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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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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Prinzessin Viktoria von Hessen und bei Rhein
파일:Princess_Victoria_of_Hesse_and_by_Rhine.png
<colbgcolor=#E0EEE0> 이름 독일어 빅토리아 알베르타 엘리자베트 마틸데 마리
(Viktoria Alberta Elisabeth Mathilde Marie)
영어 빅토리아 앨버타 엘리자베스 마틸드 마리
(Victoria Alberta Elizabeth Mathilde Marie)
출생 1863년 4월 5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버크셔 윈저 윈저성
사망 1950년 9월 24일 (향년 87세)
영국 런던 켄싱턴 궁전
장례식 1950년 9월 28일
와이트 섬 휘핑햄 세인트 밀드레드 교회
배우자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1884년 결혼 / 1921년 사망)
자녀 앨리스, 루이즈, 조지, 루이
아버지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어머니 영국의 앨리스 공주
형제 엘리자베트, 이레네, 에른스트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알릭스, 마리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연애 결혼3.3. 결혼 생활3.4. 가문의 수많은 비극을 지켜보다3.5.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기타

[clearfix]

1. 개요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영국의 앨리스 공주의 맏이이며, 그리스와 덴마크의 앨리스 왕자비,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 조지 마운트배튼, 루이 마운트배튼의 어머니이자 영국의 국서였던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할머니다.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파일:앨리스공주와 어린 빅토리아.jpg
어머니 앨리스 공주와 어린 시절의 빅토리아
1863년 4월 5일에 윈저 성에서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보는 앞에서 태어났다. 빅토리아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주들 중에서도 최초로 영국에서 태어난 손녀였던데다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외할머니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1]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독일인과 혼인한 이후에도 생활 방식은 영국식을 고수했는데, 이는 자식들의 교육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빅토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등 똑똑한 아이였다. 가장 가까운 나이인 여동생 엘리자베트와 친밀하게 지냈다.
파일:VictoriaBattenberg.jpg
어린 시절
행복해 보였던 빅토리아의 유년 시절은 1878년 끝이 났다. 헤센 대공가를 덮친 디프테리아는 빅토리아의 바로 아래 동생인 엘리자베트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에게 마수를 벌렸다. 투병하던 막내 여동생 마리는 11월 16일에 사망했으며,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그 전부터 혈우병 환자였던 차남 프리드리히의 죽음으로 깊은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고, 직접 가족의 병간호를 하다 자신도 디프테리아에 전염되어 아버지의 기일인 12월 1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파일:0738FE86-62CB-4EBF-AE42-9A101A4CC717.jpg
왼쪽부터 엘리자베트, 에른스트 루트비히
빅토리아, 알릭스, 이레네
어머니 앨리스 공주의 죽음으로 대공국의 가장 지위가 높은 여성이 된 빅토리아에게는 아버지를 보좌해서 궁정을 이끌 책무가 있었고, 동생들을 돌보는 것까지 빅토리아의 몫이 되었다.[2] 빅토리아 여왕은 이런 외손녀를 위해 자주 편지로 조언을 해 주었고, 이는 여왕과 빅토리아의 관계가 조손 관계보다 모녀 관계에 가깝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빅토리아와 여동생들은 자신을 정서적으로 영국인이라고 느끼게 된다.

3.2. 연애 결혼

1884년 빅토리아는 5촌 관계인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3] 서로 만나서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다. 다만 아버지 루트비히 4세는 상대가 귀천상혼 가문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서 반대했다.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역시 빅토리아가 혼자 사는 아버지의 곁에 남아서 어린 동생들을 좀 더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영국 해군으로 일하는 루트비히의 근무 특성상 거주지를 자주 옮겨야 하므로 동생들에게 소홀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두 사람의 결혼에 염려를 보였다.[4]

그러나 빅토리아의 간곡한 설득으로 여왕은 마음을 바꿔 결혼을 허락하게 된다.[5] 다만 약혼 기간은 제법 긴 1년이었다.[6] 손녀의 결혼으로 헤센 대공가를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은 사위 루트비히 4세가 딸의 결혼식 날 러시아인 이혼녀와 귀천상혼을 하게 된 것을 발견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다행히 루트비히 4세가 혼인 무효화를 하여 빅토리아의 결혼은 무사히 진행된다.[7]

파일:VictoriaLouis.jpg
빅토리아와 루트비히.

