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3년 3월 7일 |
평안북도 구성군 노동면 중방동 159번지 (현 평안북도 구성시 중방리) | |
사망 | 1964년 5월 16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66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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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행정공무원. 한국광복군에 복무한 공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23년 3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노동면 중방동 159번지(현 구성시 중방리)에서 태어났다.신경법정대학(新京法政大學)[1] 재학 중이던 1944년 만주국을 탈출해 그해 9월 하북성 북평시(北平市)에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했고, 광복군 제3지대가 주둔하던 안휘성 부양현(阜陽縣)으로 이동했다.
그 뒤 김영일, 박재곤, 박상기 등과 제3지대 기관지 '빛'을 발간해 광복군 자체의 교육자료로 이용케 하고 선전용으로 각 지역에 배포했다. 기관지 '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의 투쟁사와 일본군의 죄상을 밝혀 한국의 독립이 머지 않았다는 신념과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해 국민 총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한이윤은 창간호에 '행위의 이념'이라는 제목으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일부를 인용해 독립운동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담은 글을 발표하였다.
1945년 2월 중국 화중지구 지하공작대원에 선임되어 활약했고, 그해 5월 안휘성 입황현(立煌縣)[2]에서 김영일, 김용관, 이창도 등과 OSS 훈련 무전반에 편입되어 훈련을 수료했다. 1945년 8월에는 국내정진공작대에 무전반원에 선발되어 서울 진공 작전을 위해 평안북도 선천군 신미도 부근에 상륙하기로 계획하고 작전 명령을 기다리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3] 광복 후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휘하에서 김우전, 박승헌, 전이호, 옥인찬 등과 총사령부 주호 판사처에 근무하다가 옥인찬 휘하의 상해 지구 특파단에 파견되어 교포들의 치안 및 귀국 주선에 힘썼다.
귀국 후에는 행정공무원에 임용되어 보건사회부 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1960년 12월 3일 국립공주병원으로 전보되었다. 그 뒤 1963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63년 12월 16일 보건사회부 산하 부녀국이 부녀아동국으로 개편되자 부녀아동국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었다. 1964년 1월 대한적십자사 청소년부장 서영훈과 어린이 보건 정책에 대한 대담을 나눈 것이 기사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4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에서 갑작스럽게 별세했으며, 사후 같은 달 22일에 행정부이사관에 추서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5년 5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참고자료
공훈전자사료관독립운동사 제6권
#광복군 김문택 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