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3:15:56

김영환(1963)


파일:external/sstatic.naver.net/201207271400405711.jpg
이름 김영환(金永煥)
출생 1963년
경상북도 안동시
학력 마포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 / 학사)

1. 개요2. 생애
2.1. 강철서신2.2. 밀입북2.3. 우익으로 전향2.4. 이후
3. 소속 정당4. 여담5. 저서

[clearfix]

1. 개요

남한운동권 출신 북한 인권운동가이다. '강철서신'을 통해 대한민국에 주체사상을 처음으로 '수입'한 인물로 NL계열 주체사상파의 시조이다. 현재는 완전히 전향하여 북한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중이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주체사상을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고 단지 북한조선로동당이 추구하는 주체사상은 원래의 사상에서 변질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1]

주체사상을 접하기 전에는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심취하던, 진영론으로 치면 PD계열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2. 생애

1963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마포고등학교를 거쳐 198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에 입학했으나[2], 1985년 8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에 관련돼 지명수배되자 도피하여 제적되었다. 1991년 서울대학교에 복학하여 1992년 2월 졸업하였다.

2.1. 강철서신

1986년 3월에 '우리는 미제(미국) 간첩 박헌영[3]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라는 팸플릿을 시초로 관념적 논쟁에 지쳐 있었던 학생운동권을 강타한 <강철서신>[4][5]의 저자로, 대한민국에 주체사상 이론을 처음 소개한 인물. 당시 강철이란 필명을 사용해서 강철서신이었다. 북측 대남방송과 일본 등을 통해서 얻은 주체사상 서적을 탐독하며 지하조직 운동을 계속하여 198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자생적 주체사상 학생조직인 구국학생연맹(구학련) 결성을 주도했다. 그러나 <강철서신> 발행으로 안기부와 경찰의 1급 추적대상으로 지목되어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그해 11월에는 부산에서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관련자로 안기부에 검거/구속된 바 있었다.

2.2. 밀입북

1988년 형집행정지로 출소된 이후 이듬해 지하조직 '반제청년동맹(반청)'을 결성해 활동하다가 같은 해에 남파간첩 윤택림과 만나 조선로동당에 현지입당했고,[6] 2년 뒤에는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여 평양에서 정식 입당식까지 치러 '관악산 1호'라는 대호(암호명)를 받았다. 5월 19일 조유식[7]과 함께 2차 밀입북 후 김일성을 만나고 17일 후 공작금 20만 달러를 받아서 돌아왔다. 이 공작금으로 1992년 3월에 서울대 82학번 동기인 하영옥, 박준X[8]와 함께 민족민주혁명당(약칭 민혁당)이란 지하당을 조직하고 학생운동, 통일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9] 당시 김영환, 하영옥, 박준X 3인이 중앙위원으로 조직의 핵심지도부였으며 이석기는 경기남부위원장으로 서열 5위 정도였다고 한다.

2.3. 우익으로 전향

그러나 1991년김일성을 만났을 때부터 북한 체제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와 밀입북에 동행했던 조유식은 해주 해안가 시내에서 폐공장같이 버려진 아파트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고 주체사상탑 카펫 바깥으로 가다가 그가 손님인 걸 모르는 안내원이 "왜 정해진 길로 안 가냐"는 말을 들으면서 관료적인 인상을 받았으며 김영환은 김일성을 만난 후 주체사상연구소 학자들과 토론에서 "그럼 당이 잘못하면 누가 그것을 바로 잡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지만 학자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봤고 여기서부터 북한 체제의 한계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환 본인은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잘 몰라서 실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남한으로 돌아와서 주사파 지하조직 활동을 계속 하긴 했지만, 1994년 이후 고난의 행군을 보면서 주체사상에 큰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감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진보잡지 월간 말 1995년 4월호 '반미, 북한 그리고 90년대에 대한 나의 생각'이란 칼럼에서 전향을 공식화했고 1996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 기관지 <자주의 길> 3호에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뀌어야 한다'라는 칼럼을 기고해 NL노선과 결별함을 선언했다.

일설로 방북 때 북한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고 이것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신은 남한의 "혁명 지도자"로 받아들여질 줄 알았지만 북한은 그냥 흔해빠진 장기 말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일성은 이틀 동안 두 번이나 김영환을 만났다. 그것도 자기 별장에서이다. 처음엔 세 시간 반, 두 번째엔 두 시간 정도 길게 이야기를 하며 김영환을 치켜세웠고 이별할 때는 특별히 선물로 권총 두 자루와 미화 40만 달러를 김영환에게 수여했다.링크 특히 첫 번째엔 같이 식사까지 했다. 북한의 절대권력자 김일성이 이런 태도를 보였는데 그 밑 사람들이 장기 말 정도로 대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힘들다. 오히려 그때 김일성과 대화를 통해 북한에 실망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1997년 지도부 투표를 거쳐서 민혁당을 해체하고 자신은 주사파 활동을 중단하였다. 월간 말 1998년 5월호에 <북한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사기극>이라는 글을 기고하고, 훗날 뉴라이트 운동의 토대가 되는 잡지 <시대정신>을 창간하였다. [10]

그러나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하영옥이 조직을 재건해서 이석기 등을 중심으로 민혁당 하부조직[11]은 계속 활동하였고, 1999년 국가정보원에 일제히 검거되면서 김영환도 구속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참조. 1999년 검거 직후 공개적으로 주체사상을 포기한다는 선언과 함께 '준법서약서'를 쓰고 공소보류로 풀려났다.

