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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전후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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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홀로코스트 담론에 대한 비판3. 우파 시오니스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오류4. 홀로코스트 허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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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shutterstock_728283397.jpg

바빈야르 학살 집단 매장지의 2017년도 모습. 학살 현장 위로 숲이 자라며 과거의 흔적을 가리고 있다.

파일:belzec memorial.jpg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의 터에 세워진 추모지. 자그마치 60만명이 학살당한 현장인 이 수용소는 1990년대까지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
이게 바로 여기 숲의 매력이에요.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죠.

그래도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곳이 항상 고요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한때는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총성과 사람들 비명, 개 짖는 소리로 가득했죠.
당시 이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에는
그 시기가 특히 더 인상 깊게 남아 있을 겁니다.

봉기가 있고 나서
독일군에서는 수용소를 폐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1943년 초겨울에
이곳의 흔적을 모조리 숨기기 위해
3~4년 정도 자란 작은 소나무들을 심었죠.

"그게 저 나무들인가요?"[a]
네 맞습니다.
"저기가 옛날에는 전부 구덩이들이 파여 있던 곳이라고요?"[a]
네. 1944년에 이 숲을 처음 본 사람도
그 전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저 나무들이 이곳이 절멸 수용소였다는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 얀 피본스키(Jan Piwonski), 대전 당시 소비보르 기차역 철도 보조 관제사. 《쇼아》27~28p에서 발췌.
땅이여, 내 피를 숨기지 말고,
그 피가 나를 위해 계속 부르짖게 해 다오!
- 베우제츠 추모비에 적힌 성경 구절. (욥기 16:18)

하나도 놀랄 것 없이 종전 직후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는 서서히 잊혔다. 이만큼 거대한 사건이 그토록 쉽게 잊힐 수 있다는 것은 얼핏 충격적이고 이상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도 지난 6.25 전쟁 당시에 그토록 무수한 학살을 겪었으면서도, 막상 기억하는 학살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단순화되어 있지 않은가. 무수한 학살이 이뤄졌던 많은 장소들은 현재 평범한 아파트 단지이거나 시가지의 일부가 되어 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학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게 하고, 6.25 전쟁이나, 2차대전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죽어나간 전쟁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의 상처를 잊고자 한다. 전쟁의 많은 면들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학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비록 민간에서의 연구에 국한되며 전범재판 등을 위한 사실파악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이렇게 얻어진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도, 알려지게 할 의지도 없었다. 서서히 음지로 묻혀가던 학살의 기록들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것은 학살수용소에서 생존한 생존자들이 직접 제작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역사가들 덕분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동 각국의 친소련화가 심화되고 미국의 대 중동전략이 변화되면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강화되자 홀로코스트는 새로운 조명을 받았다는 해석도 있다.[3]

그리고 독일에서도 냉전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나치 독일의 행위를 독일이라는 국가 전체에서 괴리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즉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전적으로 히틀러, 나치, SS 친위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평범한 독일인들은 억압당하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논리가 독일 신 보수주의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독일 의회는 매년 1월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초청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연다.

2. 홀로코스트 담론에 대한 비판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사건은 분명 다시는 있어선 안 될 참극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홀로코스트를 산업화해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비난 여론도 나온다. 미국 유대인 로비 단체들이 학살된 유대인들의 유럽은행 예금이나, 몰수된 재산과 미술품 등에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해 받아내 상당액수를 유용하거나 하는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홀로코스트 산업>을 보면 지은이 노르만 핀켈슈타인[4] 또한 부모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임에도,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들먹이며 일부의 배만 채운다고 강력하게 비난하며 여러 자료를 내보이고 있다. 게다가 홀로코스트를 핑계삼아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오니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하는 짓도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다. 더욱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미국의 언론을 주도하는 세력이 유대인이기에 이 점을 고의적으로 우회하고 그들의 적인 아랍인의 잘못만 들춰서 비난하는 여론 조장에도 상당한 한몫을 한다. 실제로 이 홀로코스트 악용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은, 2차 대전 이후의 반유대주의에겐 핑계거리가 되었다. 반유대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팔레스타인 문제와는 또 다르다. 역사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느냐 아니냐가 문제이다. 유대인은 전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후자다.(이스라엘은 전자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 중에서도 '역사적인 진실을 법적인 진실로 만들 필요가 없다'라며 반홀로코스트 부정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희생자들 한글자막

