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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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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클럽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상무 축구단2.2. 전북 다이노스-전북 현대 다이노스2.3. 비셀 고베2.4. 전북 현대 모터스2.5. 성남 일화 천마
3. 국가대표 경력4. 선수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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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축구인 김도훈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클럽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상무 축구단

남들보다 다소 늦은 중학교에 축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명문인 통영중 - 학성고 - 연세대를 차례로 거치며 엘리트 선수로 두각을 보였고 연세대를 졸업하자마자 프로가 아닌 상무 축구단에 입대했다. 당시 드래프트에 참가하면 전북 버팔로에 입단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상무에서 서정원, 박태하 등과 함께 훈련하며 선수로 더욱 성장했고 국가대표에도 선발되는 등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2.2. 전북 다이노스-전북 현대 다이노스

전역 후 1995년 드래프트를 통해 당시 신생 구단이었던 전북 다이노스에 입단했다. 차경복 감독 지도 아래 초반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활약했다. 하지만 전반기 중반 비골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며 전열에서 이탈했고 신인왕노상래에게 내주고 말았다.

2년 차엔 22경기에서 10골 3도움을 기록하며 첫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나고선 1996 AFC 아시안컵에 참가하며 황선홍과 투톱으로 나서는 등, 국대급 선수로 성장했다.

3년 차엔 14경기 4골을 기록했고 시즌을 마치고 비셀 고베가 김도훈을 원했다. 협상이 원활하지 않자 임대로 이적하며 일본 진출을 하게 됐다.

2.3. 비셀 고베

1998년에는 J리그비셀 고베로 임대 이적해서 2년간 58경기 27골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약팀이었던 비셀의 2년 연속 강등권 대탈출을 이끌어 내 J리그에서의 평가도 매우 높았으며, 김도훈의 활약에 취한 비셀 고베 사무국이 3명의 용병 슬롯을 모두 한국 국가대표 선수[1]로 채웠을 정도로 김도훈의 활약은 대단했다.

1990년대 말 황선홍, 최용수와 함께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로서 J리그를 폭격하며 한국 스트라이커의 위상을 드높였다.

2.4. 전북 현대 모터스

2000년 비셀 고베 임대 생활을 정리하고 국내 최고 대우인 3억 3500만 원을 받으며 전북 현대 모터스로 복귀한 김도훈은 5년 전 황선홍이 세운 역대 최다 기록 타이인 8경기 연속 득점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전북을 리그 3위로 올렸고 대한축구협회 FA컵 트로피까지 차지했다. 김도훈은 그 해에 리그 27경기 출전해서 15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에 오르는 등 최고의 기량을 과시했다.

2001년에는 주장직에 오르는 등 팀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아디다스컵 득점왕을 차지했다. 시즌 종료 후 주빌로 이와타가 영입을 추진했으나 구단에 잔류하였다.

하지만 김도훈과 전북의 관계는 계속되지 못했다. 2001년말 성적 부진으로 최만희 감독이 사퇴하고 조윤환 감독이 들어오면서부터 김도훈은 조윤환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도훈은 주장직을 다시 최진철에게 넘겨줬고, 조윤환은 부천 출신 선수들과 외국인 선수들 위주로 팀 리빌딩을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김도훈을 비롯한 기존 전북 선수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급기야는 총대를 메고 기존 전북 선수들을 대변한 김도훈에게 조윤환 감독이 불량 감자라 폭언을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전북 현대에 마음이 떠난 김도훈은 2002시즌 종료 후 FA를 신청해 성남 일화로 떠난다. #

어쨌거나 구단과의 관계와는 별개로 김도훈은 전북의 황제임을 증명하듯, 92경기 40골의 활약을 펼쳤다.

2.5. 성남 일화 천마

작년에 이어 또 한 번 J리그주빌로 이와타에서도 관심이 있었지만 신인 시절 은사인 차경복 감독을 따라 성남으로 이적했다. 2년 계약에 이적료 6억 5천만 원과 연봉 4억 원이라고 밝혀졌다. 이로써 4년 연속 연봉킹에 오르는가 했으나 신태용이 천만 원 높게 재계약하며 연봉 2위에 올랐다.

2003년에는 당시 역대 최고 기록인 28골로 K-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이는 데얀이 2012년에 31골을 기록하기 전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당시 마그노도도 2명의 브라질 특급 스트라이커와의 경쟁 속에서 기록한 것이라서 더욱 의미가 있다.[2] 또한 리그컵을 제외한 리그 기록으로만 봤을 때 라데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단일 시즌 10-10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2004년에는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국내 선수 최초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리그에선 23경기 5골로 부진했다.

2004 시즌 종료 후 구단과 1년 재계약을 채결했고 팀을 떠난 신태용에 이어 주장에 선임됐다.

2005년 주장으로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40-40 클럽에 가입했고, 8월 31일 인천과의 홈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넣으며 김현석을 넘어 프로축구 역대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10월에 발가락 골절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며 시즌 막판을 날리게 되고, 2005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부상 때문이 아니라 단국대 체육행정 박사 과정에 합격해 학업을 위한 은퇴임을 알렸다.

