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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홈페이지의 캠퍼스 변천사 소개창(링크)
사진으로 보는 역사(링크))
조치원 서창리의 첫 삽부터 현재까지의 세종캠퍼스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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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0년대 : 조치원캠퍼스 : 설립
1.1. 급조된 미국식 분교
▲ 1980년 조치원분교 기공식
정부의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과 맞물려 본교는 1979년 9월 19일자 문교부 승인으로 1980년 3개 학부, 8개 과에 조치원분교 신입생 400명을 선발했다.[1]
1981년 10월 20일 문교부 승인으로 조치원분교가 문리경상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이로써 조치원캠퍼스는 단순한 ‘분교’에서 본교 11개 단과대 중 2개의 대학으로 인정받았다. [2]그러나 캠퍼스 설치보다 신입생이 먼저 선발돼 80학번 학생들은 1년 동안 안암에서 강의를 들어야 했다.
1980년 7월 조치원분교 기공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당시 김상협 총장은 "안암의 언덕에 쌓아올린 공든 탑을 바로 이곳 서창의 언덕에 쌓아올려 마음의 고향을 하나 더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본교는 분교를 UCLA와 같은 미국식 분교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1982년에는 학제가 개편되었으며, 3개 학부를 경상대학(현 글로벌 비즈니스대학 및 공공정책대학)과 문리대학(현 과학기술대학)으로 편제 개편 하였다.
1.2. 캠퍼스다운 캠퍼스를 만들기 위한 노력
신입생들의 입학을 받고 정식으로 발족된 서창캠퍼스는 개교 당시인 1980년의 마스터플랜에 따르면 6개 건물이 건축되어져야 했다.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당장 필요한 건물들이 매우 느리게 건축이 되어 시설이 매우 열악하였다. 1981년에는 오늘날의 행정관(제1교육관)과 공공정책관(제2교육관) 두 동의 건물이 지어졌고,1982년 10월 23일 현재의 문화융합관(제3교육관)이 준공되었고, 1985년 6월 15일 현재의 과학기술 2관(제5교육관)이 준공되었다. 또 당시 농협비축미 창고였던 부지에 체육과학관이 착공되었다.▲ 건립당시의 제2교육관(현 공공정책대학)[3]
1.3. 장화신은 호랑이
학교의 인프라 설립이 매우 느리게 진행된 만큼, 서창의 언덕에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학생들의 불만도 함께 쌓였다. 서창 지역 일대는 진흙바닥이었다. '''어느 81학번 학생은 “콘셋건물(임시 가건물)이었던 학교를 바라보며 비 오는 날이면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질퍽한 등굣길을 거친 숨소리를 내어가며 걷곤 했다”[4]고 말했다. 조치원캠퍼스 학생들은 “각오는 했으나 하루 4시간 이상을 등‧하교에 허비하다보면 교통편이나 기숙사 시설에 무관심한 학교가 원망스럽다”며 “교수 부족과 시설 미비로 인해 기대했던 명문대의 교육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5]▲ 1981년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
▲ 1981년 캠퍼스에 강의실이 부족해 인근 조치원여자고등학교(현 세종여자고등학교)를 빌려 입학 시험을 치렀다
파일:external/www.kukey.com/15390_10833_1535.jpg
▲ 1983년 4월 5일자 <고대신문> '조치원 캠퍼스 아직도 울타리 밖인가' 기사. '닭장맨션'은 문리경상대학의 열악한 환경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 1984년 5월의 문리경상대학. 황량하기 그지없는 캠퍼스에 학생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명 ‘닭장맨션’이라 불리는 이곳은 1개 건물에 15개 이상의 방이 만들어져 50명 이상이 집단 거주를 하고 있었지만 수도․목욕탕 등 위생시설은 매우 부실한 실정”이었다.[6] ‘닭장맨션’은 1990년대 후반까지 서창리와 신안리 일대에 있었으나 학교에서 땅을 매입하며 사라졌다. 이름만 닭장맨션이 아니고, 실제로 닭장을 개조하여 만든 숙소였다!
1.4. 서창골 레퀴엠
캠퍼스를 세운지 4년이 되도록 환경이 개선되지 않자 1984년 4월 30일 학생 500명이 시위를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엔 교내에서 무덤을 파는 시위가 일어났다.[7] 1988년 11월 11일 학생들은 “학교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재단과 총장에 대한 응징으로 무능재단과 어용총장에 대한 묘 자리를 마련한다”며 행정동 앞에 묘 자리를 마련했다.[8]다음날 학교가 묘 자리를 매립하자 학생들이 부총장실의 집기들을 행정동 앞으로 끌어냈다. 13일엔 ‘어용총장의 장례식’을 치르고 봉분을 완성한 뒤 캠퍼스 발전 요구사항에 학교의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학교는 이를 무시했고 학생들은 행정동 앞에 끌어낸 부총장실의 집기를 불태웠다.▲ 당시 시위를 하던 학생들에 의한 투석현장
이듬해인 1989년 3월 27일 학생 500명은 본관 철야농성과 이사장 집 방문 투쟁을 하며 중복·유사학과의 통폐합을 주장했다.
