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그레고리 무어 주니어 Harold Gregory Moore J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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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2년 2월 13일 |
켄터키주 바드스타운 | |
사망 | 2017년 2월 10일 (향년 94세) |
앨라배마주 오번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중장 |
복무 기간 | 1945~1977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 |
1. 개요
해롤드 그레고리 무어 주니어(1922년 2월 13일 – 2017년 2월 10일)는 미육군 중장이자 작가이다.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65년 이아드랑 전투에서 제7기병연대 1대대장이었다. 이 전투는 1992년 소설 We Were Soldiers Once와 2002년 멜깁슨이 출연 한 영화 We Were Soldiers로 제작되었다.2. 생애
2.1. 군입대 전
1922년 2월 13일 켄터키 주 바즈타운에서 해롤드 시니어와 메리 무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험설계사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전업 주부였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웨스트 포인트)에 입학하기 위해 17세에 켄터키를 떠나 워싱턴 DC에 있는 상원의회 서적창고에서 일하면서 야간 고등학교를 마쳤다. 졸업 2년 후 야간대학에 다니다가 켄터키 주 하원의원으로부터 추천을 받았으나 할당제였던 추천권은 해군사관학교였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에 가고싶었던 그는 육군사관학교 추천권이 있는 다른 하원의원에게 찾아가 추천권을 맞바꾸는 방법으로 설득하여 육군사관생도 전시 단기(3년)과정에 입학했다.2.2. 위관시절
소위 임관후 포트 베닝의 공수학교(6주과정)를 지원했으나 탈락하여 주일 제11공수사단의 공수교육대(3주과정)를 수료하였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일본 삿포로 근처의 캠프 크로포드에 있는 제187 공수연대로 보직받았다. 중대장까지 마치고 1948년 6월, 그는 미 본토의 제82공수사단으로 전출되었다. 1948년 11월까지 총 150번의 공수강하를 했다.1951년 그는 고등군사교육반을 수료하고, 1952년 6월 미 제7사단 제17연대의 중 박격포 중대장과 연대 작전장교로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다만, 소령 진급이 잠시 보류되는 일이 있었다. 당시 미군은 전투 중대장경력이 필수인데 박격포중대장은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대 작전장교까지 맡은 능력있는 장교의 진급누락 사유를 알게된 사단장이 보병중대장으로 보직시켜주었다. 전투 중대장 보직 이후에는 소령 진급과 사단 작전보좌관 직책을 순조롭게 마쳤다.
2.3. 소령~중령시절
1954년부터 육군사관학교 보병전술 교관을 3년간 맡았는데 후일 걸프 전쟁 당시 중부사령관이 된 노먼 슈워츠코프를 가르쳤다. 그는 무어 소령을 보고 보병에 지원했다고 밝혔다. 1960년 육군참모 대학을 졸업 후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NATO에서 작전계획장교로 3년 동안 복무했다. 1964년, 중령에 진급하여 국방전쟁대학을 수료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국제 관계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2.3.1. 1965년 대대장 부임 및 베트남전 파병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제23보병연대 2대대장으로 부임하여, 당시 제11공수사단의 공중강습사단 개편에 참가했다. 1965년 7월 제11공수사단은 제1기병사단으로 개칭되어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 무어의 대대는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제1대대로 개칭되었는데, (불운하게도...) 과거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대패한 리틀 빅혼 전투의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지휘하던 그 7연대 명칭을 계승한 것이었다. 1965년 8월 14일 포트베닝을 출발하여 수송선으로 남베트남에 도착하였고 한 달 후 사단의 안케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2.3.2. 이아드랑 전투 : 베트남 전쟁 최초의 대규모 교전
북베트남군과의 첫 번째 대규모 정규전인 이아드랑 전투에 참가해 3일간 북베트남군의 포위작전으로 착륙지역이 폐쇄되는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성공할 수 있는 수단은 늘 한 가지 더 존재한다"는 말로 부하들을 격려하며 버티었는데 결국 포병 및 공군 지원, 제5기병연대 2대대의 증원 끝에 착륙지역을 사수하고 북베트남군을 패퇴시켰다.그는 전투중 부상을 입어 퍼플하트(전상기장)를 수여 받았지만, 본인의 부상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반납하려 했고 제복에 착용한 적도 없다. 이아드랑 전투의 대승으로 수훈십자장을 수여받았고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3. 귀국 후의 삶
귀국 후 국방부 차관실에서 근무했으며 하버드 대학교에 위탁교육을 받아 1968년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베트남의 미 제9사단의 본토철수계획을 담당하였다. 1968년 8월,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9년 7월에 주한 미8군 참모장으로 부임하였다. 1970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주한 미 제7사단장이 되어 캠프 케이시로 부임하였는데, 이 시기에 사단에 만연했던 마약문제와 인종갈등을 해소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1973년 8월, 미 육군 인사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 그는 전역하기 전에는 육군부 인사참모부장을 역임하였다. 다음 보직으로 주일 미육군 사령관에 내정되었으나, 과감히 은퇴하기로 결정하여 1977년 8월 1일부로 32년간의 현역 복무를 마치고 군에서 전역했다.
3.1. 가족관계
82공수사단에서 복무중,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리아.B.콤프턴을 만나 1949년 11월 22일 부대교회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그렉 무어, 스티브 무어, 줄리 무어 올로우스키, 세실 무어 레이니, 데이비드 무어 등 5명의 자녀와 12명의 손주를 두었다. 아들 중 두명은 군인을 이어받았는데 한명은 대령, 다른 한명은 중령이다.3.2. 타계
2017년 2월 10일, 95세 생일을 사흘 앞두고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결혼 55주년이던 2004년에 먼저 세상을 뜬 7년 연하의 배우자 곁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