성남 일화 천마에서는 104경기 51골이라는 대활약을 펼치면서 K리그 우승 3연패를 비롯한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레전드 선수로 존경을 받고 있다. 특히 2003년에는 K리그 역사상 최초로 리그 MVP와 득점왕을 모두 휩쓴 바 있다. 기록의 사나이로 불리는 신태용과 같이 황금 콤비를 이루면서 만든 득점의 수를 합치면 무려 200개가 넘는다.[3]

실제로, 신태용과 함께 K리그 역사상 최강의 스쿼드로 거론되는 2000년대 초중반 성남 일화의 핵심 전력이었다.

3. 국가대표 경력

학성고 3학년이던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며 첫 대표팀에 데뷔했다. 이후 상무 소속으로 1993 버팔로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해 득점왕을 차지하며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1994년 9월 13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자신의 A매치 데뷔전인 우크라이나와의 친선 경기에서 바이시클 킥으로 데뷔골을 넣으면서 유명해졌다. 이 골은 2024년 기준으로 현재에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 이래 유일한 바이시클 킥 득점이기도 하다.#[4] 그 해의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과 1995년 코리아컵, 1996 아시안컵 12개국 본선 등을 거치면서 황선홍, 최용수 등과 함께 대표팀의 간판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거쳐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최종 명단에 발탁되어 당초 주전 공격수로 낙점되어 있었던 황선홍과 최용수가 각각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인해 출전이 어렵게 되자 그들을 대신해 멕시코전에 원톱으로 선발 출장했지만 부진했다. 후반전엔 다리에 쥐가 나서 침을 맞아가면서 뛰는 투혼을 보였지만, 정작 경기를 지켜보던 축구 팬들의 반응은 "최용수, 황선홍은 어디 가고 쟤가 나왔어?"였다. 32강 조별 리그 2차전인 네덜란드전에서도 선발 출전했는데, 초반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옆그물을 때리는 인상적인 장면을 보이기도 했다. 해설진이 순간 골로 착각했을 정도. 이동국을 전국민에게 알린 후반 강력했던 중거리 슛과 함께 네덜란드전에서 인상 깊은 슈팅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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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9년 3월 28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과 친선 경기를 가졌을 때 후반 종료 직전에 브라질[5]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을 1-0으로 격파하는 파란을 일으켰다.#[6] 이는 A매치 한정으로 아시아 국가의 유일무이한 브라질전 승리다. 여담으로 당시 브라질 국대표팀감독이던 반데를레이 루솀부르구 감독은 "한국 경기장의 상태가 나빠서 졌다."라고 변명[7]했다가 자국 언론들에게 욕만 왕창 쳐먹었고, 이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남미예선에서 거듭된 부진으로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8]

2000 시드니 올림픽 축구 16개국 본선 때는 와일드카드로 뽑혔는데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3차전 칠레전에서는 이천수가 퇴장 당한 상황에서 교체 출전했는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후배들에게 폐를 끼치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한동안 국가대표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도 5골을 기록할 정도로 주전 공격수로 중용되었다. 하지만 2002년 북중미 골드컵을 끝으로 기용되지 않았으며, 2002 월드컵을 몇 달 남기고 떠난 해외 전지 훈련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결국 예상대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최종 명단에 탈락하며 그의 월드컵 커리어는 끝나버렸다. 김도훈의 능력 자체는 월드컵 엔트리에 들어도 무방할 정도였으나 전술상 주전 경쟁에서 밀린 끝에 낙마한 것이다. 실제로 2002 월드컵 당시 포르투갈 대표팀한국전을 앞두고 (한국팀 엔트리에도 없는) 김도훈을 조심하라는 특명을 받았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방심을 나타내는 일화이지만 브라질을 때려눕힌 김도훈이니 요주의 대상이 될 만했다.

히딩크호는 3-4-3 포메이션을 쓰며 정통 스트라이커는 원톱 자리에 한 명만 필요했기 때문에 대표팀 주전이었던 황선홍에게 밀렸고, 그외에 나머지는 설기현, 이천수, 차두리, 박지성 같은 윙 포워드형 공격수들이었다.[9] 그리고 경기 중 김도훈의 불필요한 행동들이 히딩크의 눈 밖에 났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데, 실제로 북중미 골드컵 3, 4위전인 캐나다전에서 김도훈은 선제골을 넣었지만, 이후 자책골을 기록하고 만다. 캐나다 선수가 크로싱한 볼을 걷어낸다는 것이 김도훈의 머리를 맞고 한국 골대 안으로 들어간 것. 히딩크는 어느 언론의 인터뷰에서 김도훈은 충분히 능력이 있는 공격수이지만 불필요한 행동을 보여주곤 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것이 괜한 착각이 아니었는지 김도훈은 성남 일화 소속으로 출전한 클럽 대항전에서 중국 프로팀과 경기를 가졌는데, 여기서 또 자책골을 기록한다.

