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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왕국 4대 군주 *Gaisarīx | 가이세리크 | ||
제호 | 한국어 | 가이세리크 |
라틴어 | Gaiseric 또는 Gaisericus | |
반달어 | *Gaisarīx | |
생몰 년도 | 389년? ~ 477년 | |
재위 기간 | 428년 ~ 47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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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반달족의 왕. 북아프리카로 진출하여 반달 왕국을 건국하고 그 전성기를 이끌었다.고대의 인명이 그렇듯이 이름의 표기법이 다양한 편인데, 가이세리크(Gaiseric)라는 표기가 가장 널리 사용된다. 그 외에 겐세리크(Genseric) 또는 게이세리크(Geiseric)라고도 한다.
5세기경, 히스파니아[1] 남부에 거주하던 반달족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로마의 북아프리카 속주를 정복한 후 카르타고에 도읍을 정하고 반달 왕국을 건설하는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이후 뱃길을 장악하여 강한 해군력을 이용해 지중해 전역에서 서로마와 동로마를 위협하였다. 서고트 왕국의 창시자인 알라리크 왕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로마시를 약탈한 야만족 군주로도 유명하다.[2]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훈족의 왕 아틸라에 비하면 덜 유명한 편이지만 역사에 끼친 영향력에 있어서는 꿀리지 않는 인물.
후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서로마 제국의 숨통을 끊어놓은 결정타를 먹인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가이세리크가 서로마 제국의 속주들 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이자 중요한 세입원이었던 북아프리카 속주를 빼앗아 버리면서 그야말로 서로마의 밥줄을 쥐고 흔드는 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서로마는 곡물과 재정의 부족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결국 가이세리크의 북아프리카 정복은 이민족들의 침략과 내부분열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서로마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3]
재미있게도 전사 사회였던 게르만 출신의 왕이었음에도 한쪽 다리를 저는 불구자라는 핸디캡을 지니고 있었으나 서로마와 동로마 측의 저지선을 뚫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격동의 난세였던 서로마 멸망기의 인물 치고는 90세 가까이 장수하며 천수를 누렸다. 훗날의 엔리코 단돌로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장수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숨통을 끊는데 한몫한 인물.
2. 생애
2.1. 초기 생애
가이세리크는 훈족의 침공을 피해 라인 강을 넘어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갈리아 지방에 침입했던 하스딩기 반달족의 왕 고디기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고디기젤이 거느리던 노예였다고 한다. 요르다네스의 묘사에 따르면 가이세리크는 중간 정도의 키에 낙마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저는 불구자였다. 또한 그는 생각이 깊고 말수는 적었으며, 다른 야만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그 사이를 이간질하는 데 능숙한 교활한 성품의 소유자였다.428년, 반달족의 왕이었던 가이세리크의 이복형 군데리크가 사망하자 가이세리크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다. 그가 반달족의 왕위를 이어받을 당시, 반달족은 수에비족 · 서고트족 등과 대립하면서 오늘날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해안지대인 안달루시아 지역까지 밀려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반달족은 해안가에서의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하며 세력을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사실 안달루시아의 유래가 반달족의 땅이기도 했다. 가이세리크는 서로마와 고트족의 압박을 피하여 바다 건너에 위치한 북아프리카의 비옥한 땅을 차지하여 반달족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는 야심을 품었다.
왕위에 오른 가이세리크는 해군을 양성하여 카르타헤나 일대에 위치한 서로마의 해군기지를 공격하였고, 또한 서로마 측의 사주를 받아 반달족을 침공해온 수에비 왕국의 군대를 무찔러 이를 메리디아까지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2.2. 북아프리카 정복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429년 5월, 가이세리크는 당시 서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이었던 보니파키우스가 당시 서로마의 섭정 갈라 플라키디아[4]와 대립하고 있던 틈을 타서 대규모의 병력을 거느리고 북아프리카 침공을 개시하였다.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기록이 심하게 엇갈려서 상세한 것을 알기 어려운 형편이다. 동로마 측의 기록에서는 당시에 보니파키우스가 갈라 플라키디아에게 대항하기 위해 가이세리크를 초청하여 반달족을 북아프리카로 끌어들였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서로마 측의 기록에서는 이런 묘사를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일설에는 이미 북아프리카 속주와 서로마 황제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판단할 만한 기록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가이세리크가 당시의 어수선한 정황을 틈타 거의 모든 반달족들을 거느리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가이세리크는 8만 명의 반달족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 속주 중의 한 곳으로 오늘날 알제리 중서부에 해당하는 마우레타니아 속주에 상륙하기 시작하였다.[5] 가이세리크의 군대는 보니파키우스의 저항을 물리치며 진군하였고, 북아프리카 침공을 개시한지 1년 만에 오늘날 알제리 동부에 해당하는 누미디아 속주 일대까지 도달했다.[6]
430년 6월, 마침내 가이세리크는 히포 레기우스를 포위하여 14개월에 걸친 공성전을 벌여 함락시켰다.[7] 이처럼 반달족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435년 2월, 당시 서로마의 군사적 실권자였던 명장 아이티우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를 통해 마우레타니아와 누미디아의 일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그 댓가로 매년마다 서로마에 조공을 바칠 것을 합의하였다. 또한 자신의 아들인 후네리크를 서로마에 인질로 보냈다.