3.3. 결혼 생활

공식적으로 아내인 빅토리아가 남편인 루트비히보다 신분이 높았다.[8] 그러나 빅토리아는 헤센 대공국의 공녀로서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루트비히의 신분에 따라 행동하여 남편을 존중하고 따르는 현명한 언행을 보였다.[9] 물론 루트비히도 그런 아내를 크게 아끼고 가정 일과 친정 일을 같이 하는 아내의 사정을 이해하고 돕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10] 게다가 빅토리아 여왕도 그런 외손녀 부부가 여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버킹엄 궁 열쇠를 빌려주는 등, 여러모로 지원해 주었다.

1885년 2월 25일, 빅토리아는 그녀의 첫 아이인 앨리스를 여왕의 뜻에 따라 자신이 태어났던 윈저 성에서 출산한다. 앨리스는 선천적인 청각장애인이었으나 빅토리아의 헌신적인 교육과 보살핌으로 독순술로 영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여왕은 이 증손녀를 매우 총애했다. 빅토리아는 남편의 근무에 따라 자주 영국헤센, 몰타를 오갔다. 앨리스가 어느 정도 자라자 여왕은 다시 아이를 낳을 것을 권유하였고 빅토리아는 차녀 루이즈(1889), 장남 조지(1892), 차남 루이(1900)를 출산했다.[11]

3.4. 가문의 수많은 비극을 지켜보다

파일:ViktoriaMountbatten.jpg
전 유럽이 서로 총구를 겨눴던 제1차 세계 대전은 빅토리아의 가정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영국 내의 반 독일 감정에 따라 조지 5세는 독일 친척들에게 그들의 작위를 포기하라고 명령해 영국 내 바텐베르크 가문 사람들은 독일식 성인 바텐베르크에서 영국식으로 변형한 '마운트배튼'이라는 성씨를 얻었고 남편은 밀포드 헤이븐 후작이 됐다.[12] 그러나 이는 불행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먼저 남편인 루트비히는 독일계란 이유로 자신이 오랫동안 근무해 온 영국 해군에서 강제로 내려와야 했으며, 해군으로서 남편의 자부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빅토리아는 이런 처우를 내린 사촌동생 조지 5세의 행동에 누구보다 분노했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며 러시아 황실로 시집 간 두 여동생 엘리자베트알릭스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했다.[13] 1차 세계대전은 남편도 모자라 그녀의 남동생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대공위도 앗아갔고, 반 독일 감정으로 에른스트는 물론 독일로 시집간 여동생 이레네와도[14] 이별해야 했다.

이런 비극을 바라본 빅토리아는 겉으로는 상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두 동생들의 죽음을 잊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고된 정원 일을 하였다.[15] 그래도 다행인 건 남편 루트비히가 여동생들을 잃은 빅토리아의 곁에 있어주며, 어떻게든 독일 쪽에 있던 동생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이레네를 만나게 도와주고 엘리자베트의 시신을 예루살렘에 안장할 수 있게 돕는 등, 빅토리아를 위해 이모저모로 노력을 했었다.

여기서 비극이 끝났으면 나았겠건만 1921년 남편 루트비히가 심부전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으며 사별한다. 게다가 장녀 앨리스가 시집 간 그리스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결국 앨리스의 가족은 그리스에서 추방되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앨리스가 조현병 진단을 받고 긴 요양 생활을 시작하면서, 빅토리아는 외손자 필리포스를 돌봐야 했다.

그 후 1937년 또 다시 깊은 슬픔을 마주하게 된다. 남동생의 사망으로 형제를 또 잃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증손녀 요한나를 제외한 대공가의 가족들이 전원 사망한 것이다.[16] 사고를 피했던 요한나도 수막염으로 요절해 버렸다. 섬뜩하게도 빅토리아의 막내 동생 마리의 사망일과 조카 엘리자베트[17]의 사망일, 사고가 일어난 날은 모두 11월 16일로 동일했다.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1938년에는 장남 조지를 골수암으로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필 빅토리아 본인은 당시 기준으로 매우 장수했기 때문에 헤센 대공가의 비극을 모두 지켜본 것이다.

