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fff 前 대한민국 대법관}}}]] | |||
<colbgcolor=#003265><colcolor=#fff> 출생 | 1957년 3월 30일 ([age(1957-03-30)]세) | ||
경상남도 부산시 (前 부산광역시) | |||
현직 | 법무법인 사이 대표변호사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 ||
재임기간 | 제15대 울산지방법원장 | ||
2012년 2월 16일 ~ 2012년 8월 1일 | |||
대법관 (양승태 대법원장 제청 / 이명박 대통령 임명) | |||
2012년 8월 2일 ~ 2018년 8월 1일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003265><colcolor=#fff> 가족 | 배우자 신화순[1], 슬하 1남 1녀[2] | |
학력 | 부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 / 학사) | ||
병역 | 병역면제 (소아마비) | ||
경력 |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제12기 사법연수원 수료 부산지방법원 판사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 판사 부산고등법원 판사 울산지방법원 판사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부장판사 부산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부산판례연구회 회장 제15대 울산지방법원장 대법원 대법관 (2012.08. ~ 2018.0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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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前 대법관으로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겸, 법무법인 사이에서 대표변호사로 근무중이다.2. 생애
1957년 3월 30일, 경상남도 부산시[3]에서 태어났다. 1976년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80년 졸업 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83년 사법연수원을 12기로 수료하고, 부산지방법원, 울산지방법원, 부산판례연구회 회장 등 경남 지역에서 판사로 재직했다.울산지방법원장 재직 중 양승태 대법원장 제청 및 인준절차를 거치고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하여 2012년 8월부터 2018년 8월까지 대법관을 역임했다. 장애인 출신 대법관으로서 재야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대법관 퇴임 후에는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동년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2023년 5월부터 법무법인 사이 대표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3. 논란
- 대법관 재임 중 소부[4]에서, 여중생(15세)과 성관계를 한 연예기획사 대표(42세)에게 강간 및 성폭행 혐의를 인정한 1심 및 2심을 뒤엎고 무죄취지 파기환송을 한 장본인이다. 당시 김신 대법관은 위 사건의 주심을 맡아, 피의자가 제출한 러브레터, 만삭의 피해 여중생이 썼던 편지가 백 여장이 넘었던 점, 여러 색의 펜을 이용해 편지를 썼던 점 등을 근거로 피의자와 여학생이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이를 인정, 재판 내내 결백을 호소 하던 피의자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 판단하여 무죄취지로 서울고등법원에 파기환송했다. 사건번호는 2014도9288.
- 하급법원 사실심에서 이미 연달아 유죄를 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하게 대법원 상고심에서 김신 대법관에 의해 무죄취지 파기환송이 터지자, 뒤늦게 이 사건을 그루밍 성범죄의 주요 사건으로 공론화하려는 시민단체들은 정작 그런 결론을 내린 김신 대법관이 아니라 애꿎은 서울고등법원 파기환송심과 대법원 재상고심을 줄창 공격했다. 그러나 사실심에서 이미 가능한 거의 모든 증거가 현출된 상태에서 소부 대법관 4인의 전원일치로 무죄취지 파기환송이 났으니, 파기환송심과 재상고심에서는 그 기속력으로 인해 유죄취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5] 이 사건의 재상고심 판결문에는 환송판결(김신 대법관이 주심을 맡아 무죄취지 파기환송한 위 2014도9288 사건)의 판결번호만이 적혀 있을 뿐, 아예 파기환송심의 판결번호조차 적혀 있지 않은데, 이는 하급법원인 파기환송심이 상급법원인 대법원의 견해를 뒤집고 새로운 증거판단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재상고심의 사건번호는 2015도17068으로, 주심은 조희대 대법관(현 대법원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