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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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채시라, 함은정(청년) | |
신분 | <colbgcolor=#fff><colcolor=#000>군부인 → 세자빈 → 수빈 → 왕비 → 왕대비 → 대왕대비 |
가족 | 아버지 한확, 어머니 남양부부인 홍씨 언니 정선군부인 한씨[1], 형부 계양군[2] 시부 세조, 시모 정희왕후 시동생 예종, 아래 동서 장순왕후[3], 안순왕후 시조카 인성대군, 제안대군 남편 의경세자 장남 월산대군, 장녀 명숙공주, 차남 성종 큰 며느리 승평부대부인 작은 며느리 공혜왕후, 폐비 윤씨, 정현왕후, 귀인 정씨, 귀인 엄씨 손자 연산군[4], 안양군, 봉안군[5] 진성대군[6] 사촌 오빠 한치형 |
1. 개요
인수대비의 주인공. 배우는 채시라[7]가 맡았으며 아역은 함은정이 맡았다.2. 특징
세조, 정희왕후의 큰 며느리, 의경세자의 부인이자 성종의 어머니이며 연산군, 중종의 친할머니.3. 작중 행적
3.1. 군부인이 되기전 시절
첫 등장으로 한확의 딸이자 세종의 서자인 계양군의 부인과는 자매지간[8]로 나왔다. 딸이 많은 집안이었고, 언니들은 이미 혼인을 하고 있으며 본인만 혼인하지 않는 유일한 처녀였다.
3.2. 군부인시절
집안과 왕족집안의 인연[9]으로 궐에 갔었는데 언니의 윗 동서이자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부인, 부부인 윤씨와 운명적인 만남이 되었다. 그러다, 자신을 구한 숭을 반하게 된다. 궐에서 봤던 수양대군을 찾아가 자신을 왕비로 만들어 달라며 수양대군의 야망을 함께 하기로 했다.[10] 그렇게, 수양대군의 아들인 도원군과 혼인을 하였고 서로 금슬이 무척 좋은 부부가 되었다.[11] 그래서, 1454년에 첫 아들인 월산군(월산대군)을 낳았다.
3.3. 세자빈, 수빈시절
이후, 수양대군이 왕이 되자 자신 역시 세자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으나[12]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만류[13]로 결국 되지 못하다가 며칠 지난후에야, 도원군이 세자가 되고, 본인이 세자빈이 되어 궐에 입궁한다. 1455년에는 명숙군주를 낳았고, 연어서 1457년에는 홋날 성종이 될 자을산군을 낳았다. 세 아이와 남편 도원군과 행복한 날만 보내줄 알았더니 도원군이 20세의 나이에 사망하자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불과 세자빈이었지만 장차 대를 이어갈 세손의 어머니였으나 세손과 왕자들을 사가에 나가야했고, 남편의 자리였던 세자를 원래의 자신 아들이 아닌 시동생인 해양대군에게, 세자빈은 아래 동서인 안순비한테 양보를 했다. 죽은 세자의 정실으로서 세자빈의 궁호인 수빈으로 내려져 '수빈'이라고 불렸다. 비록 직계에서 방계로 넘어갔으나 언젠간 아들들이 왕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에 하루만 울고 더 이상은 울지 않았다.[14] 시간이 흘려 어느새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어있던 시동생인 예종과 서먹하였으나 예종은 그런 수빈을 수빈이라고 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형수님'이라고 예우를 해드렸다. 예종과 화해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종이 사망하자 슬퍼했다. 예종의 아들(제안대군)이 어리다는 이유로 자신의 큰 아들인 월산군이 아닌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으로 지목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해 의경세자과의 약속대로 아들이 왕이 되는 순간에 울었다. 그러나 왕비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15]로 대비가 되지 못했고, 성종은 아버지를 의경왕, 어머니를 인수왕비로 하다가 의경왕에서 덕종을, 인수왕비에서 왕후로 추존하였다. 그 다음에 수빈은 드디어 대비가 되었다.[16]
3.4. 왕대비, 대왕대비 시절
아들이 왕이 되었음을 기쁨도 잠시, 어린 성종을 대리청정을 생모인 자신 아닌,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해야하는 상황에서 난감했지만 왕실의 큰 어른[17]이기에 양보했다. 그러나, 정희왕후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에 몰래 상소문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며느리인 공혜왕후를 걱정하며 보살폈다. 하지만, 효심을 가득한 공혜왕후의 피접에 반대했으나 한명회는 자신의 욕심이라며 거절하며 딸을 데리고 궐밖으로 나갔다. 이후, 중전의 자리가 비우자 다양한 후보중, 작은 윤숙의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이미 회임한 큰 윤숙의를 어쩔수 없이 중전으로 받아드렸다. 며느리로서 도리를 지켜야하는 마음에 책을 송이에게 건네 주었으나 잠든 송이를 보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아들 성종에게 한 번씩 찾아오거나 심지어 같이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인 의경세자를 닮은 성종을 보고 아버지 생각을 한다면서 아들 성종의 앞에서 울기까지 한다. 심지어, 송이가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자 참을수 없다는 이유로 폐비까지 요구했다. 성종은 할수 없이 어머니의 말대로 송이를 폐비 시키고, 인수대비는 송이의 행동을 보고 놀라면서 사약까지 내리도록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리면서. 성종 사후, 장손인 연산군이 왕이 되자 왕대비에서 대왕대비가 되었다.[18] 그러나, 연산군과 그닥 사이는 좋았지만 갑자사화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연산군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했고, 인수대비는 그런 연산군을 걱정을 했다. 그리고나서 조모인 인수대비에게 찾아가 머리 박치고 하다가 인수대비는 그대로 쓰려지면서 사망을 했다.[19]
4. 평가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고자 야망을 꿈꾸었으나 남편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이뤄질지 못하다가 결국, 아들 성종이 왕이 되고나서야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지만 손자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왕비였다. 결국, 장차 왕이 될수 있는 후계자 위치인 세자의 부인인 세자빈이 되었으나 남편 죽음으로 중전을 되지 못하고 세자빈에서 궁호인 수빈이 되었으나 다시 야망을 다시 꾸었다. 이번에는 아들을 왕으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 마저도 되었지만 한 여자아이(윤송이)과 엮이면서 홋날 그 아이가 낳는 아들이자 자신의 친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게 되어, 어쩌보면 이 드라마에서의 인수대비는 빌런이 아닐까 싶다.
