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의 자연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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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방죽 景陽防築 | |
1946년, 만수위가 된 경양방죽의 풍경.# | |
위치 |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일대(지도) |
수심 | 매립 전: 약 10m 1차 매립 후: 1~4m |
면적 | 매립 전: 약 20만㎡ 1차 매립 후: 약 6만㎡ |
1. 개요
雜樹臨官道 여러 나무 관도(官道)에 늘어서 있고
芳池近驛樓 아름다운 저수지 경양역[驛] 가까이 있네
照顔春水遠 얼굴 비추일 봄물은 멀고
隨意晩雲浮 마음 가는 대로 저녁 구름 떠가네
竹密妨行馬 대숲 무성해 말 타기는 어렵겠지만
荷開合汎舟 연꽃이 피면 배 띄우기 좋겠구나
弘哉灌漑力 넓구나! 관개의 힘
千畝得油油 일천 이랑 논을 흠뻑 적시리
정약용, 1779년 2월, 경양지를 지나며(過景陽池)
경양방죽(景陽防築)[2]은 1960년대까지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계림1동)에 있었던 저수지이다. 이름은 고려·조선시대 역참이었던 경양역(景陽驛)[驛] 에서 유래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경양지(池), 경양호(湖), 경호(鏡湖), 금교방축(金橋防築), 금교제(金橋堤) 서방지(瑞坊池), 연지(蓮池) 등이 있다.[김희태,2007]芳池近驛樓 아름다운 저수지 경양역[驛] 가까이 있네
照顔春水遠 얼굴 비추일 봄물은 멀고
隨意晩雲浮 마음 가는 대로 저녁 구름 떠가네
竹密妨行馬 대숲 무성해 말 타기는 어렵겠지만
荷開合汎舟 연꽃이 피면 배 띄우기 좋겠구나
弘哉灌漑力 넓구나! 관개의 힘
千畝得油油 일천 이랑 논을 흠뻑 적시리
정약용, 1779년 2월, 경양지를 지나며(過景陽池)
규모로 볼 때 호남 지역 최대의 인공호수였다. 경양방죽 안에는 작은 섬이 있었고 호수의 주변으로는 수백년된 팽나무, 왕버드나무, 귀목나무 고목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1940년대~50년대까지만 해도 광주시민들의 사랑받는 명소였는데, 여름에는 피서객들이 모여들어 뱃놀이를 했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경양방죽 위에서 썰매와 스케이트를 탔다고 한다.
2. 역사
1910년대, 경양방죽과 광주천 일대[설명] |
2.1. 축조
- 축조 이전
계림동 중앙로 서쪽, 중흥동, 신안동으로 이어지는 평지는 과거에 광주천의 배후습지였다. 자연제방인 광주 구시가지와는 달리 배수가 불량해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광주읍내와 경양역[驛]을 잇는 둑길을 건설해 이동을 편리하게 했다. 이 둑이 경양방죽의 기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조광철,2017(1)]
- 삼국시대 축조설
1902년 6월 9일자 황성신문에 처음 실린 내용이다. 신라·백제 때 만들어져 조선 시대까지 여러 번 보수해 내려온 저수지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신뢰도가 매우 떨어진다.[변동명,2018][이옥희,2018] - 김방 축조설
조선 세종 대, 김방(金倣)이라는 인물이 건설했다는 설이다. 김방은 태종·세종실록에 기록된 실존인물로서, 벽골제(碧骨堤)와 태평관(太平館)을 보수했다고 한다. 김방이 경양방죽을 축조했다는 기록으로는 중추원의 『水利에 關한 舊慣』(1913), 야마모토 데스타로(山本哲太郞)의 『光州郡史』(1933), 김홍삼의 『景陽방죽의 歷史』(1968) 등이 있는데, 정작 당대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김방과 관련되지 않았더라도 경양방죽과 관련된 조선 전기 기록은 알려지지 않았다.[변동명,2018] 한편 이 설화가 광산 김씨 후손이 선조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해석도 있다.[이옥희,2018] - 16세기 후반 축조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경양방죽이 적어도 1600년 무렵부터 존재했음은 확실하다. 그 시기 광주 풍경을 읊은 여러 시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조광철,2017(1)][조광철,2017(2)] 또한 전쟁 중이나 전쟁 직후에 거대한 규모의 저수지를 축조할 수 있었을 리는 없기 때문에, 축조 시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경양방죽의 축조 시기는 (경양방죽에 관한 조선 전기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한) 임진왜란 발발 이전, 16세기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변동명,2018]
2.2. 구조, 운영
1920년대 초반 광주천과 조탄보 | 물의 흐름 |
경양방죽의 기능이 약화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 당시 광주천이 직강화되기 시작하고 하수구가 정비된다. 그런데 수로가 하수도로 바뀌는 바람에 더 이상 광주천 물을 유입시킬 수 없게 되었다. 경양방죽의 수심이 점점 얕아졌고, 농업용 저수지로서 기능하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방죽을 유원지로 만들자는 여론이 생겨나기도 했다.[조광철,2017(3)]
2.3. 1차 매립
"장차 광주가 대도시로 발전할 때를 대비해서 경관이 수려한 풍치지구로 보전되어야 한다."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쟁위원회의 매립 반대 이유 중에서.
