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은 범행 당시의 모습, 우측은 체포당시 모습이다. | |
이름 | 김선자(金宣子) |
출생 | 1939년 (일자미상) |
전라남도 순천군(現 순천시) | |
사망 | 1997년 12월 30일 (향년 58세) |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정동 대전교도소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버지 김종춘(1915. ~ 1988. 3. 27.) 여동생 김문자(1945. ~ 1988. 4. 29.) 남편 손○○, 슬하 3남 시누이 손시원(1944. ~ 1988. 8. 8.) |
종교 | 무종교 |
범죄유형 | 연쇄살인 |
형벌 | 사형 (교수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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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9년 순천시에서 태어났다. 사건 이전에는 평범한 가정주부였으며 페인트공으로 일하던 남편 사이에서 아들 3명을 두고 있었다. 남편이 벌어온 생활비와 지인들에게 빌린 돈을 카바레 출입과 도박에 탕진하던 그녀는 막대한 액수의 빚을 떠안게 되었는데 결국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가족과 채권자들을 연이어 독살했다.
연쇄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8년 후 1997년 12월 30일에 장기 미집행 사형수 22명과 같이 처형되었다.[2][3]
2. 김선자 연쇄 독살사건
자세한 내용은 김선자 연쇄 독살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3. 기타
- 매우 흉악한 범죄임에도 이 사건이 그리 잘 안 알려져 있는데, 체포된 연도가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던 해여서 사람들의 관심이 올림픽에 쏠려서이기도 하고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을 쉬쉬하던 사회 분위기도 한 몫했을 것이다.
- 1989년 사형이 확정된 이후 사형 집행을 무려 6번이나 피했다. 1990년 4월과 12월, 1991년 12월 18일, 1992년 12월 29일, 1994년 10월 6일, 1995년 11월 2일에 걸쳐 총 65명의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김선자는 집행 대상에서 운 좋게 계속 제외되었다.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당시 교정시설에서 하도 결백을 강하게 주장했고 거기에 낚인 삼중스님이 배명인 前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정관계 고위인사들에게 김선자 사건의 재조사를 강하게 요구한 탓도 컸다. 어찌나 뻔뻔스럽게 결백한 척 연기를 잘 했는지 교도관들, 동료 수용자들 상당수가 김선자에게 낚였다고 한다.[4][5] 만약 1997년 집행마저 운 좋게 피해갔다면 원언식을 제치고 [age(1989-01-01)]년간 복역 중인 최장기 사형수이자 유일한 여성 사형수로 남았을 것이지만[6] 마지막 사형 집행만큼은 피하지 못하였다.
[1] 위 유튜브 방송에서도 잘못 소개되고 있는데 첫 번째 여성 연쇄살인범은 박분례 보험 살인사건을 일으킨 박분례다. 더구나 박분례는 정부 수립 이래 남녀 통틀어 최초의 연쇄살인범이기도 하고 최초의 보험 사기 살인범이기도 하다. 박분례는 1983년 7월에 처형되었다.[2]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의 김용제도 포함되었다.[3] 이것이 사실상 현재로서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사형 집행이다.[4] 아직도 그 흔적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사형수 김선자는 억울하다[5] 해당 사건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김선자는 사형 집행 직전에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기는 했다. 다만 끝까지 남탓으로, 부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죄라고 하며 자신의 범행을 반성하지 않았다.[6] 만약 2024년 기준, 현재까지도 살아 있었다면 1939년생이라 김선자는 오종근보다 1살 어려 오종근이 진작 사망하거나 감형받는다면 최고령 사형수가 되었을 것이다. 통상 여성의 수명이 남성보다 길기에 더 가능성이 있다.[7] 공식적으로 고유정은 전 남편만을 살해한 것으로 판결났으므로 엄밀히 말해 김선자와 같은 연쇄살인범은 아니다. 다만 의붓아들까지 살해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심증적으로는 믿고 있고 무죄 취지도 증거불충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