439년 10월, 가이세리크는 서로마와 맺었던 평화조약을 파기하고는 마침내 북아프리카 속주의 핵심도시이자 중요한 항구였던 카르타고를 공격하였으며 이를 점령하였다. 이후 카르타고는 반달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카르타고를 차지한 가이세리크는 명실상부한 북아프리카의 지배자로 부상했다. 그는 이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곡식과 황금을 독식하게 되었으며, 주요 항구도시들을 통해 지중해 진출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이세리크는 이후로 강력한 함대를 양성하여 서로마와 동로마의 해양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2.3. 반달 왕국 건설
440년, 가이세리크는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 양성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노리기 시작했다. 가이세리크는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있는 파노르무스를 포위했으나 격퇴당했다.
441년, 가이세리크가 지중해에서 지나치게 세력이 강해지고 있다는 점을 경계한 동로마 제국에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여 시칠리아까지 이르렀으나 마침 훈족의 왕 블레다와 그의 아우 아틸라 등이 동로마를 침공하는 바람에 돌아가야 했다.
442년, 가이세리크는 또 다시 서로마와 평화조약을 채결했다. 가이세리크는 마우레타니아 속주의 속령 2군데를 서로마에 돌려주는 대신에 반달 왕국을 선포하고 그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 과정에서 가이세리크의 아들 후네리크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과 약혼을 맺었다. 이때 후네리크는 이미 서고트 왕국의 왕 테오도리크 1세의 딸과 혼인하여 부인으로 둔 상태였으나 결국 이를 쫓아내버렸다.[8]
2.4. 로마 약탈
[9]
455년 3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명장 아이티우스를 숙청했다가 그 보복으로 아이티우스의 옛 부하들에게 처참하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암살사건의 배후에 있었던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뒤를 이어 서로마 황제로 등극했다. 이 사건은 서로마 내부에 극심한 혼란을 부추겼다.
가이세리크는 이 기회를 노려
당시 로마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 레오 1세[10]는 가이세리크와 협상을 시도했고, 그 결과 가이세리크는 저항하지 않는 백성들을 살해하거나 숨긴 재물을 찾아내기 위해 고문하는 것을 금지하고 건물에 방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2주 동안 로마를 약탈한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두 딸인 에우도키아 · 플라키디아 등을 사로잡아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후 당초의 약속에 따라 후네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의 딸 에우도키아와 결혼하게 되었다.[11] 이때 반달족은 발레아레스 제도, 사르데냐, 코르시카, 몰타를 공격했고, 곧 서부 지중해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2.5. 지중해에서의 전쟁
461년, 가이세리크는 서로마 황제 마요리아누스가 북아프리카 탈환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러나 가이세리크는 사전에 배신자들의 획책을 이용할 수 있었고 함대를 파견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노바에 정박해있던 서로마의 함대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서로마가 꼬박 3년 동안 공을 들여 모아두었던 전함들은 모조리 불타버렸다.468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안테미우스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1세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반달 왕국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다.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서로마와 동로마가 동원한 연합군은 대략 10만 명에 달했고, 함선의 수도 1000척이 넘었다고 전해진다.[12] 연합군은 세 갈래로 갈라져 반달 왕국의 수도 카르타고를 전방위에서 압박해왔다. 서로마의 장군 마르켈리누스가 거느린 해군은 사르데냐 섬을 점령하였고, 동로마의 장군 헤라클리우스가 거느린 육군은 카르타고의 남동쪽을 공격해왔다. 그리고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바실리스쿠스는 직접 주력부대를 실은 대규모 함대를 거느리고 카르타고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이세리크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카르타고 인근에 정박해있던 바실리스쿠스에게 거짓으로 항복을 청하며 5일의 시간을 요구했다. 승리를 목전에 두었다고 착각한 바실리스쿠스는 이에 속아 넘어가 가이세리크에게 시간을 주는 실수를 저질렀고, 가이세리크는 그 동안에 함대를 재정비한 후에 본 곶에 정박해있던 연합함대를 기습하고는 화공을 퍼부어 1000척이 넘는 적선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본 곶 해전) 이로써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서로마와 동로마의 연합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이 참혹한 대패의 여파로 연합군 사령관 바실리스쿠스는 동로마 황제의 진노를 피해 달아나야 했으며,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는 당시의 실권자였던 리키메르 장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결국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가이세리크와 강화협상을 맺어야 했고, 가이세리크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의 해안지역을 확보했다.