3.5. 말년

파일:princessvictoria.jpg

1947년 외손자 필립 공엘리자베스 2세의 결혼식에 신랑 어머니인 딸 앨리스와 함께 신랑 가족으로 참석했다.[18]

1948년에는 증손자 찰스가 태어났고, 빅토리아는 증손자의 세례식에도 참석하였다.
파일:PrincessLouis.jpg
증손자 찰스의 세례식에서의 빅토리아

이후 1950년에 기관지염[19]으로 남편과 사별한 이후부터 계속 거주하던 켄싱턴 궁전에서 87세에 사망했다. 와이트 섬 휘핑햄 세인트 밀드레드 교회[20]에 남편 루트비히 곁에 안장됐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헤센 대공국의 빅토리아 대공녀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colbgcolor=#fff3e4,#331c00>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colbgcolor=#ffffe4,#323300> 헤센 대공국의 카를 공자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21]
(Prince Wilhelm of Prussia)
헤센홈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여방백
(Landgravine Maria Anna of Hesse-Homburg)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22]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Saalfeld)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앨리스
(Alice, Princess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1885년 2월 25일 1969년 12월 5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23]
슬하 1남 4녀[24]
2녀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
(Louise, Queen of Sweden)
1889년 7월 13일 1965년 3월 7일 스웨덴구스타프 6세 아돌프
1남 제2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
(George Mountbatten,
2nd Marquess of Milford Haven)
1892년 12월 6일 1938년 4월 8일 나데이다 미하일로브나 데 토르비 여백작[25]
슬하 1남 1녀
2남 제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 마운트배튼
(Louis Mountbatten, 1st Earl Mountbatten of Burma)
1900년 6월 25일 1979년 8월 27일 에드위나 애슐리
슬하 2녀[26]