1.5. 인촌동상에 걸린 밧줄
1989년 5월 9일 1,000여 명의 학생이 단과대 발전과 총장퇴진을 요구하며 본관을 점거했다. 학생 대표들은 총장과 처장단과의 면담을 위해 대학원장실에서 학교 측 대표를 기다렸다.그러나 학교 측은 불참했고 학생들은 인촌 동상에 밧줄을 동여맸다. “빈약한 학교 시설, 공사 중인 도서관, 밤만 되면 인적이 끊기는 유령 캠퍼스, 돼지우리 하숙방으로 대변되는 89년 서창캠퍼스는 등록금 많이 빼먹기 위한 대학 측 장사판의 극악한 무대였고 그 장사판의 졸 취급을 받던 학생들의 심사가 폭발했다.”[9]▲ 1989년 5월, 교육환경 개선에 늘 뒷전으로 밀려난 서창캠퍼스 학생들은 분교정책 시정을 요구하며 인촌 동상의 목에 밧줄을 걸고 그 앞에 무덤을 팠다.
사진 | (MBC <PD수첩> , 2005년 4월 5일)
▲ 1980~90년대는 분교가 아닌 특성화된 단과대로써의 발전과 열악한 환경 개선을 위한 학생들의 투쟁이 잦았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학생이 들고있는 피켓에 쓰인 '서창 발전 마스터플랜은 상상화인가'가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시위는 1990년대에도 이어졌다. 1994년 5월 31일 자연과학대학 환경공학과 학생들은 2박3일간 서창부총장실 점거 농성을 벌였다. 환경공학 관련 유사·중복학과 설치 반대와 구체적인 서창발전계획의 수립이 농성 목적이었다. 1994년 6월 7일 <고대신문>은 “서창캠퍼스 설립 초기부터 계속된 학생과 학교와의 대립, 건물 하나 지으려면 학교 전체가 떠들썩하도록 시위를 해야 한다는 통념과 서로간의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2. 90년대 : 서창캠퍼스, 변화
▲ 1989년 3월 14일에 열린 '비상총회'
▲ 1989년 2월 22일, 본교는 서창캠퍼스 최초의 기숙사 '자유관'을 세웠다. 캠퍼스를 세운지 9년만이었다.
▲ 세종캠퍼스 도서관인 '학술정보원'은 캠퍼스를 세운지 10년이 되어서야 지어졌다.
87년 11월 1일 당시 '조치원캠퍼스' 라는 이름은 '서창캠퍼스' 로 변경되었으며,[10] 그동안 학장이 총괄하던 시스템에서 벗어나, 서창부총장 제도를 도입하고 행정관리 부서로 교학처와 사무처를 신설하였다. 또한 행정의 전산화를 위해 서창캠퍼스 부속 전자계산소를 설치하였다. 이로서 서창캠퍼스는 안암캠퍼스와 함께 처리되었던 행정이 어느정도 명확해 졌다.
▲ 1995년 3월 29일 서창캠퍼스 교문 준공식. 이 문은 원래 서울캠퍼스의 정문이었다.
▲ 1992년 호상 안착 작업
서창캠퍼스는 창설 17년 만인 1997년 캠퍼스 주변 길 포장 공사, 도서관 진입로 콘크리트 포장을 했다. 학생회관 준공은 1998년 7월 24일에 했다. 학교가 1987년 착공하겠다고 약속한지 10년 뒤의 일이다.
그리고 고대로서의 상징을 강화하기 위해 서울에 방치되어있던 구 정문은 세종캠퍼스의 정문(현재는 동문)이 되었으며 서창캠퍼스에도 호상이 설치되었다.
▲87년 문리대학은 개편되어 자연과학대학이 분리되었고 93년 자연과학대학의 학습공간인 자연과학대학(현 과학기술 1관)이 준공되었다.
3. 00년대 : 세종캠퍼스, 발전
3.1. 변화에 이어지는 발전
▲ 서창캠퍼스와 안암캠퍼스의 재정 분리
2000년대부터 서창은 온전한 캠퍼스의 모습을 갖추며 새로운 이름과 비전을 알리기 시작한다. 2002년, 세종캠퍼스는 독립채산제를 실시하여 안암캠퍼스와 분리된 재정이 실시되었다. 이는 서창캠퍼스가 안암캠퍼스와는 독자적인 발전 노선을 걷겠다는 방향을 정한 것이다.
