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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선사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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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수아이 | |
유골을 토대로 복원한 얼굴 | |
출생 | 4만 년 전 추정 |
사망 | 4만 년 전 추정 (향년 4~6세)[1] |
한반도 두루봉 동굴 | |
신체 | 110~120cm, 머리 크기 1200~1300㏄[2] |
본명 | 불명 |
이명 | 흥수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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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당시 청원군) 문의면 노현리의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유골이다. 대표적인 한반도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의 유골. 발견자인 김흥수의 이름을 따 '흥수아이'라고 불린다. 약 4만 년 전에 살았던 4~6살짜리 아이인 것으로 추정된다.2. 발견 과정
1978년, 당시 석회암 광산을 운영하던 '김흥수(金興洙)'가 채굴 도중 곰 뼈와 상아 같은 동물의 뼈들을 다수 발견하였고, 이를 인접한 충북대학교에 의뢰하여 당시 재직 중이었던 이융조 교수가 발굴을 시작했다. 현장을 방문한 이융조 교수는 늘 '사람의 뼈'가 중요하다고 말했다.그러다가 1982년, 김흥수는 석회동굴 주변에서 땅을 고르다가 동굴 중 하나인 두루봉 동굴에서 작은 사람으로 보이는 두개골과 유골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유골을 신고하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광산이 폐광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사흘동안 고민했다. 고심 끝에 김흥수는 같은 해 12월 5일 이융조 교수에게 다시 연락. "사람 이빨 같은 것이 나왔다."고 토로했다. 출처
그렇게 본격적인 인골 발굴은 1982년 12월~1983년 1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 시남부락의 두루봉에 있는 여러 동굴들 중 두루봉 조사의 10차 발굴로 이루어진 '흥수굴(興洙窟)'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그를 기리고 보답하기 위해 동굴의 이름을 '흥수굴', 그 유골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 '흥수아이'라고 짓게 되었다. 한국에서 사람 이름을 유적 이름에 명명한 첫 사례이다.
3. 상세
두루봉 동굴군에 속해 있는 이 흥수굴은 완전한 사람뼈와 석기, 동물화석이 발굴된 가장 이상적인 문화 성격을 지닌 동굴 유적이며 두루봉 9굴 주위의 파괴된 동굴이다.여기서 후기 플라이스토세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2개체의 뼈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인류 화석은 대한민국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어린 아이들의 뼈 화석이며, 흥수아이 제1호, 제2호로 이름 붙여졌다.
흥수아이는 김흥수가 최초 발견 당시 석회암 바위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으며 해골의 뒤통수가 튀어나와 있었다.
흥수아이의 옆에는 꽃을 꺾은 듯한 흔적과 꽃가루가 있었는데 감식 결과 국화였다고 한다. 또, 흥수아이의 위에는 고운 흙이 뿌려져있었다.
흥수아이 제1호 사람뼈화석은 붉은 영토층에서 60% 이상이 남아 있었다. 제2호는 머리는 없어지고 몸체만이 발견되어서 해부학상의 특징에 대한 연구는 흥수아이 제1호 사람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흥수아이의 나이는 4~6살, 머리 크기는 1200~1300㏄, 키는 110~120㎝로 선사 아이와 현대 아이 머리뼈의 특징이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 아이의 특징인 뒷머리뼈혹(bunning), 두툼한 눈두덩, 낮은 머리뼈 등은 없다. 체질상 특징상, 약 4만 년 전에 살았던 '늦은 시기의 현생인(호모 사피엔스)'에 속한다.
4. 김흥수의 근황
김흥수의 광산은 1985년에 폐광되었으며, 김흥수는 1988년에 메리츠화재에 취직해서 2015년 기준 간 보험 업무를 하고 있다. 당뇨와 고혈압 등의 지병을 앓고 홀로 살고 있다.비록 금전적인 손해는 컸지만 '흥수아이'로 역사에 이름을 남겨서 자부심을 갖고 산다고 했다. 출처
5. 논란
수차례 절대 연대 측정에 알 수 없다는 결과도 나왔으며, 프랑스 연구진은 조선시대로 보기도 한다.논문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연 학술포럼에서 이 유골이 구석기시대 유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다. 흥수아이를 구석기시대 인골이라고 보기도, 프랑스 학자가 주장한 조선 시대 인골로 보기도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기사
구석기 시대 일반적인 매장 방식과 달리 특별한 흔적이나 부장품이 없었고, 치아에 충치가 많았던 것은 구석기 시대가 아닌 곡물을 주식으로 한 농경사회 이후 유골이라는 가설을 뒷받침 해준다고 주장했다.
조선 시대 이후에 묻힌 유골일 가능성도 나왔다. 프랑스의 흥수아이의 절대 탄소연대 측정에서 조선시대로 나온만큼 발굴당시 경화제로 시료가 오염된 유물에 대해 과학기술을 통한 제대로된 연대측정이 필요하다.
특히 흥수아이가 발견된 '3층'은 1천500여점의 구석기 시대 석기가 출토 됐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연모가 출토되고 사용흔적이 모두 밝혀져 이 층에서 인류가 장기간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출처
하지만 매장이 일단 땅을 파고 들어가기 때문에 '3층'에 놓여진 유물이 같은 연대라 할 수 있는가 의문, 앞서말한 절대연대 측정시 조선 시대로 나온 프랑스 논문, 하지만 흥수아이 인골 아래층에서 발견된 숯시료의 연대가 12,100년 전으로 나오거나 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더 확실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 참고. 당시 발굴 이후 경제적 이유로 현장 보존이 되지 못하고 파괴되어 한국 고고학 유적지로써 아쉬움이 크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