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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1969년, 아래는 1972년에 이타미 공항에서 촬영된 HL7201.[1]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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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L7201은 대한항공이 보유했던 DC-9-32로, 135번째로 생산된 DC-9이자 대한민국 항공사 명의로 운항된 최초의 제트 여객기이다.현재는 대한항공의 A220이 같은 번호를 다시 받았다.
2. 도입
대한민국의 국영 항공사였던 대한항공공사(이하 KNA)는 1965년 7월 6일에 국무회의의 승인을 받고, 1966년 12월 23일에 더글라스사와 계약을 체결한 후 이 기체를 미 수출입은행으로부터 얻은 차관 9백만 달러 중 516만 달러로 구매하게 된다.KNA가 주문한 기체는 1967년 5월에 완성되었고, 1967년 7월 23일 오후 3시 35분에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으며,[2] 1967년 8월 12일 오후 3시 20분에 91개의 좌석[3]에 46명의 승객들을 태우고 서울~오사카 노선을 운항하는 것으로 운항을 시작했다.
이후 HL7201은 1967년 8월 14일부터는 서울~타이페이(쑹산)~홍콩(카이탁)~사이공 노선을, 9월 1일부터는 서울~도쿄(하네다) 노선을 운항할 예정이었다.
참고로 1967년 8월 14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DC-9의 일반석 편도[4] 가격은 오사카 노선은 약 52달러(14,068원), 도쿄 노선은 약 68달러(18,396원), 타이페이-홍콩-사이공 노선은 약 155달러(41,932원)로 책정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한민국의 1인당 GDP가 161달러, 1인당 월평균 임금이 8,324원[5], 금성사가 생산한 흑백TV 가격이 63,500원[6]이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이는 당시 비행기 여행이 시쳇말로 금수저들의 전유물이었단 것을 제대로 입증하는 셈이다. 심지어 그 금수저들만 탄다는 관광호의 서울-부산 특1등칸 운임이 1969년 기준 4,700원이었다. 참고로 소비자물가지수로 환산하면 1967년의 1원은 2024년의 34.645원이다.
3. 잦은 잔사고
그러나 이 기체는 총 비행 시간이 180시간 정도밖에 안 되었던 1967년 8월 30일에 오사카로 향하려다가 전기장치 고장으로 인해 배터리가 충전되지 않아 이륙도 하지 못하고 다른 비행기로 대체된 후[7] 겨우 수리한 뒤 이틀밖에 안 된 1967년 9월 1일에 오사카로 향하다가 정비불량으로 인해 앞바퀴에서 연기를 뿜어내면서 오사카 국제공항에 비상으로 동체착륙하는 일까지 겪게 되었다.[8] 이 여파로 서울-도쿄 노선 운항 계획은 취소되었다.이 사고 직후 더글라스 본사로부터 조사관이 파견되었고, 조사 결과 배전관 속 배전선 800개가 모두 불타서 3개월 동안 수리가 필요하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고 HL7201은 오버홀 정비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이 일로 한동안 KNA의 국제선은 거의 파탄 수준이 되었고, 그나마 DC-3 등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KNA의 상황은 매우 처참했는데, DC-9으로 인한 적자만 반년도 안 되어 2억 원[9]이었다고 하고, 정비 미비로 인해 결항률 27%를 기록한 데다가, 잔사고들도 많아 국회의원들은 KNA를 불신하고 제주도 출장까지 피할 정도였다고 한다. 1967년 9월 12일에 조선일보에 올라온 기사만 봐도 당시 KNA의 열악한 상황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일이 커지자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까지 나서서 특별 대책을 지시했고, 안경모 교통부 장관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KNA의 경영 효율화를 지시하게 된다. 그래도 KNA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아 1967년 10월 6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9대의 보유 기체 중 5대가 고장났고, 그 중 3대를 국제선 노선 유지에 써야 해서[10] DC-4 1대만으로 겨우 국내선을 운영하다가 결국 1962년 3월 26일에 KNA이 창설될 때부터 KNA를 이끌어 온 신유협(申攸浹, 1922~?) 사장마저 1967년 9월 27일에 물러나고, 10월 20일에 예비역 공군 중장 장성환이 KNA의 제2대 사장이 된다.