또 본교는 2004년 11월 25일 행정대학원 대전교육관을 개관하였고, 중앙광장을 조성해 쾌적한 캠퍼스 환경에 박차를 가하였다.
▲ 본교는 2005년 5월 25일 '농심국제관을 준공했다. 이날 노벨상 수상자 칼 위먼의 강연이 열렸다.
본교가 100주년을 맞은 2005년 5월, 서창캠퍼스 최초의 고려대 양식 석조 건물인 농심국제관이 준공됐다. 현재 농심국제관은 대부분의 교양수업과 외국어 수업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 vision 2010 선포식
참여정부 출범 이후 서창을 중심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와 오송·오창 과학 단지 및 KTX 고속철도역인 오송역이 건설되면서 서창의 발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본교는 2006년 4월 19일 농심국제관에서 서창을 하버드, 코넬대와 같은 최고의 기숙 캠퍼스로 만들겠다는 내용의 ‘VISION 2010+’를 선포했다.
같은 해 학과 통폐합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으나 자금 부족 때문에 문예창작학과를 미디어문예창작학과로 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학생들의 시위로만 머물렀던 유사·중복학과 문제가 2000년대엔 학교 차원의 논의로 전환됐다. 2007년 5월 서창캠퍼스가 한국철도대학 인수 1순위 대학으로 선정돼 학과 특성화에 대한 기대가 높았으나 두 달 만에 결국 인수 협상이 결렬됐다. 본교의 엄격한 교수 조건에 철도대 교수들이 소극적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해 11월 서창캠퍼스와 한국토지공사, 행정도시건설청이 행정중심복합도시 입주와 관련한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3.2. 세상의 종심에 서다
2008년 3월 11일 ‘VISION 2010+’의 일환으로 캠퍼스 명칭이 세종캠퍼스로 바뀌었다. 세종캠퍼스는 기존의 서창캠퍼스와 행정도시캠퍼스, 오송의생명공학원을 아우르는 통합명칭이다. 선포식에서 당시 현승종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은 “세종(世宗)은 세상(世上)의 종심(宗心)이라는 뜻”이라며 “세종캠퍼스가 세상의 종심에서 고대 발전을 이끌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본교는 호연학사 4관을 2009년 2월에 준공했다. 세종캠퍼스는 하버드, 코넬대 같은 명문 기숙형 캠퍼스를 목표로 발전하고 있다.
3.3. 청년고대 이립(而立)에 들다
▲약학대학의 탄생
▲ 2010년 2월 22일 준공한 석원경상관. 세종캠퍼스에서 두번째 고려대 양식 석조건물이자 최초의 석조 단과대 건물이다.
2010년 본교는 약학대학 유치에 성공해 신입생 모집을 시작했다. 2월엔 세종의 두 번째 고려대 양식 석조건물인 석원경상관을 준공했으며 외국인 학부 신입생 선발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현 인문관의 리모델링이 이루어져 유리궁전 형식의 건물로 탈바꿈했고, 30년 숙원사업인 신봉초등학교 부지 매입도 이뤄졌다. 신봉초 부지에는 2019년 주차장과 새로운 정문이 들어서 있다.
[11]
▲ 옛날 신봉초 부지를 매입해 지은 신 정문
세종캠퍼스는 2000년대 중반에야 온전한 모습을 갖췄다. 그러나 행정중심복합도시와 새로운 비전, 쾌적한 교육환경으로 이립을 당당하게 맞이했다. 기숙사가 없어 ‘닭장맨션’에서 살던 세월은 어느새 4개의 기숙사 시설로 흘러왔다. 80년대 선배들이 목 놓아 외치던 1단과대 1건물을 넘어 이제는 웅장한 고려대 양식 석조건물이 2채 생겨났다.
4. 10년대: 세종캠퍼스, 도약
출처: 고대신문 https://cms.kunews.ac.kr/하지만 이후 2015년도에 행해진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D+급으로 하위권을 기록해 재정지원제한 대학에 이름을 올리는 수모를 겪게 된다. 1년 후 재평가로 제한이 해제되었으나, 당시 부실대학 판별의 기준이었던 재정지원제한 대학에 이름을 올린 것은 학교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대학 구성원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학교 발전에 더욱 더 증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17년 현재 기존 4개 단과대와 2개의 독립학부를 5개 단과대로 개편하고 과학기술대학, 약학대학을 제외한 단과대는 사실상 학부제를 시행하는 등 대규모의 학사구조개편을 실시하였다. 또 대학구조개혁평가의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학교는 새로운 비전선포인 < vision 2025 > 를 선포하였다. 이 외에도 학생의 학습능력 신장, 교수학습법의 개선 등 여러 개선점들을 찾아내었고 여러 부설기관이 설치되어 빠른 시간에 학교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갔다.
