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19:23:52

367년의 음모

1. 개요2. 전초
2.1. 서기 4세기 브리타니아의 상황2.2. 야만인들의 합종연횡2.3. 브리타니아의 무정부화2.4. 로마군의 반격 실패
3. 진압4. 여담

367년의 대 음모
영문 : The Great Conspiracy of 367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말기,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초대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제위 기간에 브리타니아 관구에서 시작된 일련의 대규모적인 야만인들의 침략과 보조병들의 반란을 의미한다. 색슨족(작센족), 픽트족, 하드리아누스 성벽 북부의 브리튼인, 아타코티족, 스코트족, 칼레도니아족이 결탁한 이민족들의 대침공으로 인해 1년 동안 브리타니아 관구 4개 속주와 갈리아 북부의 해안지대가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2. 전초

2.1. 서기 4세기 브리타니아의 상황

세베루스 왕조 초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칼레도니아 원정 이후, 하드리아누스 방벽 남부의 브리타니아 지역은 다른 국경 속주에 비해 야만족의 공격에서 안정적인 상황이었다. 비록 더 북쪽의 안토니누스 방벽이 버려지기는 했지만, 두 장벽 사이의 지대는 아직까지 조금이나마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닿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기 306년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시조인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장벽을 넘어 더 북쪽의 픽트족들을 공격했고, 역시 같은 왕조의 제3대 황제인 콘스탄스 또한 343년 경 성공적인 성벽 너머의 원정을 완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4세기 중엽에 다다르면서, 브리타니아 속주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콘스탄스 황제를 죽인 참칭 황제 마그넨티우스를 콘스탄스의 형이었던 콘스탄티우스 2세가 진압하는 사이,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는 마그넨티우스의 잔당과 이에 동조했던 이들에 대한 잔혹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브리타니아 관구장(Vicarius) 플라비우스 마르티누스가 파견된 감찰관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자살을 종용받을 정도로 브리타니아 사회가 혼란해진 상황에서, 브리타니아로 망명을 가거나 유배보내진 많은 인물들이 공공연하게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의 조짐을 나타냈다.

특히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의 직위를 가졌던 실력자 막시미누스의 처남이었던 발렌티우스가 그 음험한 두각을 드러냈다. 중죄[1]를 지었지만 매형 막시미누스의 입김 덕에 겨우 극형을 면하고, 브리타니아로 유배된 발렌티누스는 조금씩 범죄자들과 지방군의 일부를 매수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2.2. 야만인들의 합종연횡

이와는 별개로. 브리타니아 인근의 야만족들은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넘기 위해 거대한 연합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 치세하의 로마 제국은 내우외환을 겪고 있기는 했지만, 전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몇십 년 전부터 장벽 너머의 픽트족과 반 로마파 브리튼인, 칼레도니아인, 스코트인, 아타코티인 등은 자신들을 험난한 북부로 몰아내고 통행과 무역을 장악한 로마인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발적인 장벽에 대한 기습이나 약탈 외에는 로마군에게 타격을 줄 방법이 없었으며, 훗날 스코틀랜드가 될 브리타니아 북방의 척박한 땅에서 서로 반목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360년대의 어느 시점부터, 상술한 모든 부족들은 단결하여 대규모적인 남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2]

이들은 먼저 장벽 북쪽에서 로마 제국에 충성하는 켈트족 요원들인 아르카니(Arcani 혹은 Areani)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이들 아르카니들은 로마 제국에 복속된 켈트계 브리튼인들로 장벽의 남•북을 수호하고, 같은 언어를 쓰는 장벽 북쪽의 야만인들 사이에 숨어들어 공격이나 약탈에 대한 사전정보를 취합해 로마군에 전달하는 토착 협력자들의 보조군이었다. 아르카니들을 매수함으로써, 장벽 북부의 부족들은 그들의 대규모 연합공격을 로마군이 예상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대비했다.

장벽 남쪽의 브리튼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이러한 아르카니들과 이미 로마 제국에 복속되어 있었던 켈트계 부족의 보조군 및 징집병들은 장벽 북쪽의 동포들에게 쉽게 매수되어 내통을 시작했고, 브리타니아를 방어하던 3개의 군단(제6 빅트릭스, 제2 아우구스타,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들로 이루어진 야전군 레기오 코미타텐세스 세쿤다 브리타니카는 이미 내부에서의 암세포들을 안은 채로, 어떠한 침공 소식도 듣지 못한 채 다가올 참극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 이미 '색슨 해안'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수많은 해적질을 자행해왔던 서게르만계 색슨족(작센족)과 프랑크족이 이 대규모 침공에 가세하면서, 그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국경 요새지대(Limes, 리메스)의 야전사령관들과 로마 당국은 이러한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야만인들의 음모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2.3. 브리타니아의 무정부화

강이 얼어붙고, 로마군 정찰대가 활동을 줄이는 서기 367년의 겨울을 틈타, 거대한 야만인들의 군세가 하드리아누스 성벽 각지를 일제히 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상 브리타니아에 주둔한 제2 아우구스타와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두 군단[3]은 이에 대응하고자 했지만, 공격은 장벽 너머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아르카니 부대를 위시로 한 로마계 브리튼인 부족들과 보조군이 일제히 군단 내에서 봉기했고, 로마 제국에 충성하던 브리튼인들이나 본토 로마인들을 학살했다. 같은 시기 계획대로 아일랜드 섬의 히베르니아족과 색슨족 또한 해상으로 브리타니아를 공격하니, 수많은 내전과 침공에도 건재했던 브리타니아 속주의 로마 군대와 행정력은 겨우 몇 개월만에 완전히 마비되었다.