1935년, 당시 전라남도지사였던 야지마 스기조(矢島杉造)를 중심으로 매립 계획이 세워졌다. '일본건국기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계림초등학교 뒤에 있던 경호대라는 산을 헐고 그 흙으로 방죽을 메워 일본인들의 택지를 만드는 계획이었다. 1936년 광주부는 공유수면 4만여 평의 매립을 허가한다. 당시 급격히 증가하던 인구를 수용하고, 공유수면매립을 통해 땅을 팔아 재원을 충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경양방죽 매립반대투쟁위원회의 매립 반대 이유 중에서.
광주부민들은 이에 반대해 저명한 인사였던 최흥종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조선총독부에 청원을 하는 등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총독부는 이를 묵살했고 결국 매립이 강행되었다. 다만 여론을 의식했는지 본래의 전면 매립에서 계획이 변경되어 1/3은 호수로 남게 되었다.
매립 이후 1940년부터 2년간 매각이 진행되었고, 1941년에는 매립지에 부영주택을 건설하기도 했다.
2.4. 2차 매립
8.15 광복 이후 광주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19] 이런 가운데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1950년대에 경양방죽은 늘어난 광주 인구로 인해 오염되어 저수지 기능을 상실했고 수질은 점점 악화되었다.1966년, 광주시는 위와 같은 이유로 남은 경양방죽마저 매립을 결정했다. 태봉산을 헐어 그 토사로 경양방죽을 매립했는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숨어있었다. 광주시는 시내의 중심도로인 금남로를 당시로선 파격적인 8차로로 확장하려고 했는데 당시 정부는 '광주같은 작은 도시에 왕복 8차로 도로가 가당키나 하나[20]'며 예산을 주지 않았다.[21] 그 때문에 돈이 필요해진 광주시는 태봉산을 헐어 그 토사의 일부를 팔고 경양방죽을 매립해 만든 계림동 신시가지를 분양해 그 돈으로 금남로 확장공사를 했다. 1968년의 일이다.
■1930년대 1차 매립 ■1960년대 2차 매립 |
2.5. 현재의 모습
경양방죽은 사라졌지만 골목길 구획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계천로6번길-무등로306번길-무등로307번길 라인이 원래 경양방죽의 서쪽 경계, 경양로217번길과 중흥로209번길을 반달 모양으로 잇는 골목길 라인이 1960년대 매립 직전 경양방죽의 동쪽 경계였다. 이 길들은 2011년에 경양방죽 둑방길(일명 '개미길')이라는 산책길로 조성되었다.경양방죽이 메워진 자리에는 1969년 시청을 지어 이전하였다.[22] 2004년에 광주광역시청이 다시 상무지구로 이전해 건물은 빈 상태가 되었다가 철거되었고 지금은 홈플러스 광주계림점이 들어서 있다.
사라진 것이 상당히 아쉬운 명소로, 오늘날까지 남아있었다면 시내 중심부에 거대한 호수가 있는 도시로 널리 유명해졌을 테지만 이제 와서 복구하는 것도 무리라서 결국 추억의 명소로만 남게 되었다.
