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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2:51:51

한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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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창기(韓彰璂)
자 / 호 재곤(在坤) / 앵보(鸚甫)
본관 청주 한씨[1]
출생 1936년 11월 11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면 고읍리[2]
사망 1997년 2월 3일 (향년 60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학력 연평학교(낙성국민학교)[3] (전학)
벌교남국민학교[4] (졸업)
순천중학교 (졸업)
광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 (신문학 / 석사[5])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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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이자 언론인. 전설적인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창간인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36년 11월 11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면(現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에서 아버지 한귀섭(韓貴燮, 1917. 8. 30 ~ 1947. 6. 17)과 어머니 옥천 조씨 조이남(趙二南, 1917. 3 ~ 1974. 12. 28)[6]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천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1961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1974년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에서 신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광주고 재학 시절 외국인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웠다. 대학 시절 영어 웅변 대회에서 1등을 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표창장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미군을 상대로 성경책과 비행기표를 판매하는 개인사업을 하다가, 1968년 1월 한국브리태니커를 설립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현대적인 세일즈 기법을 도입하고 마케팅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지사를 설립하고 낸 구인광고가 파격적이었다. 참고로 1971년 당시 구인광고는 '18~30세, 국졸 이상, 신체 건강한 자' 등의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나이가 몇 살이건, 고향이 어디건, 어느 학교를 나왔건, 지난날 무슨 일을 했건,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능력이 있는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소개서를 써서 사서함 OO호로 보내시오.

당시 면접을 보고 합격한 사원들에게 매일 아침 나는 구호를 외우게 했다고 한다. "나는 부지런하다. 적극적이다. 합리적이다. 끈기가 있다. 목표가 있다. 나의 능력을 믿는다."

브리태니커 사전 판매 사업이 잘되자 다시 시카고 본사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돈을 번만큼 한국을 위해 써달라, 미국 상품만 팔면 한국에서 반미운동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국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말도 안되는 요구라며 거절하던 본사를 향해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기를 5년째 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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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본사의 승인을 받고 브리태니커로 모은 돈으로 1976년 3월,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앞세운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했다. 한때 정기구독자가 6만 5000명[8]에 달할만큼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했으나 1980년 8월 ''계급의식과 사회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폐간당했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1984년 다시 샘이깊은물을 창간했다. 잡지와 책을 통해 한글의 글꼴과 쓰임을 다시 디자인했으며, 판소리 음반, 칠첩반상기 제작, 민중자서전 출판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의 토박이 문화를 대중에게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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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창기를 수식하는 단어는 국어 전문가도 울고갈 재야 국어학자, 출판계의 혁명인, 독창적인 언론인,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문화비평가, 판소리 대중화를 이끈 명창 이해가 등등 백과사전을 팔았던 사람답게 다방면에 폭넒은 지식을 보유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1997년 2월 3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에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9월, 글을 모은 책 <뿌리깊은 나무의 생각>, <샘이깊은물의 생각>, <배움나무의 생각>이 출간되었으며, 2008년 2월에는 잡지 형식의 추모집 <특집! 한창기>가 출간되었다.#

3. 여담



[1] 양혜공파(襄惠公派) 33세.[2] #.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3] 現 낙성초등학교[4] 現 벌교남초등학교[5] 석사 학위 논문: 우리말 경어법의 사회언어학적인 연구: 경어법의 역사적인 변천을 중심으로.[6] 조명만(趙命萬)의 딸이다.[7] 당시 피아노 한 대 가격보다 비쌌다는 브리태니커 사전 전집을 팔기 위한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도입했다고 한다. 당연히 주 고객층은 부자들.[8] 2016년 잡지 발행 부수 순위에 대응시켜 보면 유료부수 2위에 랭크된다. 물론 인터넷과 각종 미디어가 눈부시게 발전한 지금은 잡지에 대한 수요 자체가 크게 줄었으므로 단순 비교는 의미가 없다.[9] 차도신(車道新)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