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91970><colcolor=#ffffff> 주군 | 대무신왕 |
이름 | 괴유(怪由) |
신장 | 207cm[1] |
생몰연도 (음력) | ? ~ 22년 10월 |
출신지 | 북명(北溟) |
묘소 | 북명산 남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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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인물. 대무신왕을 섬겼으며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에서 대소왕의 머리를 벤 자이다.2. 생애
21년(대무신왕 4년), 대무신왕이 직접 부여를 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가다가 비류수에 이르었을 때 마로와 함께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는 스스로를 '북명 사람인 괴유'라 소개하면서 대무신왕의 부하가 되어 직접 부여 왕의 머리를 벨 것을 청하였다. 대무신왕은 이 청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이듬해인 22년 2월, 부여와 고구려의 군대가 부여의 남쪽 땅에서 격돌하였는데, 이때 고구려의 군대는 잠시 진영을 차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부여의 왕이었던 대소왕이 그 틈을 노리고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기습하려다가 그만 진흙창에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하게 돼버렸다.
이때 대무신왕의 명을 받은 괴유가 칼을 뽑아들고 선두에 서서 부여의 군대를 쳐부수었으며 대소왕의 목을 베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왕의 죽음에 자극을 받은 부여인들이 더욱 거세게 덤비는 바람에 결국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대무신왕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부여 정벌은 끝내 실패하였다.[2][3]
이후에 괴유는 22년(대무신왕 5년) 10월에 병에 걸려 죽었는데, 대무신왕은 괴유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북명산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3. 평가
기본적으로 꽤 한 덩치 하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직접 칼을 빼들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 때 부여 군사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기록을 보면 꽤나 용맹한 무인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에게 최대의 적이었던 대소왕을 전사시켰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사실 괴유가 고구려군에 들어가서 대무신왕과 함께 했던 시간은 겨우 1~2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대무신왕이 괴유의 죽음을 무척 슬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왕에게서 상당히 총애를 받았던 듯하다.
4. 정체에 대한 논란
일단 괴유는 스스로를 '북명인(北溟人)'이라 밝혔는데, 문제는 이 '북명'이라는 곳이 대체 어느 나라의 어느 동네인 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북명이 여러 번 언급되는데, 고구려와 신라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편이라 기록을 종합해봐서 대체로 동해안 원산, 강릉시 쪽, 즉 동예 계열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당시 졸본 쪽에 있던 고구려 수도보다 남쪽이니, 부여를 치러 가는 중에 만났다는 부분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신채호는 만주벌판 한복판 북부여로 추정했다. 당시 부여에는 금 세공 문화가 오르도스 문화보다 일찍 나타났는데 실크로드에 의한 그리스의 금 세공 문화가 스키타이의 동방 무역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그리고 뜬금없이 왕 앞에 튀어나와서는 곧바로 군인이 되었던 것을 보면 더욱 그 정체를 알기 힘들어진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괴유는 키가 9척(약 207cm)이나 되는 거구인데다가 얼굴이 희며, 눈에서는 광채가 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실 괴유가 백인[4]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 외에도 괴유가 사실은 본국에서 배신 당한 부여인이라든가, 또는 부여에게 압박을 받고 있던 읍루인이었다는 등 그 출신성분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다.
대무신왕을 만나자마자 대뜸 부여 왕의 목을 베어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삼국사기의 대목을 보면 괴유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부여나 부여의 왕에 대해 강한 증오심을 품고 있던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5. 대중매체에서의 괴유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신수인 백호를 부리는 인물로서, 부여의 귀족 집안인 은씨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로 나온다. 은씨 일족은 부여의 유력 가문이면서도 친 고구려 성향을 띠고 그와 교류하였기에, 이를 불온하게 본 현무에 의해 일족이 몰살되었으나, 시체까지 다시 확인하는 와중에서 괴유와 그 누이 '가희'는 살아남았다.[5]그 후 음지에서 무휼 일행을 도우며 암약하다 부여와의 전쟁에 임해 상장군에 임명되어 대소왕을 전사시키는 등 활약하지만, 후에 전투 중에 '용이'(무휼의 차비 '연'의 동생)에게 치명상을 입었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더는 삶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전장에 나선다. 그 후는 신수 주작을 잃는 것을 무릅쓰고서까지 그를 위기에서 구해낸 무휼의 누나 세류와 맺어진 후[6] 역사대로 부여 원정이 끝난 얼마 후에 숨을 거둔 것으로 나온다.
곽재식의 소설 역적전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큰 칼을 사용하는 무술을 만든 사람으로 나온다. 그 무술을 전수 받은 먼 후대의 고구려 사람이 칼 쓰는 방법이 수준이 높기는 하지만 너무 괴상해서 말하자면 발적화되어 있는 무술이라고 여기면서 주인공 출랑랑에게 전해준다. 그런데 출랑랑이 우연히 아주 큰 칼을 들고 그 무술을 쓰면서 괴유의 무술은 큰 칼에 최적화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바람의 나라(드라마)의 등장인물로 박상욱이 연기했다. 해명을 주군으로 모시던 고구려의 무사로 해명 사후 무휼의 킹메이커로 활약하고 세류공주와 맺어진다. 원작 만화와 달리 판타지적 요소는 없으며 죽지도 않고 해피엔딩. 길다란 백발에 곱상한 외모를 지닌 원작의 괴유와는 정반대로 남자다운 이미지.
사신소년에서는 이경호가 회수한 코어이자 티켓으로 사용한 46번째 영혼으로 등장한다. 수식어는 '부여왕의 참수자'. 괴유 자체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인물이다보니 딱히 특징이라고 할만한 부분은 없고 권능 사용시 백호 한 마리가 나타나는데 이건 위에 있는 바람의 나라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1] 삼국사기에 9척이라 나온다. 다른 각주에도 서술하지만 현재의 척은 일본이 개항이후 피트를 척으로 번역한 것이 넘어온 것이다. 고대사의 1척은 거의 전한의 1척인 23cm를 기준으로 한 것.[2] 그러나 대소왕의 죽음을 계기로 부여는 쇠퇴의 길을 걸었으니 어찌 보면 결정적인 승부였다.[3] 사실 부여의 쇠퇴는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기도 했는데, 동맹이었던 한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방어가 어려운 지리적 환경에서 물길, 모용선비, 고구려에게 3방향으로 두들겨맞게 된다. 결정적인 부분이라면 아직 고구려가 초기였던 이때 빠르게 결정타를 먹이고 남하해서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했어야 했으나 고조선의 발달된 유산을 흡수하며 시작한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오히려 국왕마저 죽임을 당하게 된 것.[4] 만주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당시 몽골이나 남시베리아 지역에는 인도유럽계 백인 형질을 띄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사람일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5] 괴유는 과거 해명태자에게 '하늘에 목숨을 빌리는' 일종의 가사(假死)법을 배웠고, 가희는 불로불사초가 인간으로 화해 태어난 것이라 죽은 뒤 풀로 환생했다.[6] 양쪽 다 서로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으나, 괴유는 원래 신분 차이 및 자신의 목숨이 길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고구려의 공주인 세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