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8 헬캣이 사용되기 이전까지의 대만 기갑 전력은 고작해야 M8 그레이하운드, T-26, M4A4 셔먼과, M4A1 76mm 버전을 75mm로 다운그레이드한 물건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나마 쓸만한 셔먼 마저도 미국이 거부하는 와중에 영국을 통해 들여온 물건이었으며 이마저도 중국군의 주력 전차였던 T-34-85에게는 한없이 밀리는 암울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일이 발생하니, 바로 1950년 한국 전쟁 때문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은 중국 인민지원군을 투입했는데 이러한 사건을 통해 미국이 중국을 크게 경계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대만과의 군사 동맹을 강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한국 전쟁 와중에 대만에 군사 원조 자문단들이 파견되었고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물자를 대만 군대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때 최초로 지원된 차량이 바로 헬캣이었으며, 1952년 첫 번째 군수 지원 물자로 대만에 도착했다. 헬캣이 대만에게 공여된 이유는 간단한데, M4A3E8과 동일한 성능을 지녔으면서도, 더 가볍고,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헬캣은 1949년 이후 미국이 대만에 공식적으로 제공한 최초의 전차로 기록되었다. 총 243대의 헬캣이 육군과 해병대에 공여되었고 곧 대만의 실질적 주력전차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헬캣들은 대만에서 사용되는 동안에 다수의 전투에 참전했다. 그렇지만 대만의 헬캣은 2차 대전 후기 미군과는 상당히 다르게 운용되었는데, 대전차 자주포라는 한정적인 용도가 아니라 장거리 포격, 상륙 저지등의 좀 더 다채로운 자주포라는 느낌으로 사용되었다.
M18 헬캣은 얇은 장갑, 낮은 화력 및 빈약한 사통장치 등의 문제를 지니었지만, 전차 하나가 아쉬운 대만에서는 주력전차와 같은 취급으로 애지중지하면서 더 이상 현역에서 사용하기 힘든 1970년대까지 육군과 해병대에서 절찬리에 사용했다. 일부 헬캣들은 금문도와 같은 최전선으로 옮겨져 요새포로도 사용되었다.
1952년부터 1970년대 중엽까지 대만을 수호한 헬캣은 기갑 전력이 부실한 중화민국군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으며, 현대 대만인들에게도 헬캣은 특별한 의미로 기억되고 있다.
1948년에 발생한 이른바 티토-스탈린 분열 이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큰 난관에 부딫히고 말았는데, 이제 더 이상 소련에게 무기를 구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였다.
이 때문에 유고슬라비아는 서방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 요청이 승인되면서 1951년 중반, "코카 포포비치" 장군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군 사절단은 양국 간의 군사 협력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협상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동년 11월 14일 요시프 티토와 조지 알렌 미국 대사가 서명하며 군사원조조약이 체결되며 이 계약으로 유고슬라비아는 상호방위원조계획(MDAP)에 포함되었다.
헬캣은 MDAP에서 원조 품목으로 매우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유고슬라비아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도합 240대의 헬캣을 공여받아 무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력이나 방호력면에서 더 나은 M36 GMC이 같이 공여되었음으로 헬캣은 크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진 않았다. 유고의 헬캣 중 8대는 포병여단 산하의 기갑사단으로 배치되었으나, 나머지 차량들은 육군 직속의 대전차여단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후 1970년대에 9K11 말륫카 미사일로 무장하면서 전술적 가치가 없어졌다. 그렇지만 전차 하나가 아쉬웠던건지 1980년대 후반 전쟁 직전까지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육군에서는 독립대전차여단 소속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