로 만들다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찰갑과 같은 소찰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소찰 형식은 철판과는 달리 유동성이 있어 활동하기에 훨씬 유리했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고구려군의 투구로 사용했다.

본래 종장지판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들지만 합천 옥전 고분군 28호 출토품은 유일하게 원두정으로 고정된 형태이다(리벳팅).

2.2. 비늘투구(소찰주)

파일:external/farm4.static.flickr.com/3002220953_61c8176e54_m.jpg파일:external/farm4.staticflickr.com/3002220937_643e7e1e7c_m.jpg
철판을 이어붙여 만든 투구. 종장판투구에 비하면 출토 예가 드문 편이며, 중국에서도 소찰주가 출토된 예가 있으므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관모 형태의 복발이 존재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출토된 유물 자체가 적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 투구로 사용했다. 드라마 계백 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관모가 달린 투구를 사용하는데, 잘 쓰지도 않을뿐더러 일단 참고는 한 것 같지만 비늘투구라고 보긴 좀 이상하다.

2.3. 차양투구(미비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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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판주처럼 세로로 철판을 이어붙인 뒤, 이에 차양을 단 형태이다. 고대의 투구 중 가장 화려한 편에 속한다. 이 투구는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양식으로써, 한반도 남부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국내에는 백제와 가야지역에서 출토되나, 그 예가 적어서 일본 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이 일본에서 만든 것을 국내로 역수입했다는 학설을 제시하였고, 국내에서도 대체로 그런 학설을 따르고 있다.

상술했듯이 고대 한·일의 관계나 갑옷을 비롯한 복식사적(한복, 기모노 등) 발달 양상 등을 볼 때 이 투구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견해가 있으나, 유물의 부족 등의 문제로 아직은 일부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의견이다. 2007년 고흥에서 발굴한 유적은 시대를 명확하게 특정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해 여러 학설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 현지에서는 종장판주와 미비부주가 혼합된 몽고발형 미비부주(종장판 차양투구)라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투구도 소수 발굴되고 있어서 현지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일단 한일 교류 과정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각간 위홍의 집에서 보초를 서는 견훤의 부하들이 쓰는 투구로, 드라마 근초고왕과 계백, 광개토대왕에서 백제 병사 및 장군의 투구로 사용되었다.

2.4. 충각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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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적인 부품인 이마에서 정수리에 이르는 세로로 긴 철판을 중심으로 횡장판 또는 삼각판을 이어붙여 만든 투구이다. 역시 고대 일본을 대표하는 투구 형식이며, 한반도 남부에서 사용하였지만, 차양투구처럼 출토 예가 적다. 가야 무사를 재현한 자료에서 종종 보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신라 병사의 투구로, 광개토태왕에서 백제 병사의 투구로 사용.

2.5. 이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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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신라의 무덤인 경주 사라리 5호에서 출토된 신라투구이다. 장방형 철판을 가로로 휘어 배치한 뒤, 원두정 으로 고정한 투구인데, 비슷한 투구를 찾을 수 없어 이형주라고 한다. 코가리개나 볼가리개 부분등이 유사하여, 종장판주와 크게 다른 형태는 아니다.

2.6. 원주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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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말 5세기 초로 추정되는 고구려 사찰 정릉사지의 우물퇴적층에서 발견된 투구이다. 부식이 심하지만 투구 정개부에 리벳팅한 흔적과 고리를 철사로 고정한 장식부분은 구분이 될 정도이다.

2.7. 농오리산성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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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평안북도 태천군 농오리산성 출토품이다. 철판의 형태(화염문철판)와 리벳팅 기법 등이 후대 투구(발해-조선중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8. 금동장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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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후기로 추정되는 경상남도 합천군 옥전고분군 M3호 고분에서 출토된 투구이다. 부식전에는 금동으로 장식되어 화려했을 것이다.

화염문철판 여럿을 원두정으로 이어붙이고, 유사한 미간부를 근거로, 농오리산성 출토품같은 고구려 투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3. 부속갑옷

3.1. 어깨가리개(상박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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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서 팔꿈치까지(상완부) 보호하는 부속이다. 판갑, 찰갑과 세트로 사용되며, 판갑에는 긴 철판을 휘어 겹쳐서. 찰갑에는 쇠비늘들을 일렬로 늘어놓아 만들었다.

단, 국내에서 판갑용 상박갑이 발굴된 예는 극히 드물다. 종장판갑과 세트로 이루어진 상박갑은 현재까지 출토된 예가 없으며, 횡장판갑용 상박갑만이 일부 발굴되었을 뿐이다.[7] 일부 복원 자료에서는 공격에 노출되기 쉬운 상완부분 방어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인지 종장판갑에도 상박갑을 적용시킨 경우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 검증된 고증은 아니고, 추측의 영역에 가깝다. 제작이나 착용의 편의성을 위해 일부 부품을 가죽으로 만드는 경우는 흔한 만큼 종장판갑에는 가죽으로 만든 상박갑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내기도 했다. 가죽재질이라 부장자의 의복처럼 오랜 세월이 흘러 삭아 없어졌을 것이라는 이야기. 아니면 아예 상박갑을 부장품에 넣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상박갑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러한 추측들 중 어느쪽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에 정확한 사실은 아직 불명이다.