2.4. 이후

반북 민주화 운동가로 전향해서 북한전문 인터넷신문 데일리NK를 창립해서 주요 필진으로 활동하면서 북한민주화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북한 내부에 지하혁명조직 ‘횃불’을 만들어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 중국에 일시적으로 나오거나 체류하는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한국에서 수년간 쌓아온 조직활동 노하우를 전수해준 뒤 북한에 가서 활동하게 한다고 한다.

대북전단에 대해서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해 전단 살포 실험을 했는데 풍향이 좋을 때도 북한에 가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드론을 쓰지 않으면 실효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고 한다.

2012년 3월 29일 북중 접경지역인 다롄에서 중국 공안에 국가안전위해죄로 체포되어 이후 114일만에 석방되었다. 공안에게 고문행위를 당했음을 폭로했다.

과거 운동권에 대하여 "민중민주(PD) 그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NL 그룹 중 주체사상이 뭔지 제대로 답하는 사람은 100명 중 1명도 안 될 것이다. 이념이 아니라 정서에 기초한 집단이다. 친북, 반미, 반일, 우리민족끼리 따위의 정서가 강할 뿐이다."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또한 "PD 그룹은 이념에 기초한 조직이어서 이념적 토대가 변화하면 결속력도 약해진다. NL 그룹은 이념 자체가 빈약한 대신 인적 유대와 패거리주의가 강하다. 북한 방송에서 나오는 것 그대로 따라 하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그런 문화가 강했다. PD가 엘리트주의적인 데 비해 NL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면 안 된다고 철저히 교육받았다."라고 한다. 인터뷰

엄밀히 말해서 "주체사상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김씨 일가에 의해 변질된 주체사상이 실패했다고 판단할 뿐, 주체철학 자체의 이상은 아직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라고 인터뷰 등을 통해 조금씩 내비치고 있다.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당시 정부측의 증인으로 출석했고 2016년 연합뉴스에선 대북제재가 중국이 형식적인 제재만 하고 뒤로는 북한에 지원을 하기에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는 견해를 내보였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988 - 1995 현지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5 - 현재

4. 여담

5. 저서


[1] 실제로 아직까지 외세로부터 “해방“해야 한다는 등의 주체사상적 단어선택을 보이고 있다.[2]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기들은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82년 학력고사 전국 수석인 원희룡(후일 3선 의원, 제주지사, 국토교통부 장관), 나경원(후일 4선 의원), 조해진(후일 3선 의원), 조국(후일 서울대 법대 교수, 법무부 장관), 김난도(후일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김상헌(후일 네이버 대표이사)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김영환은 다른 이들과 다른 의미로 거물이 되었다.[3] 박헌영은 예상과 달리 적화통일에 실패한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뒤집어 씌워 전쟁 중이던 1953년 미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숙청되었다.[4] 이중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는 동지였던 노동운동가 심진구(1960~2014)가 '박무산'이란 필명으로 지었다.[5] 그런데 김영환은 이 문건을 심진구가 이사하고 나간 자취방에서 주워서는 말도 없이 그대로 '강철'이라는 자기 필명으로 실어버렸다. 이후 심진구가 극심한 고문을 받은 후 오마이뉴스와 취재했는데, 차라리 김영환을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공장으로 보내버렸어야 한다고 푸념할 정도로 그와의 악연을 죽을 때까지 후회했다. #, ##[6] 북한에 가서 정식 입당할 수 없으니 한국 현지에서 입당하는 것. 북한은 남파간첩들에게 현지입당시킬 권한을 주어 한국 내 주사파들을 포섭했다.[7] 인터넷 서점으로 유명한 알라딘 커뮤니케이션의 설립자다.[8] 체포 후 바로 전향하여 수사에 적극 협조하였기에 아직도 신원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9] 그러나 민혁당 그룹은 당시 학생운동 특히 한총련의 주류는 아니었다. 민혁당의 영향력 아래 있던 그룹은 경기남부 지역과 전북 지역에서 '사람사랑' 계열로 활동했는데 이들은 한 번도 한총련 주류가 아니었다.[10] 이때 김영환의 영향을 받던 전북총련은 한총련을 탈퇴하고 '푸른공동체21'을 설립하고 북한민주화운동으로 완전히 돌아선다.[11] 이들은 나중에 경기동부연합으로 이어진다.[12] 정식 출간연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