그런데 정작 축구 팬들 사이에서 김도훈의 엔트리 탈락은 딱히 화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월드컵 1, 2년 전까지는 히딩크호의 주전 공격수 역할을 했던 선수였는데, 엔트리가 발표되었을 때도, 월드컵이 성황일 때도, 대회 종료 이후에도 김도훈에게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당시 김도훈과 마찬가지로 엔트리에서 제외된 이동국의 경우 의외라는 반응도 많았고 동정 여론도 있었기에 어느 정도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김도훈은 그런 면이 상대적으로 굉장히 적었다. 아니 아예 묻혀버렸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듯. 물론 본인은 기사나 인터뷰 등을 통해 엔트리에서 제외된 것에 대한 상심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팬들은 김도훈과 월드컵과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나마 월드컵 이후 치러진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 출전하며 어느 정도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월드컵 이후 2003년 아시안컵 지역 예선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한국의 아시안컵 본선 진출에 크게 공헌했다. 히딩크의 후임인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 또한 "맡은 지역에서 찬스가 생기면 확실히 골로 마무리를 하는 선수"라며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원래 아시안컵 지역 예선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지만 코엘류 감독이 만류했다. 하지만 2003년 12월 10일 동아시아컵 일본전을 마지막으로 2004년 1월 결국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당시 대표팀에서 자신이 안정환, 설기현, 이천수, 박지성, 차두리 같은 2002 월드컵 출신의 젊은 해외파 선수들의 교체 선수에 불과하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최성국, 조재진 같이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에도 좋은 후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0]

2006년 3월, 앙골라전을 통해 국가대표 및 선수 은퇴식을 가졌다.

4. 선수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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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도훈, 하석주, 최성용[2] 사실 이것은 일찍 우승을 확정한 상태에서 팀이 김도훈에게 득점 지원을 집중한 면이 있었는데, 이것은 성남, 전북, 울산 다 마찬가지였다.[3] 실제로 신태용은 감독이 되면서부터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팀을 꾸렸지만 선수들이 해이한 모습을 보일 때, "나랑 김도훈 코치가 합작해서 넣은 골만 200개가 넘는다. 그런데, 넌 뭔데 빈둥거리나?"며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4] 도움은 한정국. 한정국의 크로스를 받아 그대로 바이시클 킥으로 골을 만들었다.[5] 당시 브라질은 피파 랭킹 1위이며, 1994 월드컵 우승, 1997 코파 아메리카 전승 우승, 1997 사우디 컨페드컵 우승, 1998 월드컵 준우승, 1999 코파아메리카 전승 우승, 1999 멕시코컨페드컵 준우승, 2002 월드컵 7전승 우승으로 최전성기 시절이었다.[6] 도움은 최성용. 당시 빗셀 고베에서 같이 뛰던 동료였다.[7] 당시 IMF 구제 금융을 받던 시기라 축구장 관리를 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잠실종합운동장의 시들어버린 잔디에 페인트칠을 하고 브라질전을 치렀다. 룩셈부르구 감독의 변명에는 그나마 이해할 만한 측면이 있었던 셈이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직전까지도 대한민국 축구 경기장 상태는 전반적으로 매우 좋지 않았고, 브라질전을 치렀던 잠실종합운동장은 그 정점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사실 그 당시 브라질의 경기력은 영 좋지 않았으며, 되려 브라질의 축구장 상태도 무진장 심각했다. 2000년에 1부 리그 경기장이 무너져 168명이나 사망한 사건이 터졌을 정도. 그것도 어디 듣보잡 2부 리그도 아닌, 1부 리그에서도 강호인 CR 바스쿠 다 가마 홈구장이었다. 노후화에 안전 문제, 잔디도 엉망인 수준이었기에 브라질 언론은 우리 브라질은 뭐가 잘났냐고 감독을 비난했던 것. 브라질도 2014 월드컵 개최를 해서, 경기장들을 리모델링한 거였다.[8] 후임은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그러나 문서를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후 코파 아메리카에서 6전 전승으로 우승하기도 하고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으로 부임해 바닥 상태에 있던 팀을 수습하기도 하는 등 아주 능력없는 감독은 아니다.[9] 황선홍과 교체되는 조커로 뽑힌 안정환은 황선홍과는 타입이 다른 섀도우 공격수 스타일이었다. 또한 좌우 윙포워드인 설기현과 박지성, 이천수와 차두리 등은 모두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이었고, 주전인 설기현을 제외하면 모두 서브로 쓰기에 적절한 선수들이었다. 결국 정통 스트라이커인 황선홍과 최용수에 밀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김도훈이 히딩크호에서 주전으로 뛰던 시기에 황선홍은 부상으로 빠진 기간이 많았는데, 이 당시 대표팀은 골 가뭄으로 인해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히딩크 역시 인터뷰에서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 즉 킬러가 없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황선홍이 부상에서 돌아와 골을 터뜨리자 자연히 김도훈의 입지는 줄어들게 된다.[10] 당시 김대의, 우성용 등이 김도훈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베테랑 공격수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