3.2. 치마갑옷(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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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판갑 아래에 보이는 치마 형태의 갑옷. 허리 아랫부분을 보호하는 부속이다. 실제로 상갑이 짧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고분 벽화를 참조하여 만드는 찰갑 고증 중 비교적 예전 고증에서 흔히 보이는 바지 형태의 다리를 전부 감싸는 갑옷 부속의 경우 실제로 제작하여 입게 될 경우 상식적으로 말에 올라타는 것은 고사하고 걸어다닐 때에도 활동성이 매우 떨어질 것이 뻔하고, 허벅지 안쪽까지 전부 감쌀 경우 말에 앉을 수 없을테니 한국 찰갑과 유사한 포형 갑옷인 티벳 찰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 옆으로 트임이 있는 갑상이거나 실제 유물로도 여러 차례 발굴됐으며 중국(영상 7분 10~20초의 대퇴갑 착장법 참조. 해당 일러스트를 그린 작가는 해당 부품을 퇴군(腿裙)이라고 부른다.), 일본 갑옷에서도 사용하는 ㅠ자 모양 대퇴갑일 가능성이 높다.

3.3. 목가리개(경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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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목을 보호하는 데에 쓰이는 부분. 목가리개는 삼국시대 갑옷의 특징적인 부품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종장판갑에 사용된 목가리래는 못을 사용해 완전히 갑옷에 붙어있지만, 찰갑에 사용된 목가리개는 가죽끈을 사용해 갑옷과 엮어서 연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찰갑용 목가리개 연결에 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각 지판을 연결할때는 가죽끈을 엮어서 사용하거나 원두정(리벳)을 사용하였는데, 초창기에는 가죽끈을 사용하가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원두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두정을 사용한 목가리개는 판갑처럼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는데, 철제 고리경첩 혹은 가죽끈 경첩이 사용되었다. 가죽끈으로 만든 경첩이 제작의 편의성이 있어서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드라마 연개소문과 근초고왕, 계백(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재현됐다.

목가리개는 조선 중기까지 찰갑경번갑 등에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이를 가리켜 호항(護項)이라고 불렀다.

3.4. 팔보호대(비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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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시 형태로 팔목을 감싸서 보호하는 갑옷. 발굴 당시에는 다리에 착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팔에 착용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기에 들어서 찰갑 형식의 비갑도 나온다.

3.5. 허벅지보호대(대퇴갑)

허벅지 부분을 따로 보호할 수 있도록 착용하는 부품.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북방계 찰갑의 영향을 받은 중국 갑옷의 대퇴갑(상술), 일본갑옷의 대퇴갑인 하이다테(佩楯)처럼 입는다는 학설이 우세하다. 상단의 마네킹이 입은 가야 찰갑 복원품의 허벅지에 있는 것이 대퇴갑.

3.6. 정강이보호대(경갑.脛甲)

정강이에 둘러 정강이, 종아리를 보호하는 부품. 비갑 형태의 유물 중 경갑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있는데, 판갑처럼 경첩으로 여닫을 수 있다. 신라, 가야 지역에서 발굴되는 찰갑에는 찰갑 형식의 경갑이 있다. 상단 가야 찰갑 복원품의 정강이에 있는 것이 경갑.



[1]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연구사는 "당시 제철/갑주 제작기술은 가야에 있었지만 실제 제작은 일본에서 이루어졌을 수 있다." 고 이야기했다.[2] 이를 들어 몇몇 일본 학자들은 고대 한국의 제철기술 수준이 조악하다는 주장으로 연결하기도 하는데, 까놓고 제철기술의 전파 경로를 따져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 실제로 종장판갑이 생산될 당시 일본은 쇠를 거의 다루지 못했다.[3] 쪽샘지구 고분에서 발굴된 신라 판갑의 복원품인데, 상박갑과 대퇴갑, 경갑까지 모두 갖춘 완전체 상태로 발굴됐지만, 기사가 나온 2013년 기준으로는 사진처럼 흉갑과 목가리개, 갑상만 복원된 상황이다.[4] 물론, 찰갑이 화살을 막아냈을 때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충격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타박상이나 골절 문제도 어느 정도 감안하고 판단하는 것이 좋다.[5] 현대 무기와 비교하자면 보통 권총에 쓰이는 파라벨럼 탄이 약 500J 정도이고 소총탄은 4자릿수로 그보다 훨씬 높다.[6] 디펜스 코리아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원문 출처 링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7] 구정동 고분 출토 종장판갑에서 어깨끈 형태의 철제 부품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깨와 쇄골, 상박을 전체적으로 가리는 모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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