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에서 발견된 고대 삼국시대의 비석.신라비인지 대가야(반파국) 때 세운 가야비인지 내용 해석에 따라 논란이 있는데, 만일 가야비일 경우 현존하는 유일한 가야 비석이 된다.
2. 설명
이전부터 마을 입구 선돌로 주민들에겐 알려져 있었지만,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89년 5월 발견 때였다.그 모양은 자연석 형태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매끈하게 다듬은 비석임이 분명하다. 다만 넓은 비면의 가운데가 아닌 우측 상단에 내용이 치우쳐 있고 뒷면에는 딱 한 글자만 써 있어서 만들다가 도중에 중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비문은 마모가 너무 심해서 10~15글자 정도만 겨우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보이는 글자도 애매한 게 많아서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판독하는 형편이다.
비석의 건립 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단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亥年'이다. 육십갑자가 분명한데, 앞 글자는 마모가 심해 읽기 힘들지만 辛로 추정되는데 辛亥年이면 531년, 아직 가야가 건재하던 시기다. 앞 글자는 제쳐두고 본다면 555년(乙亥年), 543년(癸亥亥), 519년(己亥年), 507년(丁亥年) 등이 꼽힌다.
다른 하나의 근거는 비문 중 간지(干支)라는 부분이다. 간지는 신라를 포함한 진한권, 가야권 등 영남 지역에서 왕 이전에 사용했던, 임금 내지는 지역수장급 귀족에게 붙었던 칭호다. 신라비는 이미 여럿 발견되었는데 551년경 단양 신라 적성비까지는 경위 뒤에 干支가 붙지만 561년 창녕 진흥왕 척경비부터는 표기가 사라진다. 즉 干支가 판독되는 매안리비는 만약 신라비라면 561년 이후에 세워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비석이 세워진 합천은 고령 인근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상 과거부터 고령에 속한 영현이었으며, 고령 대가야가 562년에 신라에게 멸망했으므로 561년 이전, 즉 대가야 시대에 세운 비석이란 것이다.
한편 신라비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그 근거로는 일본서기에는 가야의 수장층이 干支가 아닌 旱岐로 표기된 점,[1] 신라에서 당시 하나의 지역 또는 행정 단위로 기능한 '村'이 보인다는 점, 대가야의 중심지인 고령을 비롯해 이런 비석이 세워진 사례가 없는데 정작 대가야의 변두리인 합천에서 큰 비의 건립이 의문스럽다는 점, 기년이 분명치 않고 562년 이전 대가야가 멸망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반드시 건립 시점을 가야 멸망 이전이라고 단정해서는 곤란하다는 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