한편, 유대인 학살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됨으로써 다른 학살들이 외면된다는 비난도 존재한다. 실제로 2차 대전 당시 소련인들은 약 2,600만, 중국인들은 약 2,200만이 죽어 유대인 사망자의 수 배에 이르렀다. 또한 인도네시아인 400만, 비유대계 폴란드인 300만,[5] 인도인 300만, 베트남인 220만, 유고슬라비아인 170만, 필리핀인 100만 등 백만 단위 사망자는 세계 각지에서 발생했으며 서유럽에서도 100만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600만이 죽었다고 추산되는데 대중은 유대인 학살에만 관심을 갖지, 동시기에 벌어진 다른 대규모 학살이나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등 비유대계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유대인들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6]

또한 2차 대전보다 훨씬 현세대에 가까운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에 발생한 캄보디아킬링필드르완다 학살, 유고 내전 당시 세르비아의 대규모 인종청소 행위,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북한의 각종 인권유린 등 더욱 관심을 받아야 할 범죄들조차 관심을 덜 받고 있는 형국이다.

비단 제2차 세계 대전뿐만 아니라, 예컨대 미국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을 개관할 때 미국 원주민들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작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학살한 땅 위에 건설된 미국이 그에 대한 기억은 배제하면서 멀리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추모한다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학살은 외면하고 오직 유대인 학살만을 강조하는 경향에는 미국 언론의 영향력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언론들의 절대다수가 유대계이며 이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만을, 그것도 유대인이 죽은 사실만 강조했다. 유대인의 4~5배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던 소련과 3~4배의 희생자를 배출한 중국이 미국의 주요 적국이라는 점도 이러한 성향을 더욱 더 부채질했으며, 결국 우리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벌인 학살이라고 하면 홀로코스트을 떠올리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사상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고도로 합리적인 관료 체계,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독일에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여 산업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학살하였다는 사실은 유럽 여러 학자들의 문제 의식을 자극하였고,[7]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8]로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목표의 정당성을 생각하지 않는 도구적인 합리성과 이성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유명한 저서를 다수 남겼다. 계몽의 변증법이 그 중 하나이다. 이것이 사회 교과서에서 나오는 실질적 법치주의와 형식적 법치주의의 예시, 뉘른베르크 법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외에도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문제로 이후에 체포된 아이히만 공판을 보고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이는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를 낳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발단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홀로코스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비난도 있다. 그 중 한 가지 원인은 동구권의 몰락인데, 얼핏 듣기에는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동구권의 몰락은 유대인 문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동독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이들은 반나치즘을 국시처럼 내세우면서 유대인 학살 문제 등을 과장하면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희석시키려던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구권 몰락 후 아우슈비츠의 희생자 수가 3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9] 정정되는 등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치즘의 반공산주의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일부에서는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착각하지 말것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네오나치가 아니다.이들 역시 네오나치와 나치가 행한 여러 만행에 대해선 의견을 같이한다. 이들의 주장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정확한 수치가 알려진 수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독일의 여건 등을 고려해보면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 다른 비판으론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국가들도 제노사이드를 행했는데 나치의 유대인 학살만 들먹이냐는 내용도 있다. 영국과 프랑스 등 대규모 식민제국 외에도, 그 작은 벨기에조차 콩고에서 고무 등의 자원확보 과정에서 총합 2000만의 홀로코스트 희생자보다 못하긴 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망자를 야기했으며[10] 이외에도 인류사의 수많은 나라에서 제노사이드가 발생했다. 상기한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 설립식에서 미국 원주민에게 행한 만행들은 사과하지 않고 유대인의 아픔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던 외침은 쉽게 묵살할 것이 못 되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 및 학살에 대한 원죄가 있다.[11] 물론 전후 학자들이 홀로코스트에 충격받은 이유는 단순히 그 규모 때문만이 아니라 '특정 인종 자체를 지구상에서 절멸한다는 충격적인 발상' 및 '인간을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 학살했던 방식', '그 동안 서양 철학에서 사람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하게 했던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이성을 이용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학살했던 방식' 때문에 다른 제노사이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다른 나라들이 자국의 죄과는 돌이켜보지 않으며 홀로코스트만 비난하는 점에는 문제가 있다.