2.6. 말년
이후 469~475년에 걸쳐 가이세리크는 반달 왕국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동로마와 서로마에 그야말로 처절한 보복을 가했다. 서로마는 이미 무너져가고 있는 판국이었으니 별다른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동로마는 지나번 가이세리크와의 싸움에서 1000척의 대함대를 잃은 여파로 제해권을 장악한 반달 왕국의 함대에 꼼짝없이 유린당할 수 밖에 없었다. 가이세리크의 함대는 알렉산드리아와 아나톨리아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475년, 가이세리크는 레오 1세의 사위로서 뒤를 이어 동로마 황제가 된 제노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전에 서로마 제국이 그랬듯이 가이세리크가 건설한 반달 왕국의 지배권을 인정하였고, 가이세리크는 그 댓가로 자신이 다스리던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니케아-칼케돈파 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다. 사실 가이세리크를 포함한 반달족들은 절대다수가 니케아파(및 칼케돈)와 앙숙지간인 아리우스파 신도들이었기에 그의 통치 하에서 늘 그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논란이 되어왔기 때문이었다.
476년 8월,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대장이었던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실권자인 오레스테스를 제거하고, 그의 아들이자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후 이탈리아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오도아케르는 가이세리크와 평화협정을 맺고자 하였고, 가이세리크도 이에 응하였다. 그에 따라 오도아케르는 해마다 반달 왕국에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가이세리크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칠리아를 얻었다.
477년 1월, 평생을 반달 왕국의 건설에 헌신해왔던 가이세리크는 88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가 반달족의 왕위에 오른지 49년 만의 일이었다. 요르다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가이세리크는 죽기 전에 아들들을 소집하여 서로의 욕망 때문에 나라를 분열시켜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가이세리크가 죽자 그의 아들인 후네리크가 반달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3. 평가
"로마의 기록에 따르면, 가이세리크에게는 신체적 장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상회할 만한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 피터 히더(Peter Heather) 교수, 《바바리안 라이징》 中
― 피터 히더(Peter Heather) 교수, 《바바리안 라이징》 中
"가이세리크는 거의 유일하게 통찰력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협상에 있어서는 가차 없었습니다. 군대를 투입할 때에도 가차 없었습니다. 기다릴 때와 공격할 때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 마이클 쿨리코우스키(Michael Kulikowski) 교수, 《바바리안 라이징》 中
― 마이클 쿨리코우스키(Michael Kulikowski) 교수, 《바바리안 라이징》 中
"로마의 모든 야만인 지도자들 중 가이세리크는 유일하게 정말로 왕국을 세우려 한 인물입니다. (중략) 가이세리크의 카르타고 함락은 로마 제국이 입은 가장 끔찍한 타격이었습니다. 이제 가이세리크는 서로마 군대와 로마의 식량 공급을 좌우하게 된 것입니다."
