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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하대의 귀족, 군인. 최고 관등은 이찬. 김헌창의 난과 중국에서 일어난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였다. 9세기 초 신라군을 대표하는 명장.신라본기에 등장하는 김씨이기 때문에 경주 김씨라고 여겨질 수 있으나, 김해 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웅원은 김유신의 현손이며 이를 연구에 반영한 논문도 있다. 만약 김웅원이 김유신의 후손이라면 삼국통일전쟁 이후 백 년이 넘게 지나면서 차츰 권력을 잃었던 가야계 신김씨를 무공으로서 다시 부흥시킨 인물이 된다.
2. 생애
기록상에 그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 제41대 헌덕왕이 재위하고 있던 811년 2월에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인 완산주의 도독으로 부임한 것이다.한편 황해바다 건너 당나라 동부에는 당시 이정기가 세운 제나라가 있었는데, 이사도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었다. 당나라는 전성기가 지나 한때 안사의 난으로 휘청했지만 이때쯤엔 원화중흥(元和中興)이란 중흥기로 잠시나마 여유가 생긴 시점이었다. 당나라는 이사도를 완전히 평정하기 위해 전쟁 준비를 하면서 신라에도 지원군을 요청했다. 신라 헌덕왕은 순천군(順天軍)을 편성해 장군 김웅원에게 3만의 군대를 맡겨서 당나라에 파병을 보냈다. 이사도 토벌에는 젊은 시절의 장보고도 당군 소속으로 참전했지만 김웅원의 신라군과 접촉이 있었는지는 불명.
다만 이사도의 난은 819년 2월에 진압되었는데, 삼국사기 기록상 신라는 5개월 뒤인 819년 7월에야 구원군 파병 의사를 밝혔다고 되어있기 때문에 기록상 모순이 있다. 연도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파병 제스처만 취하고 실제로 당나라에 출진은 하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이사도가 멸망한 것을 모른 채 뒤늦게 병력을 보냈다가 실제 토벌에 참여는 못하고 허탕을 치고 그냥 돌아왔을 수도 있다. 전화도 없었던 시대의 한계상 당시에 바다를 건너는 장거리 국제교류에서는 비슷한 상황이 종종 있었기 때문.[1]
굳이 헌덕왕이 왜 3만이나 되는 신라군을 뜬금없이 당나라 내전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몇몇 설이 제기되었는데, 중국 학자 바이건싱(拜根興)은 나중에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 이유에서도 나오듯이 당시 황해안에서 골칫거리가 되고 있던 신라인 노예 매매 문제 때문에 거기에 적극 개입하려는 의도가 아니겠느냐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3년 뒤 822년에는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웅진성을 중심으로 신라 역사상 손꼽히는 거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초반의 기세는 후삼국시대 못지않게 격렬했다. 웅원은 김균정, 김우징과 함께 신라군 주력 대군을 통솔하여 김헌창 토벌에 나섰다. 국토를 서진해 성산(경상북도 성주군, 옛 성산가야)에서 김헌창군에 큰 승리를 거둔 후 거점 웅진성 근교에서 다다랐는데 목을 벤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웅진성을 10일간 포위해 공성전을 벌였고 궁지에 몰린 김헌창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성이 함락, 이후 논공행상에서 포상을 받았다.
3. 창작물
기록상 이사도 토벌에 참여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장보고 관련 창작물에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이상인저 청소년평전 장보고편에서는 당나라에 지원군으로 왔을 때 당나라 무령군에 신라인 출신 소장 장보고가 있다는 것을 듣고 미천한 해도인이면서 거기까지 오른 능력을 인정하나 신라가 아닌 당에서 일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1] 고대에는 통신이 발달해 있지 않으므로 은근히 이렇게 허탕치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면 보덕국이 신라에 멸망하고 1년 뒤에 일본에서 이미 없어진 보덕국에 사신을 보내거나, 소성왕 즉위 축하 사절단을 당나라에서 신라에 보냈는데 소성왕은 사절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죽는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