동성애자들은 독일에 남아있던 동성애자 처벌법(소도미법 또는 계간죄)인 형법 175조로 인해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해방되자마자 다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것도 나치가 모았던 정보를 토대로 말이다. 독일 형법 175조는 1969년이 돼서야 사문화됐고 1994년이 돼서야 공식적으로 형법에서 삭제되었다. 2002년이나 돼서야 독일 정부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에게 사과했고, 형법 175조에 의한 피해자 구제는 2016년 현재 진행형이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가면 1만 9073㎡의 부지에 콘크리트 비석 2,711개가 설치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가 있는데,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길 건너 티어가르텐 한가한 구석에 코딱지만 하게 설치되어있다.[12]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 추모비에는 홀로코스트로 인한 희생자의 숫자가 1,000만 명으로 기재되어 었다.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모든 사람의 수를 합친 숫자로 유대인뿐 아니라 폴란드 등의 슬라브인 및 전쟁포로들, 집시들, 동성애자, 장애인, 나치에 반항한 항거자[13]까지 포함한다. 아트 슈피겔만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는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보이는 미국 거주 유대인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바 있고, 이 일화를 국내에 소개한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 역시 이런 유대인들의 배타적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임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배타적 태도가 반드시 외부 집단에 한정되었던 것도 아니고,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하여 팔레스타인에 이주했던 유대인들이 전후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서 유럽에 잔류했다가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들에 대하여 보인 우월의식에 대하여 비판한 바도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

3. 우파 시오니스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오류

....시오니스트에게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는 영웅도 정복자도 지배자도 행동하는 인간도 없는, 울며불며 자비를 구걸해온 비겁한 역사였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찾아온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도 짊어지기 싫은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시오니스트가 보기에 홀로코스트 희생자, 생존자는 이미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으로 동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온주의를 부정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를 거부한 민족의 배신자였다. 특히 생존자는 강제수용소 같은 끔찍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극도로 이기적 존재였다.

시오니스트와 디아스포라의 권력 관계는 이스라엘의 민족시인이자 시오니스트인 이츠하크 사데의 시 "해변의 누이"에서 잘 드러난다. 시는 난민선을 타고 이제 막 팔레스타인 해변에 도착한 홀로코스트 생존자 소녀와 건장한 시오니스트 청년의 만남을 그린다.

그의 눈에 비친 소녀는 "정말로 더럽고, 옷도 누더기처럼 헤져있고, 머리칼도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녀의 살갗에는" 나치 장교를 상대하는 매춘부임을 의미하는 "장교 전용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음을."

그와 마주선 소녀는 울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제가 정말 이 젊고 건강한 청년들이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살아서는 안 돼요"

시오니스트의 시 속에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 소녀는 이렇게 자기 몸과 자기 자신을 배반하고 결국 자기 민족을 배반한 이중의 배반자로 재현된다.