― 수사나 엘름(Susanna Elm) 교수, 《바바리안 라이징》 中
― 수사나 엘름(Susanna Elm) 교수, 《바바리안 라이징》 中
고대 로마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가이세리크가 당시의 또다른 이민족 지도자들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지략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가 북아프리카를 침공해 카르타고를 점령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에 큰 타격을 주었다는 사실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렇잖아도 점차 쇠약해져가고 있었던 서로마의 숨통에 결정타를 날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통치자로서의 실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반달족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우스파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가이세리크는 자신들을 멸시하던 니케아파(소위 정통파) 교도들을 몹시 증오했고, 때문에 이들에 대한 가혹한 종교 탄압을 일삼았다. 이후 동로마와의 교섭 과정에서 명목상으로는 탄압을 중지하였으나, 별다른 실효성은 없었다. 가이세리크가 죽은 후에도 종교 탄압은 계속되었고, 이는 반달 왕국의 내분과 쇠락을 초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 로마를 약탈한 야만족 수령의 이미지가 강해서 흔히 교회의 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당시 로마 주변의 여러 이민족들이 그러했듯이 가이세리크와 그 휘하의 반달족들 또한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다만 니케아-칼케돈파(소위 정통파) 교도가 아니라, 정통파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되었던 아리우스파 신도였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13]
- 민족대이동 당시에 악명을 드날렸던 야만족 군주들 중에서는 드물게도 88세로 장수하며 평온하게 천수를 마친 인물이다. 가이세리크보다 앞서 로마를 약탈했던 서고트 왕 알라리크는 서로마로부터 할양받은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로 이동하던 중에 병으로 객사했고, 가이세리크의 동시대 인물로서 "신의 채찍"이라 불렸던 훈족 왕 아틸라 또한 새로 얻은 신부와 첫날밤을 보내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과다출혈로 급사했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일본 만화 《베르세르크》의 등장인물인 가이제릭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보인다. 가이제릭의 영문 이름표기는 Gaiseric로, 가이세리크의 이름과 같다.오스트리아의 TV영화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를 그린 《성 아고스티노(Sant'Agostino)》에서도 후반부의 악역으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히포 레기우스를 포위한 상태에서 이를 공격하던 중 주인공인 늙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대화를 나누나 정복의 뜻을 꺾지 않는다.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드라마 시리즈인 《바바리안 라이징》에서는 후반부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리처드 브레이크. 역사의 기록처럼 한쪽 다리를 저는 불구인지라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다닌다. 겉모습은 깡마르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막강한 카리스마와 지략을 지닌 교활한 간웅으로 묘사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 승자와 패자 DLC의 1개 시나리오에서 이 인물을 다룬다.
[1] 오늘날의 이베리아 반도[2] 물론 로마가 비교적 약하던 시절에도 로마시가 이민족들에게 약탈당했던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제정 성립 이후 세계제국으로 거듭난 로마의 수도가 이처럼 무참히 약탈한 이는 알라리크와 가이세리크가 처음이었다.[3] 이런 면에 있어서는 서로마에 있어서 그 악명 높았던 서고트왕 알라리크나 훈족왕 아틸라보다 더욱 위험한 인물이었다.[4] 당시 서로마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어머니로,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하고 있었다.[5] 아마도 동원할 수 있는 선박은 모두 동원해서 대략 몇 주에 걸쳐 인원을 실어 나른 듯하다. 지브롤터 해협이 좁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면 스타크래프트에서 수송선으로 3센티 드랍을 마음 졸여가면서(중간에 적(로마군)이 쳐들어오면 그냥 다 망하는 거니까)수십 수백번 노가다를 했다고 생각하면 좋다.[6] 가이세리크는 여러 차례 원정을 몸소 지휘했고, 그의 계획은 돛을 올리는 그 순간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어느 쪽으로 항할 것인지 물어보면 바람 부는 대로 맡겨두라면서 바람이 정의로운 신을 분노하게 한 죄 많은 해안으로 우리들을 데려다줄 것이라 했다. 좀 더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려고 할 때는 가장 부유한 해안을 가장 죄많은 해안으로 여겼으며, 헤라클레스의 기둥에서 나일 강 하구에 이르는 전 지역을 황폐시켰다.[7] 당시 이곳에 오늘날까지 기독교에서 위대한 성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공성전이 시작된 지 2개월 후인 8월에 사망했다.[8] 그 방법이 매우 잔혹했다. 가이세리크는 서고트 왕녀인 며느리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뒤집어 씌우고는 그 두 귀와 코를 잘라버린채 친정으로 쫓아내버린 것이다.[9] 19세기경 러시아의 화가인 카를 브률로프(Karl Briullov)의 그림이다. 좌측의 검은 말을 타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가이세리크이다. 중앙에는 로마의 황후와 황녀들, 우측에는 로마 교황인 레오 1세가 그려져있다.[10] 참고로 동시대에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도 공존했다.[11] 이때에 가이세리크는 결혼을 핑계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지참금을 뜯어내어 짭짤한 수익을 거두었다. 에우도키아의 여동생 플라키디아는 후에 다시 서로마로 귀환했다.[12]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이 수치를 그대로 믿지 않으며 대체로 5만 가량이었다고 본다. 이렇게 보더라도 연합군의 규모가 매우 거대했음은 분명해보인다.[13] 고트족과 반달족 등은 일찍이 로마인들과 교류하면서 기독교 신앙, 특히 아리우스파 신앙을 받아들인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