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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18:54

옥인찬

파일:옥인찬.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의령 옥씨[1]
출생 1917년 3월 4일
중화민국 상하이
원적 평안남도 평양부 대흥면 구리[2]
(현 평양시 중구역)
사망 1994년 9월 21일 (향년 77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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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성악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17년 3월 4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아버지 옥성빈(玉成彬, 1885. 2. 26 ~ 1933. 12. 18)[3]과 어머니(1890. 7. 7 ~ ?)[4]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여운형 등이 설립한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와 중국계 중학교, 푸단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8살에 교회 성가대에 들어가면서부터 음악과 인연을 맺었고,푸단대학 시절에도 방과후에 성악가 슈스린과 상해음악학교 교장 사자핀을 사사하는 등 성악공부를 병행했다. 그 뒤 성악가로서 활동하다가 1944년 중화민국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귀덕로(歸德路)[5]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 소속 특파 지하공작원 김병환(金秉煥)에 포섭되어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고, 이듬해인 1945년 광복군 제3지대가 정식 편성되면서 부대원들의 영어교육을 담당하는 한편, '순국선열 추도가' '혁명군 행진곡' 등을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순국선열 추도가'는 1993년 '선열추념가' '독립지사의 노래' '애국지사의 노래' 등과 함께 당시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安泰國), 김인전(金仁全)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순국선열 5위 봉환 국민제전에서 부르게 될 조가(弔歌)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6]

8.15 광복 후 광복군 제1지대 출신인 이소민(李蘇民)[7]이 한국광복군 주호 판사처 주임을 자처하며 상해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보고를 접하고 김학규의 휘하에서 김우전, 박승헌, 전이호, 한이윤 등과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 판사처에서 근무하였다.

귀국 후 1946년부터 성악가로 활동하여 홍콩에서 독창회를 열기도 하였고, 성악가 이인선의 문하생 발표회에 객원가수로 초청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인연으로 성악가 이인선이 주도한 오페라 공연에 참여하였고, 1948년 2월 부민관에서 국내 최초의 오페라 공연인 라 트라비아타 초연에 조르주 제르몽 역을 맡았다. 이후 미군부대와 관계되는 토건업에 종사하다가 1949년에는 과로로 인한 황달을 치료하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가 수 개월 간 요양하였다.

1950년 다시 귀국한 그는 오페라 카르멘에 출연하였고 세 번째 오페라 공연을 준비하던 중 6.25 전쟁을 맞았다. 당시 오페라 공연 준비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그는 서북청년단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피난했다. 부산 피난 후 미8군 심리작전국에 근무하며 중공군 포로를 심문하는 통역관으로 2년간 있었고, 1952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호 프랑스 유학생으로 리옹대학에 유학하면서 1년간 국제법 강의를 수강하였다.

1953년 귀국길에 잠시 일본 도쿄를 들러 미국인 지인을 만난 그는 지인을 통해 국제검사시험공사(INTECO) 부산지점 책임자 자리를 알선받았고, 이에 응해 귀국 후 수출입상품 검사 및 공증 업무를 하면서 1954년 진해 반공회의에서 베트남 공화국대표의 프랑스어 통역을 담당했다. 1957년 국제검사시험공사 방콕지점 매니저로 전근하면서 태국 방콕으로 이주했다. 이때 국제농산물검사원 자격을 얻은 그는 방콕 이주 후 태국 교민회장을 역임하였고, 1959년 사직하고 태국인 지인과 함께 '타이 프라스티'라는 무역회사를 창업했다. 1961년에는 방콕에 한국 음식점인 '아리랑식당'을 개업했는데, 이때 태국 제9대 국왕 라마 9세의 탄신일 연회에 한국음식을 준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구절판을 국왕 앞에서 요리해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1963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1964년부터는 한국예술문화진흥회와 제휴해 '코리언·쇼'를 방콕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후원해 문화, 예술계에도 족적을 남겼다. 그 뒤 아리랑식당은 경영에 차질이 생겨 곧 폐업했고, 개인 농산물검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태국인과 동업하던 '타이 프라스티' 회사 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대신 방콕 시내에 '서울 레스토랑'을 개업해 경영하는 한편, 매년 자선독창회를 열어 태국에 한국 음악을 알리는 민간사절로 활약했다.

1980년대 들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고, 1982년에는 한국광복군 시절 동지인 박노일(朴魯一)의 아내 곽영숙(郭英淑) 여사가 독립군가보존회를 운영하며 독립군가를 수집하자 자신이 한국광복군 복무 당시 직접 작사, 작곡한 '혁명군 행진곡', '순국선열 추도가'를 채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1994년 9월 21일 현지에서 별세하였다.

3. 가족관계


[1] 학생공파(學生公派) 23세 인(仁) 항렬.[2] 1911년 105인 사건 당시 제1회 공판시말서에 아버지 옥성빈의 출생지가 평안남도 평양부 대흥면(大興面) 구리(九里)로,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는 평양부 융흥면 9리 등으로 각각 기재되어 있는데, 어쨌든 대흥면과 융흥면 모두 '구리 또는 9리'라는 지명이 없었으므로 그 내력을 알 수 없어 현재 어느 행정구역으로 변모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3] 1885년 2월 26일 평안남도 평양부 대흥면 구리(현 평양시 중구역)에서 아버지 옥윤혁(玉潤赫, 1863. 10. 20 ~ 1929. 12)과 어머니 강씨(姜氏, 1862 ~ 1938. 1. 17)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황해도 수안군 연암면 입응동(현 황해북도 연산군)으로 이주해 회사 서기로 근무했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모살미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공소하여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도 같은 혐의에 대해 무죄선고받아 곧 출옥하는 등 독립운동가로서 수감 경력이 있다. 이후 1919년 3.1 운동 당시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가 프랑스 공부국(工部局) 경찰청에서 조선인계로 근무했다. 1933년 8월 1일 옥관빈 피살사건으로 6촌 재종제 옥관빈(玉觀彬, 1890. 1. 18 ~ 1933. 8. 1)이 암살당한지 4개월 뒤인 12월 18일, 상해특별시 프랑스 조계 맥새이체라로(麥賽爾蒂羅路)에서 암살당했다. 이렇듯 부친과 7촌 재종숙 옥관빈의 피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음에도 옥인찬은 후술하듯 한국광복군에서 복무하였다.[4] 본관과 성명은 알 수 없고, 다만 아버지의 이름이 문성(文成)인 것만 알 수 있다.[5]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상추시 량위안구(梁園區) 구이더로(歸德路).[6] 당시 최종 후보작은 1920년대 만주 독립군추도식에서 사용됐던 선열추념가가 채택되었다.[7] 김원봉의 측근이며 조선의용대 출신이다. 1945년 10월 중국국민당에 체포되어 20일간 구류되었고, 1946년 귀국해 남조선로동당 활동을 하다 월북, 6.25 전쟁 당시 중국에서 조선인민군의 후방업무를 맡았다. 그 후 행적이 불분명한데,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8] 첫째 남동생 옥인원(玉仁源, 1929. 9. 26 ~ )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