우선 2015년 12월 미래인재개발원이 신설되었다. 현재 세종캠퍼스의 비교과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부서로, 여러 특별한 교외 활동을 지원해 주는 기관이다.
2016년에는 세종산학협력단이 탄생하였다. 그동안은 서울캠퍼스의 산학협력단에 소속되어 독립성이 없었으나, 세종 자체의 산학협력단 신설은 세종캠퍼스 학생들에게 더 많은 산학협력교육의 기회의 장을 마련하였다.
* 2017년 중앙일보 대학평가
* 지역 우수 사립대학교 5위
* 인문·사회·자연과학계열 교수 확보율1위
* 인문계열 저역서 피인용 5위
* 자연과학계열 국제 논문 피인용 5위
이 노력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2018년 문재인 정부의 대학기본역량진단에서 자율개선대학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얻어내었다.* 지역 우수 사립대학교 5위
* 인문·사회·자연과학계열 교수 확보율1위
* 인문계열 저역서 피인용 5위
* 자연과학계열 국제 논문 피인용 5위
또 시설개선에도 박차를 가해 2017년에는 가속기관, 2019년에는 신정문, 문화스포츠대학관, 산학협력관의 준공이 완료되었다.
▲ 가속기ICT융합관 완공(2017.5.10)
▲ 기부자들을 예우한 명예의 전당
▲ Donor's Wall
본교는 2015년 1월 16일 제 1회 세종캠퍼스 합동 교우의 밤 행사를 거행하였으며, 이 행사를 계기로 2018년 9월 5일 서울캠퍼스 교우회관에 '세종연합교우회'를 개관하였고, 세종출신의 교우들의 명부를 작성하였다. 서울과는 차별화된 세종만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2015년 1월 20일에는 대학발전기금 기부자들을 예우하는 명예의 전당이, 2019년 신정문 건축 이후에는 Donor's Wall을 조성하였다. 또 2017년 부터는 '자랑스러운 고대 세종인상'을 수여하여, 학교발전을 이끌어준 교우에게는 공로상을,교직원들에게는 공적상을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5. 2020년대
고려대 세종캠퍼스,2020년 QS 평가서 '두각'vision 2025의 성과가 조금씩 나오는 것인지, 2020년에는 QS 대학평가에서 문화유산융합학부가 고고학 분야에서 50위[12], 약학대학이 약학분야에서 89위로[13]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김영 세종부총장은 “고려대(서울ㆍ세종)는 지난해 QS 평가에서 83위를 차지했고, 올해도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냈다”며 “세종캠퍼스의 탄탄한 교육ㆍ연구 인프라를 바탕으로 더 의미 있는 결실을 맺겠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2020년 기능성 식품 계약학과로 선정되고,여러 종류의 가속기를 들여와 가속기 과학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세종특별자치시와의 상생 발전을 위한 여러 협약을 맺는 등 연구력과 교육수준에 있어 본 캠퍼스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하고 있다.
[1] 비슷한 이유로 연세대학교는 원주에, 중앙대학교는 안성에, 한양대학교는 안산에 분교가 설치되었다.[2] 어문학부(영어영문학과,독어독문학과,중어중문학과) 120명, 경상학부(무역학과,경영학과,경제학과) 200명,이공학부(물리학과,화학과) 80명[3] 2010년을 전후로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는 유리건물로 바뀐 상태다. 이 리모델링 기간 동안 현재 정문 좌측 주차장에서 구 신봉초등학교 교사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4] 1993년 3월 15일자 고대신문.[5] 1981년 4월 3일자 경향신문.[6] 1983년 4월 5일자 고대신문.[7] 일명 인촌흑막사건, 위 링크를 참조. http://nasanha.egloos.com/v/10629323[8] 1988년 11월 21일 고대신문.[9] 김형민 , <썸데이 서울>, 2003[10] 이는 안암의 언덕에 지어진 안암캠퍼스와 이름을 맞추기 위해 서창의 언덕에 지어진 서창캠퍼스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11] 1979년 조치원 캠퍼스 조감도에 따르면 현재의 교문은 원래 신봉초 쪽에 세웠어야 했으나 그간 부지 매입을 하지 못해 초기 캠퍼스 조감도상 후문의 위치에 세웠어야만 했다.[12] 아시아권에서는 4위, 국내 사립대 1위이다.[13] 전국 17개 '신설' 약학대학 가운데 가장 높은 성적을 얻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