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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22:58:40

황온순

<colbgcolor=#ffc224> 학교법인 휘경학원 초대 이사장
황온순
黃溫順 | Hwang Onsoon
파일:팔타원 황온순.jpg
출생 <colbgcolor=#fff,#121212>1900년[1]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모정리
사망 2004년 6월 29일 (향년 104세)
법호 팔타원(八陀圓)
법명 정신행(淨信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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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224><colcolor=#221f20> 본관 창원 황씨 }}}}}}}}}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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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캡션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제자이자 학교법인 휘경학원 초대 이사장. 6.25 전쟁 당시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한국보육원'을 만들어 '전쟁고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 생애

1900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모정리에서 기독교 집안의 아버지 황원준과 어머니 송씨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딸이어도 교육을 시켜야한다는 아버지의 믿음으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으로, 이화학당 중등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부터 유치원 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28년에 황해도 재령군 출신 강익하와 결혼, 슬하 1남 2녀를 뒀다.

원기 20년(1935년) 여름, 당시 5살이던 아들 강필국과 금강산을 여행하다 개성에 살고 있는 불법연구회 회원 이천륜을 만난다. 여행 중에 만난 두 사람은 가정생활과 고민을 서로 이야기하게 되고, 이천륜은 “세상 일은 전생의 인연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며 서울에 있는 불법연구회에 가서 정신수양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고 추천해준다. 이 인연으로 원기 21년(1936년), 원불교에 입교한다.

원기 22년(1937년) 4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와 처음 만나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부처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줄테니 이완철 선생[2]에게 배우라"는 말과 함께 '정신행(淨信行)'이라는 법명을 내려준다. 법명을 받고 난 후에도 3일 간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가 자신이 살아오며 가진 의문에 대해 문답하는 시간을 가진다.[3]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 후, 경성지부 법회에 참석하며 하루에 1시간씩 이완철 교무에게 금강경을 배웠다.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도 그 이후로도 소태산 대종사를 여러 번 만나 인과보응과 불생불멸의 진리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경성지부(현 서울교구)의 빈약한 운영을 보고, 자신의 집 살림도구와 쌀을 가져와 경성지부 살림을 이끈다.

이 인연으로 원기 23년(1938년), 원불교 중앙총부에 내려가 훈련을 받고 대종사 법문을 받들며 익산에 고아원을 새로 만든다. 또한 일제강점기 치하의 어려운 총부 사정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 초기 교단의 경제난을 극복하는 데 정신적, 물질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같은 해 10월에 경영난에 허덕이는 동대문부인병원을 인수해 병원 건물 옆에 있는 2층짜리 사택에 이사했고,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면 병원 사택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자주 올렸다.

이후 해방이 되자 서울시 한남동에 보화원(普和園)[4]이라는 고아원을 만들어 일제강점기 당시 고아들을 수용해 보살폈다. 또한 광복으로 해외에서 돌아오는 동포들을 위해 구호소를 마련하고 구호물품을 전달했다.

1950년 초, UN에서 선정한 장학생에 선발돼 런던에서 사회사업 관련 유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6.25 전쟁이 터지자 긴급히 귀국했다. 6.25 전쟁 당시, 고아 1,000여 명을 구한 러셀 블레이즈델 미합중국 공군 군종 목사에게 고아들을 인계받아 제주도에 '한국보육원'을 설립해 원장으로 취임한 뒤 고아들을 보살폈다.

1970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휘경여자중학교휘경여자고등학교를 세워 이사장에 취임하고 여성교육에도 힘을 썼다.

원기 89년(2004년) 6월 29일, 서울 위생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3. 여담



[1] 1903년 7월생이라 알려져있으나, 실제로는 1900년생이다. 아무래도 옛날 호적은 신고자 진술이나 누락된 경우가 많아 혼선이 있었다.[2] 당시 경성지부 돈암동회관 교무[3] 이후 회고하길, 당시 대종사를 어떻게 부를지 몰라 ‘시골 선생님’이라 불렀다고 한다.[4] 보화원 부지에는 일제강점기에 약초사라는 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