영국 해협의 함대 사령관이자 색슨 해안의 코메스(Comes)였던 넥타리두스는 상륙해오는 적들과 맞서다가 전사했으며, 브리타니아 관구의 군정총독(둑스, DUX)이었던 풀로파우데스는 병력을 이끌고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북부까지 요격을 시도했으나 내부에서의 켈트계 브리튼인 보조병들의 반란과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행방불명되었다.[4]

풀로파우데스의 잔존 병력은 후퇴하여 브리타니아 동남부의 도시를 사수하면서 방어를 계속해나갔다.

2.4. 로마군의 반격 실패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군사적인 재능이 있는 편이었지만, 당시 서게르만계 알레만니족을 토벌하기 위해 레누스(라인) 강 전선에 나가 직접 지도 중에 있었다. 그렇기에 코메스 도메스티코룸(Comes Domesticorum) 직책에 있었던 세베루스를 대신 브리타니아에 파견했고, 이후 그를 기병 총사령관(Magister Equitum, 마기스테르 에퀴툼)이었던 요비아누스와 교체했다. 그러나 대 알레만니 토벌전이 장기화되고, 브리타니아에서의 공격 또한 단순히 습격 수준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세베루스와 요비아누스의 휘하 병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들은 다시 황제가 이끄는 본대로 소환되었다.

3. 진압

3.1. 대 테오도시우스의 상륙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대 테오도시우스[5]에게 정예 보조군(Auxilia Palatinae, 아욱실리아 팔라티나이) 4개 부대를 주어 브리타니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할 것을 명령했다. 이들은 각각 바타비 세니오레스, 이오바니 세니오레스, 헤룰리 세니오레스 그리고 빅토레스로 알려진 부대였다.

대 테오도시우스는 아들 테오도시우스(훗날의 테오도시우스 1세)와 함께 보노니아(현재의 불로뉴) 지역에서 병력과 식량을 규합하는 한편, 일부러 날씨가 좋지 않은 겨울에 정예부대만 이끌고 영국 해협을 건너 섬에 상륙하며 야만인들의 허를 찔렀다. 그의 본대는 368년 봄에 상륙을 완전히 마쳤다.

이미 브리튼 군도에서 로마군을 몰아냈다고 생각한 야만인들은 작은 단위로 교외에 쪼개져 약탈을 시작하고 있었다. 대 테오도시우스는 군대를 얇게 쪼개어 약탈을 하고 돌아가는 야만인들을 각개격파하는 한편, 되찾아온 약탈품들은 빼앗긴 이들에게 돌려주고, 구호품을 풀어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한 대 테오도시우스는 론디니움(런던)을 장악하고 난 뒤, 그곳을 기지로 삼아 민간 행정을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브리타니아 내에서 로마 제국의 민간 행정이 멈춰버린지 약 1년만에 둘키티우스가 새로운 브리타니아 총독(Dux)으로 임명되어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혼란을 틈타 결국 발렌티누스가 매수한 탈영병들과 함께 반란을 획책했고, 이제 코메스 대 테오도시우스는 야만인들과 반란군 모두를 상대하게 되었다.

대 테오도시우스는 이때 특단의 대책을 내렸다. 자신이 데려온 중앙군을 제외하고, 브리튼인 출신인 브리타니아 전역의 보조병 모두를 강제 전역시켜 후방으로 보내버린것이었다. 이들이 야만인과 발렌티누스가 이끄는 반란군의 가장 큰 지지세력임을 깨달은 것이다.

전쟁은 각 부족을 하나하나 소탕하는 유격전 형식으로 지리하게 1년을 끌어, 결국 369년에야 종료되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남쪽에 잔존한 야만인들과 그 동조자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방벽은 다시 튼튼하게 방어되었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대 테오도시우스는 방벽 북쪽까지 응징 원정을 떠났으며,  아타코티족을 복속시켰다고도 한다. 이후 기록에 방벽 북쪽에서 살았던 아타코티족에서 데려온 보조병들의 이야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 테오도시우스는 브리타니아군 총지휘관(comes rei militaris per Britanniarum, 코메스 레이 밀리타리스 페르 브리탄니아룸)에 임명되었고, 그의 노력 덕에 브리타니아는 이후 40년 동안 더 제국의 품안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는 이러한 후광 위에서 제위를 도모할 수 있었다.(물론 아들 테오도시우스 또한 야만인 대음모 사태에서 여러 군공을 세우기는 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태로 인해 하드리아누스 장벽 북부에 그나마 남아있었던 로마 제국의 행정력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 시기 이후의 하드리아누스 장벽 북쪽의 버려진 로마인 유적들을 연구한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야만인 대음모가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4. 여담

소설 《눈 속의 독수리》의 극초반부가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잠시 다루고 있다. 당시 주인공 막시무스의 아내 아일리아가 픽트족에게 강간당했다.


[1] 어떤 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형이 확실한 죄였다고 당시의 역사가였던 안티오키아의 암미아누스가 기록했다.[2] 이러한 픽트인의 대이주에 대한 이유로는 식량과 영토의 부족, 내통, 장벽 방어의 약화 등 다양한 이유가 제기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3] 이 시기에 군단들은 고대 시기처럼 완편된 상황은 아니었다.[4] 암미아누스의 기록이 불분명하여 죽었는지 포로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5] 훗날 대제의 칭호를 받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