4. KAL 부정 사건
이후 1967년 11월 8일에 조선일보 기사를 필두로 나온 사실들은 매우 충격적이었는데, 신유협 사장은 1966년 4월에 플라잉 타이거사로부터 코니 4발기를 당시 표준보다 비싼 시간당 570달러로 임대 도입하고, 이것의 수익 10%인 6만 3천 달러를 국고에 넣지 않았으며, 그중 2만 달러는 현금으로 바꾸어 극동항공사[11]의 주식비율[12]에 따라 착복했고, 나머지는 극동항공 명의로 DC-3 1대를 임대 도입하는 데에 사용되었다고 한다.결국 1967년 11월 10일 새벽, 신유협 사장은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고, 1968년 1월 24일에 신유협과 김계진에게는 징역 4년, 송석우에게는 징역 2년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원심이 파기되어 1968년 12월 7일에 외국환관리범 위반죄만 적용해 형량이 깎여 피고들은 각각 징역 2년 6개월/2년/1년의 징역형과 추징금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이후 신유협의 근황은 전해지지 않는다.관련 기사
5. 이후
HL7201은 우여곡절 끝에 1968년 1월 26일에 수리를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이후 김포국제공항 한구석에서 졸고만 있다가 1968년 7월 25일 오후 2시 45분, 62명의 승객을 태우고 드디어 서울-도쿄 노선을 취항하게 되었다.한편, KNA가 국영 체제인 것 자체가 이런 방만한 경영상황을 불러왔다는 지적이 이어져서 KNA의 민영화가 적극적으로 추진되게 되게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부터 5.16 군사정변으로 문을 받을 때까지 1년여간 '한국항공'이라는 항공사를 잠깐 운영한 경험이 있는 한진상사의 조중훈 사장에게 KNA의 인수를 직접 제안하게 된다. 이렇게 한진상사는 27억 원의 누적 적자와 14억 5300만원의 대금과 함께 KNA를 인수하게 되고, 국영기업 '대한항공공사'는 1969년 3월 1일부터 한진그룹 산하 민간기업인 대한항공으로 새출발을 하게 된다.
KNA가 대한항공으로 변한 후에도 HL7201은 무사히 날다가 1972년에 다른 DC-9 1대[13]와 함께 미국에 팔렸으며, 이 기재들의 매각 대금은 보잉 747-200 도입에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기체는 테일넘버가 N9347로 변경된 후, 1973년 7월부터 휴즈 에어웨스트가 운용했으며, 1980년 10월에는 리퍼블릭 항공에 팔려나갔고, 1986년 10월에는 노스웨스트 항공이 썼으며, 2005년 8월 28일에 파이널 에어파크에서 스크랩 처리되었다.
이후 HL7201은 먼 후대인 2018년 3월 13일에 제조되어 대한항공에 인도된 A220-300의 등록기호로 쓰이게 된다. 제작 당시는 봄바디어 CS300이었고 MSN는 55024이었는데 이후 해당 기종이 에어버스에 인수된다. 에어버스의 A220로 출고된 건 9호기인 HL8315부터. 따라서 그 이전엔 봄바디어 CS300으로 출고됐다.
현재는 보잉 - 에어버스 양사의 기종만을 운용하는 대한항공이지만, 공교롭게도 이 기념비적인 번호는 두 대 모두 비 보잉 - 에어버스인 셈.
6. 기타
7. 갤러리
1967년 6월 8일에 미국에서 시범 비행을 할 당시 |
1969년 3월 14일에 도쿄 국제공항에서.[14] |
1970년 4월 27일에 이타미 공항에서. |
[1] 둘다 HL7201을 담은 희귀한 컬러 사진이다.[2] 이날에는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김포로까지 직접 가서 한국 최초의 제트여객기를 구경했다고 한다.[3] 1등석 16석+일반석 75석[4] 왕복이 아니다. 편도다.[5] 참고자료[6] 출처[7] 부속품 여분이 없어 제대로 고치지도 못했다고 한다.[8] 당시 기장이던 양수석 씨가 재빨리 우측 엔진을 끈 채 좌측 엔진으로만 8분간 활공비행을 하여 기체 폭발을 면할 수 있었다.[9]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69억 3000만 원이다.[10] 이때 오사카의 한국인들은 KNA의 '초라한' 포커 F27을 보고는 일본항공의 제트 여객기 DC-8로 갈아타거나, 홍콩-서울 노선에 단 1명만 타는 일까지 있는 등 슬픈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11] 1966년의 송석우가 창설한 항공사.[12] 본인 45%, 김계진 KAL 영업이사 40%, 송석우 극동항공 사장 15%. 신유협은 극동항공사의 비밀 이사였다고 한다.[13] HL7205, 1967년 4월에 제작되어 1970년 7월 1일에 도입된 DC-9-15[14] 민영화 직후 시점이라 대한항공공사 시절 도색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