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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7 11:10:49

졸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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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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卒本城 / 忽本城

1. 개요2. 명칭
2.1. 상세 기록
3. 위치

1. 개요

고구려 왕조의 첫 번째 수도.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해 졸본 땅에 고구려를 세웠다. 이후 제2대 유리명왕국내성으로 천도하기까지 40여 년간 수도였다.

고구려의 역대 수도 3개 중 가장 존재감이 없다. 아무래도 수도로서의 역사가 썩 길지 않았던 것도 있고, 제대로 된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때의 수도였던 것도 있다. 그 때문에 역사에 무지한 일부 사람들 중에서는 고구려의 역대 수도가 국내성평양성 단 2개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으며, 또한 당장 고구려 관련 역사책들이나 고구려의 역사를 배우게 될 때에도 졸본성은 아예 언급도 없이 그냥 넘어가거나 설령 언급돼도 아주 짤막하게나마 언급되는 경우가 상당해서 졸본성의 무존재감은 더 부각된다.

2. 명칭

오래된 지역답게 여러 명칭이 전해져 내려온다.
명칭 기록 비고
졸본(卒本) 삼국사기》, 《삼국유사
홀본(忽本) 광개토대왕릉비
흘승골성(紇升骨城) 위서 중국의 기록

2.1. 상세 기록

"난 경명(景命)[1]을 받들어 원기(元基)[2]를 세우고자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중
그러나 급하게 궁실(宮室)을 만들지 않고 단지 초가집을 지어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거주하였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중
《삼국사기》에 최초로 졸본이 등장한다. 앞서 동명성왕은 세 현자를 만나 신하로 삼은 뒤, 위의 선언을 하며 공식적으로 국가 건설에 나섰다. 하지만 북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궁전을 지을 겨를이 안 되니 다만 졸본천 비류수 가에 초가집을 지어 임시로 거주했다고 한다.[3]
성곽(城郭), 궁실(宮室)을 세웠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재위 4년(bc 34) 7월 중
비류국도 장악하고, 이런저런 기후도 나타나던 재위 4년째 되는 해, 드디어 성곽을 세우고 궁궐을 지었다. 이때 지은 성을 졸본성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엔 궁정(宮庭), 왕대(王臺)란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卒本扶餘)다.
《삼국유사》 <고구려조> 중
북부여에서 어려움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중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명칭. 《삼국유사》는 아예 "고구려가 졸본부여다!" 하고 단정짓지만 《삼국사기》는 "고구려 설화는 이런 게 있고 저런 것도 있더라~" 하는 것이 차이다. 어쩌면 고구려 시조는 졸본에 와서 바로 고구려라는 독립 국가를 세운 게 아니라 일시적으론 '졸본 지역의 부여국'이라는 부용국인 척 했을 수도 있다.
졸본주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하였다.
《삼국유사》 <고구려조> 중
《삼국사기》는 극초기엔 졸본천에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고 하나 《삼국유사》는 졸본주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고 했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을 밟고 승천하셨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고구려의 국가 공식 표기라고 할 수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엔 '홀본'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의 '졸본'과는 앞의 ㅈ, ㅎ 차이가 있는데 이는 옛 지명이 전부 순우리말이었고 이를 한자로 음차할 때, 서로 대충 비슷한 한자들을 썼기 때문이다. 사실상 졸본 = 홀본인 셈.
(왕께서) 비류곡(沸流谷)에 있는 홀본 서쪽 산에 성을 쌓아 수도를 건설 하셨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역시 얼추 《삼국사기》와 비슷하다. 《삼국사기》도 졸본천에 온 뒤, 비류수 위에 살았다고 전하는데 비문 역시 비류곡의 홀본 서쪽에 성을 쌓았다고 했다. 이 성을 홀본성이라고 한다.
(세 사람은)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에 이르러 마침내 거주하였다.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중
《위서》가 말하길 흘승골성에 이르렀다 한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중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에선 동명성왕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흘승골성에 도착해 거주했다고 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조상 우대를 위해 이름을 말하지 않고 왕호로만 부르는 것과 대조적이다.[4] 또한 졸, 홀본과 전혀 다른 흘승골성이란 지명을 언급하는데 어째서 이런 발음상의 큰 차이가 나는 지역명이 나오는지는 아직 미상이다. 《삼국유사》엔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승골성(升骨城)에 내려 왔다고 했다. 어쩌면 <해모수 설화>와 헷갈렸을 수도 있다.[5]

3. 위치

지명으로써의 졸본은 지금의 중국 요령성 본계시 환인 만족자치구라는 것은 분명하다.

위의 관련 문헌기록의 설명에서 보이듯이 졸본'성'과 '졸본'을 혼용해서 사용하면서도 지시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삼국사기》에서 '비류수(비류곡) 위에 있는 졸본(홀본).', 광개토대왕릉비는 조금 더 자세하게 '홀본 서쪽에 있는 산에 성을 지었다'고 하는 기록에서 지역명과 성곽을 지칭하는 표현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능비에 시조 추모왕이 '홀본 동쪽'에서 승천했다고 했다는 기록도 마찬가지.

첫 거주구역이자 성곽으로써의 졸본'성', 즉 흘승골성은 국내외 학계 모두 오녀산성으로 보고있다. 오녀산성이 광개토대왕릉비의 문맥 그대로 볼 때 가장 부합하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높은 산지에다 협소한 공간에 살았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행정·정치의 중심지인 도성으로서의 의문점이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오녀산성'(산성)하고성자토성, 나합성(평지성)이 조합을 이룬다는 모식이 제시된 것도 중국 동북지역의 근대적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 일제강점기부터이며, 그때부터 이와 같은 의문점에서 제시된 견해인 것이다.

사실 지역 "졸본"이 어딘지는 명확하기 때문에 졸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보다는 (주몽의 건국 이전을 포함한) 졸본도읍기에서 어디가 중심지였는가라는 포괄적 성격을 가진 논의가 논쟁이 되는 편이다. 보다 상세한 논의는 오녀산성 참고.
[1] 천명의 다른 말.[2] 원대한 기틀, 즉 국가를 의미.[3] 하술된 광개토대왕릉비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4]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려의 아버지 뻘 되는 나라이니 역사서 체제를 <본기>로 잡고 매우 우대해 준 방면 중국의 《위서》는 이민족의 국가이니 <열전>으로 적고 대충 취급한 것이다.[5] 과거 한국어를 한자로 표현할 때는 음을 그대로 차용한 음차식 표현과 뜻을 차용한 훈차식 표현이 병재하고 있었다. '골'이라는 말이 고대 한국어로 마을이나 촌락, 또는 성읍을 의미하는 단어다보니 '졸본'이라는 이름은 뜻을 훈차한 표현이고, '흘승골'이라는 명칭은 음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졸본의 음차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