5. 묘사
어느 인수대비를 다룬 드라마에는 비슷한 행보들이 많다. 실제의 인수대비의 진짜 모습은 달랐다. 아들이 중전 윤씨를 폐비를 시킨 일을 동참만 했지, 폐비를 시키라고 지시를 한적 없다. 심지어, 다른 대비(정희왕후, 안순왕후)도 이 일을 동참까지 했다. 드라마 인수대비의 인수대비와 드라마 왕과 나의 인수대비는 픽션을 담긴 이야기로 참고만 보면 된다.
[1] 극중, 소개 지막에는 계양군부인 한씨이라고 나온다.[2] 시조부인 세종의 서차남이다.[3] 공혜왕후의 언니이다.[4] 작은 며느리 폐비 윤씨(윤송이)의 소생.[5] 작은 첩 며느리 귀인 정씨의 소생.[6] 작은 며느리 정현왕후의 소생.[7] 드라마 왕과 비에 이어 인수대비 역을 두번째로 연기하게 되었다.[8] 결국, 나중에 도원군과 혼인함으로 언니인 계양군 부인이 시조부 세종의 며느리이기도 하고, 시어머니의 아래 동서이기에 작은 어머니가 된다. 자매끼리 작은 시어머니와 조카 며느리가 된셈이니 이때부터 족보가 꼬이기 시작한다. 반면, 언니의 자녀들도 역시 자신의 자녀들과 같은 조상을 두었고, 언니 자녀들은 곧 자신의 조카라 호칭 역시 애매해졌다. 차이점은, 조카들은 서자의 자손이기에 왕위 계승권이 없지만, 한정의 자녀는 적자의 자손이고, 시아버지가 왕이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을 충분히 가질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다.[9] 언니가 왕실의 시집으로 왔기에 인연이 아주 깊었다.[10] 이 대사로만 보면 부부인 윤씨를 내쫓고 본인이 수양대군의 부인이 되어 왕비가 되겠다고 들리겠지만 수양대군이 왕이 되고, 그의 큰 아들인 도원군이 세자가 되면 자신도 세자빈이 되면서 언젠간 남편이 세자에서 왕이 된다면 본인 역시 왕비가 되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다.[11] 첫만남부터 이미 도원군은 당돌하고 똑똑한 한정을 보고 반했었다. 결국, 혼인한데 성공까지는 했다. 하지만, 도원군은 한정과 달리 왕에 대한 야망조차도 없었다.[12] 도원군과 혼인을 하기전에 세조와의 약속을 떠올리면서 그럴수 없다면서 의심을 했다.[13] 사실은 세조 역시 큰 며느리 한정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으나 아직 세자책봉이 아니다는 정희왕후의 말과 며느리의 버릇을 고쳐야한다고 했다.[14] 이때, 천둥 번개 치던날이었다. 원래라면 세손이었던 장남인 월산군은 무섭다며 자신에게 왔지만, 일개 왕자인 차남 자을산군은 그럼에도 책을 끝까지 읽자 수빈은 다짐했던게 오늘만 울게 해달라, 내 아들이 왕이 되던 날까지는 울지 않겠다면서 하루만 울고, 이후에는 울지는 않았다.[15] 수빈은 세자의 정실인 세자빈이 되었다가 남편이 왕이 되지 못하고 자신 역시 왕비가 된적 없으니 당연하다.[16] 서열상 3위이었으나 아들인 성종이 생모라는 점에서 인수대비가 서열 2위로 당시 왕대비인 안순대비가 3위로 내려가게 되었다.[17] 성종의 5촌 당숙인 단종 역시 어린 나이에 즉위를 했으나 그때는 왕실에서 대비조차도 없었고, 오로지 후궁만 있으며 왕족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이점에서 왕이 될수 있었던 계기였다. 성종때는 삼대비(대왕대비, 왕대비, 대비)까지 있으니 그 자리를 노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18] 이미 그때 시점에는 대왕대비 윤씨(정희왕후)와 대비 한씨(안순왕후)는 사망할때다, 대비 한씨는 인수대보다 어렀지만 아마 스트레스로 아닐까 싶었다. 당시 인수대와 왕실의 큰 어른으로 있던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자순대비)도 연산군시기에 대비였다.[19] 실제 역사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