5. 기타



[1] 빅토리아 여왕은 첫 손녀였던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빅토리아 황후의 장녀)의 퍼스트네임을 빅토리아라고 짓지 않은 것에 대해 서운해 했다고 한다.[2] 살아남은 아이 중 막내였던 알릭스는 이 때 일곱 살도 채 되지 않았었다.[3] 아버지 루트비히 4세의 친사촌으로 당숙부다.[4] 당시 빅토리아 공녀가 결혼을 결심했던 시기에 남동생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만 15세 밖에 안 됐었고, 특히 막내 여동생인 알릭스는 만 12살로 동생들 모두 어머니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던 나이대였다. 게다가 비슷한 해에 빅토리아 바로 아래 동생인 엘리자베트러시아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5] 빅토리아 여왕이 앨리스 공주 소생의 외손녀들이 맞이한 남편들 중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한 결혼이었다. 여왕은 빅토리아 공녀의 여동생들 중 엘리자베트 공녀가 러시아의 세르게이 대공과 결혼하려고 하자 반대했고, 특히 프로이센으로 시집간 이레네 공녀와 또 다시 러시아 황실로 시집간 알릭스 공녀의 결혼에 매우 분노했다.[6] 외삼촌인 레오폴드 왕자의 죽음으로 결혼이 늦어졌기도 했다.[7] 재미있는 사실은 빅토리아의 결혼식에서 그녀의 막내 이모인 베아트리스 공주와 루트비히의 동생인 하인리히가 처음 만났다. 이후 베아트리스와 하인리히가 결혼하면서, 이모-조카는 동서관계가 된다.[8] 빅토리아는 헤센 대공국의 공녀로서 태어날 때부터 Her Grand Ducal Highness 칭호를 가지고 있었지만, 루트비히는 귀천상혼으로 파생된 가문의 공자로서 빅토리아보다 격이 낮은 His Serene Highness 칭호를 가졌다.[9] 빅토리아의 둘째 외숙모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는 러시아 황녀라는 자신의 신분에 지나치게 도취되어, 시가인 영국 왕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평판을 깎아 먹는 일이 다소 있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남편을 존중한 빅토리아의 행동은 정말 현명했다.[10] 참고로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는 빅토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소싯적에 꽤나 유명했지만, 빅토리아와 결혼한 이후에는 바람 한 번 안 피우고 오로지 아내만 바라보고 사람들 앞에서 아내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할 정도로 애처가가 되었다. 당대 왕족들은 정략결혼이 기본이었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왕녀들도 많았는데, 빅토리아와 루트비히의 결혼생활은 오늘날의 현대인이 봐도 꽤나 행복한 축에 속한다.[11] 요즘 기준으로도 자녀들의 나이 터울이 꽤 있는 편인데, 결혼하자마자 연년생을 서너 명씩이나 낳는 것이 당연했던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특이한 축에 속했다.[12] 다만 이 일이 있기 먼저 시집간 큰딸 앨리스와 조카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공녀는 한번도 성이 마운트배튼이었던 적이 없다. 독일에서 살고 있던 동서 몬테네그로의 안나 공주는 여전히 바텐베르크의 공자비였다. 하지만 또 다른 동서인 베아트리스 공주는 더 이상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가 아닌 영국의 공주로만 불렸다.[13] 여기서 알릭스의 남편이자 빅토리아의 제부인 니콜라이 2세, 빅토리아의 조카들인 알릭스의 자식들(올가, 타티아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마저 모두 총살당했다.[14]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이모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차남)와 결혼했다.[15] 이 시절의 빅토리아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잇살로 뚱뚱해져 있었는데 동생들의 죽음에 대한 충격을 잊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고된 정원 일을 하다보니 살이 죄다 빠졌다고 한다. 이후 빅토리아는 러시아인들을 증오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두 여동생, 제부, 조카들을 모두 죽인 볼셰비키만큼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빅토리아의 외손자인 필립도 자신의 친족들을 죽인 볼셰비키들에 대한 증오를 감추지 못했다.[16] 게오르크 도나투스 대공은 빅토리아의 조카였으며 대공비 체칠리아는 빅토리아의 외손녀였기에 두 사람은 빅토리아의 가까운 가족이었다.[17] 동생 에른스트 루트비히빅토리아 멜리타 사이의 외동딸이다.[18] 다만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반독일 감정이 극심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독일 왕공족들과 결혼한 빅토리아의 외손녀들은 신랑의 누나였지만 모두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19] 16세(!)부터 담배를 피워온 영향으로 보인다. 말년에는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기침을 했다고 한다.[20] 밀드레드 교회는 빅토리아 여왕이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에게 준 바텐베르크 예배당이 있다. 또한 앨버트 공,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앨리스 공주 등 왕실가족들을 추모하는 기념관들이 있다. 다만 빅토리아는 야외의 교회 묘지에 안장됐다.[21]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4남이다.[22] 조지 3세의 4남이다.[23] 요르요스 1세의 4남이다.[24] 호엔로헤랑엔부르크 공비 마르가리타, 바덴 대공비 테오도라, 헤센 대공국 공세자비 체칠리아,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비 소피아, 에든버러 공작 필립[25] 니콜라이 1세의 손자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31]과 메렌베르크의 조피 여백작[32]의 차녀. 외할머니 나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푸시키나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딸이기 때문에 푸시킨의 증손녀이기도 하다.[26] 제2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여백작 패트리샤 등.[27] 장녀 앨리스의 아들이 필립 공이다.[28] 첫째 여동생 엘리자베트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둘째 여동생 이레네프로이센의 왕자비, 막내 여동생 알릭스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29] 엘리자베스 2세의 직계 후손들이 모두 빅토리아의 여계 후손이며,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의 장남 조지와 차남 루이의 후손들도 모두 귀족으로서 대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장녀 앨리스와 차남 루이의 후손들이 자녀들을 많이 낳아서 오늘날에도 번창하고 있다. 반면에 여동생들 중 엘리자베트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알릭스는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모두 총살당했고, 남동생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장남 가족은 비행기 사고로 모두 사망하고 차남 부부도 후손을 남기지 못해 단절되었다. 그나마 현재까지 대를 이어가고 있는 건 둘째 여동생 이레네의 후손 뿐인데, 이레네의 후손은 빅토리아에 비하면 그 수가 현저히 적다.[30] 실제로 한 말: 어머니는 평생 모든 종류의 주제에 대한 지식을 축적했으며, 어머니가 내게 가르쳤을 때 그 모든 것을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과목별 시간표가 있어서 준비도 해야 하고 열심히 하는 것도 좋아하고 철저하게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정치나 피부색, 그런 것들에 대한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