3. 여담
4. 참고 문헌
- 박선홍, 「광주 1백년」, 심미안, 2012.
- 광주일보, 1930년대 물길 덮어 도로·주거지로 … 개발에 묻힌 '물의 도시'
- 광주광역시 지속가능발전협의회, 경양방죽 이야기
- 한국시민기자협회, 광주이야기-경양방죽
[驛] 경양도(景陽道)의 중심 역참이었다. 2022년 완공된 무등산자이&어울림 부지가 역참마을이 있던 곳이다. 경양방죽 제방은 광주읍성에서 경양역을 오가는 도로이기도 했다.[2] 防築은 그대로 읽으면 방축이지만, 순우리말 방죽이 되었다. 방죽은 저수지가 아닌 둑·제방을 뜻하지만, 둑을 막아서 만들어진 인공호라서 그냥 둑 이름이 호수 이름으로 굳어졌다.[驛] [김희태,2007] 김희태. (2007). 조선시대 기록을 통해 본 광주 경양지(景陽池). 향토문화, 27, pp. 41-64.[설명] 가운데의 큰 호수가 경양방죽이다. 방죽의 물은 위쪽 경양지천, 아래쪽 동계천을 통해 중흥동과 신안동의 평야를 지나고, 지도 좌상단에서 서방천으로 합류한다. 광주교대와 두암지구 삼거리 인근에서 방죽으로 내려오는 물줄기는 경양지천의 상류 부분이다. 그 아래 산수동의 무등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지천이 있다. 그 아래로 동계천이 있고, 광주읍성을 둘러싸는 해자가 보인다(해자는 1910년대부터 매립된다). 조선대 쪽에서 내려와 해자로 들어가는 지천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광주천에서 해자를 잇는 것은 조탄보 봇도랑이다. 한편 광주역 옆의 초록색 영역은 태봉산이다.[驛] [조광철,2017(1)] 조광철. (2017. 02. 07). 여러 갈래 경양방죽 탄생기. 광주드림.[변동명,2018] 변동명. (2018). 조선시기 광주 경양방죽의 수축과 운영. 국학연구론총, 21, pp. 307-335.[이옥희,2018] 이옥희. (2018). 경양방죽 설화의 전승 담론과 서사 전략. 호남문화연구, 64, pp.121-149.[변동명,2018] [이옥희,2018] [조광철,2017(1)] [조광철,2017(2)] 조광철. (2017. 02. 07). 경양방죽을 표현한 다양한 묘사들. 광주드림.[변동명,2018] [15] 조탄은 광주천의 옛 이름 중 하나로, 대추여울이라는 뜻이다.[조광철,2006] 조광철. (2006. 03). 광주천 '조탄보'를 기억하십니까? 광주드림.[조광철,2007] 조광철. (2007.02). 농사 짓기에 커다란 밑천이자 생명수. 광주드림.[조광철,2017(3)] 조광철. (2017. 03. 21). 사라진 경양방죽, 예고된 조짐들. 광주드림.[19] 불과 5년 사이 8만(1944년)에서 14만(1949년) 가까이 증가하여 남한 5대 도시가 되었다.[20] 이때도 광주가 전라남도청이 소재한 전남의 중심도시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광주에 비해서는 인구나 여러 면에서 전국적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까지 큰 도시는 아니긴 했다.[21] 사실 1968년이면 한국에 왕복 8차선 이상 도로가 정말 드물긴 했다. 기껏해야 서울 세종로 정도였는데 이 도로는 조선 건국 때부터 계획된 도로였다. 비슷한 규모의 도시였던 인천 역시 왕복 6차선 도로가 가장 넓은 도로였다. 1970년대 들어서야 넓은 도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68년 자동차 대수는 전국에 약 35,000대였고, 당시 광주 인구는 60만 명 정도였다. 당연히 정부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22] 최초의 시청은 전라남도청 근처 광산동(서남동)에 있었다. 흔히 '구시청'이라 불리는 곳.[23] 현 금호타운아파트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