임지현, "기억전쟁" 휴머니스트, 2019, 110-111
그러나 다른 한편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적대적인 아랍인들과 투쟁하면서 동시에 황무지를 개간해야 했던 건국 초기 이스라엘 정치지도자들이 내세운 모범적 인간상은 "싸우면서 건설하는" "새로운 유대인" 이었다. 그들은 홀로코스트 기간을 포함한 디아스포라 시절의 유대인들을 강자에 대한 순응을 생활의 철칙으로 삼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과 서비스업에 종사해 삶을 유지하는 "기생인간(Luftmensch)" 으로 규정했던 반면, 자신들을 포함하여 일찍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전쟁영웅"과 "생산적 선구자"로 묘사했다.
(중략)
침묵의 세번째 이유는 건국 직후의 사회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종전 후 몇 년에 걸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온 '이방인' 이었다. 이미 그곳에 정착해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해온 생존자들을 구시대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이라고 냉대했다.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아직 수용소에서 길러진 근성을 버리지 못한 생존자들을 비사회적 인물이나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최호근,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억과 역사 만들기 (논문 링크)

당시 우파시오니스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유대인 국가 건국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게 최악으로 발현된 것이 어떤 것이냐면, 나치와 시오니즘 지도부가 협력관계를 구축한 사례들이다. 다만,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밝혀지기 이전이었으므로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을 지지한 경우였다.[14]

우선 1941년 1월 11일 이츠하크 샤미르는 시오니즘 군사조직 아르군과 독일 나치 사이의 군사협약을 제안한다. 이것은 위에 쓴 대로 나치의 목적이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이라고 생각한 점도 있었지만, 이스라엘 건국의 가장 큰 걸림돌이 영국이라고 생각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은 가장 큰 적이었고, 마침 영국과 적대적인 데다가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고 있다고 믿었던 나치는 자연스러운 동맹 대상이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독일의 계획에 따라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유대인의 진정한 민족적 열망 사이에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다.
- 이츠하크 샤미르

샤미르가 보낸 편지는 나치에게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 독립 활동(게릴라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의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추방하고 물자를 지원해 주면 이스라엘이 나치 독일의 우방이 될 것임을 명시했다. 나치는 이 편지를 무시했지만, 샤미르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7대 총리가 된다.

또한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은 전부가 죽는 것보다는 소수(특히 건강한 젊은이와 유명 인사)라도 살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나치와 협력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도 엄청난 논란이 일어날 게 뻔한데, 이쪽은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킨 격이니 더욱 문제점이 크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일화로, 194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대인 위원회 소속 카스트너는 나치의 아돌프 아이히만과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의 내용은 1,000여 명의 유대인을 살려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지불한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이게 왜 문제가 되나 싶지만, 카스트너는 나치로부터 이 정확히 1864명의 유대인을 살리는 대가로 대부분의 나머지 80여만 유대인들의 학살을 묵인했다. 즉, 유대인들에게 수용소로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카스트너 자신부터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죽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살리는 것이 나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카스트너 자신이 말하기로도 저명한 유대인들[15]과 젊고 건강하며 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43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죽도록 놔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치에게 이 유대인들의 목숨값으로 지불하기로 한 돈을 조달하기 위해서 카스트너는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 중 150여 명의 부자들에게 경매를 통해서 학살을 피할 수 있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권리를 팔았고, 이 돈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협약의 내용이 알려지기 전에 카스트너는 이스라엘 정계에서 홀로코스트로부터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이 사실이 폭로되자 이스라엘의 법원에서 "악마의 계약을 체결한 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뒤 1957년 유대인 극단주의자에게 피살당한다. 비록 카스트너가 죽은 후에 상위 법원에서 그를 무죄로 고치긴 했지만, 이미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뒤였다.

4. 홀로코스트 허구설

독일,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등의 국가에서는 법률에 의해 홀로코스트 부인론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하며, 독일어 위키백과에도 이러한 내용으로 독일어 경고문이 게재되어 있다.

홀로코스트는 수용소를 해방한 연합군에 의해 상세히 조사되었다. 생존자들의 증언, 수용소 해방 당시 미군, 영국군, 소련군이 촬영했던 영상 필름, 유럽 전역에서 체포된 수용소 근무자들의 진술, 수용소에 남아있던 증거물, 나치의 명령서, 나치가 직접 찍은 학살 영상기록 등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입증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및 전후 독일 재판에서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반이스라엘 감정이 있는 중동지역이나 네오나치, 일부 나치 전범의 후손, 반유대주의자들이 꾸준하게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비극을 폄하, 축소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사왜곡이자 유사역사학에 속한다.


[a] 인터뷰어 클로드 란츠만의 질문이다.[a] [3] 홀로코스트 산업 - 노먼 핑켈슈타인,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 최호근에서 인용.[4] 핀켈슈타인의 또 다른 저서인 <우리는 너무 멀리갔다>에서도 가자 지구 분쟁에 관해 서술하며 "홀로코스트를 겪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상대로 같은 짓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가 이스라엘 정부의 눈에 거슬렸는지 유대인임에도 이스라엘 입국이 금지당했다.[5] 홀로코스트와 중복되는 유대계 폴란드인까지 합하면 총 600만 명의 폴란드인이 사망했다.[6] 2차 대전에서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동시기 유럽에서 벌어진 T4 작전,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볼라 학살, 네덜란드 대기근, 노르웨이의 레벤스보른 사건, 우스타샤의 세르비아인 대학살, 소련의 카틴 학살이나 아시아에서 발생한 난징대학살, 731 부대, 마닐라 대학살, 벵골 대기근 등 다른 대형 사건들을 떠올리는 사람은 해당 피해국 출신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드물다.[7] 군대나 경찰을 이용하거나, 폭동에 의한 학살은 자기네들도 워낙 많이 저질러봐서 크게 감흥이 없었다.[8]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철학,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그룹으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레오 뢰벤탈 등이 있었으며, 위르겐 하버마스, 클라우스 오페, 알프레드 슈미트 등 2세대 학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 대다수가 유대계라서 나치 시기에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전후에는 68혁명을 비롯한 신좌파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9]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건설 개시 단계부터 장기간 소장을 지냈던 루돌프 회스(루돌프 헤스와 스펠이 다르다. 회스(Höß)다. 소설이자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희생자를 처음엔 250만 정도[16]라고 진술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100만을 조금 넘는 숫자로 정정했다. 1946년 봄에 처음 진술할 때에는 상관에게 들은 수치였고, 이후 1946년에 진술을 정정할 때는 폴란드 법정에 제출할 자술서 성격의 회고록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수용소 처리능력과 자신이 기억하는 실제 처리량을 비교해 본 결과 150만 이상은 수용소에서 죽이기 어려웠을 거라고 정정한 것이다. 회스의 진술 신뢰성은 상당히 높아, 현재는 아우슈비츠에서 직접 살해된 인원을 약 150만 이하로 추산하는 것이 정설이다.[10] 이전에 1500만 희생자로 홀로코스트보다 많다고 서술되었으나 당시 인구밀도가 높기 힘든 콩고가 그 정도 희생자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령 그렇다고 해도 홀로코스트 희생자는 600만 유대인뿐만이 아닌 1000만 명의 소련인도 포함되어 있다.[11] 실제로 어느 팔레스타인 역사학자는 "현재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만 들먹이며, 정작 나치처럼 학살한 자신들의 과거는 합리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2]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는 2005년에 건립되었고,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성소수자 단체가 추진해 2008년에 완공되었다. 연속성을 노린 것인지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의 콘크리트 비석 1개와 동일한 크기와 재질로 만들어졌다. 다른 점이라면 조그만 창이 하나 달려있는데, 창 안을 들여다보면 내부 모니터에서 동성커플의 키스 장면이 들어간 영상이 재생된다.[13] 나치당 입장에서는 정치범.[14] 전에 있었던 서술의 반 이상은 네오나치 및 음모론 사이트 외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가급적 출처가 확실한 자료만 기재하길 바람.[15] 특히 문제가 되는 점은 이런 분류를 1942년에 나치가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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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실려온 사람 숫자가 유대인만 250만으로,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이 죽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