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동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1982 |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8번}}} | ||||
팀 창단 | → | 김유동 (1982~1983) | → | 홍신차 (1984~1985) |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54번}}} | ||||
결번 | → | 김유동 (1984~1984.7.1.) | → | 김영신 (1985~1986) |
{{{#b21528 [[삼미 슈퍼스타즈|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18번}}} | ||||
최홍석 (1984~1984.7.1.) | → | 김유동 (1984.7.2.~1984) | → | 장명부 (1985) |
{{{#ffffff [[삼미 슈퍼스타즈|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청보 핀토스]] 등번호 0번}}} | ||||
결번 | → | 김유동 (1985) | → | 김재상 (1991) |
김유동 金裕東 | Kim Yu-Dong | |
출생 | 1954년 4월 9일[1] ([age(1954-04-09)]세) |
충청남도 서산군 (現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서울경동초등학교 (졸업) 동대문중학교 (졸업) 동대문상업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체육대학 (체육학 / 학사)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
소속팀 | 한국화장품 야구단 (1977~1980) OB 베어스 (1982~1983)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1984~1985) |
본관 | 청풍 김씨[2] |
가족 | 배우자 유은희, 장남 김백진, 차남 김무진 |
[clearfix]
1. 개요
2. 선수 경력
1954년 4월 9일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갈산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상경해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26-2번지에 본적을 두었다. 1967년 2월 서울경동초등학교, 1970년 동대문중학교, 1973년 2월 동대문상업고등학교, 1977년 2월 한양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서 뛰다가 1980년 은퇴했다. 이 사이 1976년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돼 제24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등 국제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이후 가업인 건축회사에서 일하던 중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1년 6개월만인 1982년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원년 성적은 타율 0.245, 6홈런, 23타점으로 평범하였다.
6차전에 만루홈런을 날린 김유동 |
정작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계기는 1982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주로 5번 타자로 나온 김유동은 시리즈 6차전까지 줄곧 맹타를 퍼부으며 25타수 10안타, 3홈런, 12타점으로 OB 타선을 이끌었고, 6차전에선 4-3으로 박빙의 리드를 잡은 9회초 2사 만루 상황에 타석에 등장, 이선희의 초구를 잡아당겨 좌월 만루포를 날리며 그 경기에서만 혼자 6타점을 쓸어담았다.
OB 베어스의 원년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1등 공신 김유동 |
하지만 이듬해 허리 부상과 구단과의 마찰[6]로 인하여 불편한 관계가 되면서 1984년 삼미 슈퍼스타즈로 이적했다. 그러나 허리부상이 악화되면서 1985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야구선수를 은퇴했다.
3.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2 | OB | 57 | 155 | .245 | 38 | 8 | 1 | 6 | 23 | 21 | 2 | 6 | .426 | .270 |
1983 | 37 | 111 | .252 | 28 | 3 | 0 | 1 | 7 | 10 | 2 | 7 | .306 | .297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4 | 삼미 | 26 | 81 | .235 | 19 | 4 | 0 | 3 | 10 | 8 | 0 | 1 | .395 | .244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5 | 삼미 / 청보 | 15 | 31 | .129 | 4 | 0 | 0 | 0 | 1 | 2 | 0 | 4 | .129 | .229 |
KBO 통산 (4시즌) | 135 | 378 | .235 | 89 | 15 | 1 | 10 | 41 | 41 | 4 | 18 | .360 | .269 |
4. 은퇴 후
1986년부터 서울특별시 영동시장, 가락시장 등지에서 채소 도매상을 한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지며 다시 한 번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고, 1988년부터는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에 고기집을 차려 쏠쏠하게 돈을 벌었는데...1996년 1월 12일 정치판에 뛰어들어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고, 1월 17일 부평구 을 지구당 조직책 및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해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인천광역시 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신한국당 이재명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97년 4월 16일 자유민주연합 중앙당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그해 5월 29일에는 중앙당 중앙위원회 청년분과 위원장, 7월 1일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8기)에 선임되었다. 11월 14일에는 김대중 제15대 대통령 선거 야권 단일후보 중앙 공동선거대책회의 위원, 김대중 후보 인천광역시 부평구 을 선거대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98년 5월 18일에는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최기선 인천광역시장 후보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해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으나, 공천에서 정화영 후보에 밀려 탈락하자 다시 자유민주연합에 복당했다. 그렇게 어찌저찌 본 선거에는 출마했지만 새천년민주당 최용규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 과정에서 식당 운영으로 번 돈을 대부분 날렸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후 자유민주연합 인천광역시당 대표가 되었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인천광역시 계양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열린우리당 신학용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겨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갑 선거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자유선진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인천광역시 계양구 갑 선거구에 다시 출마했지만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이던 통합민주당 신학용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으로 당적을 옮겨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려 했으나 공천에서 탈락했다.
2007년 두산 베어스의 초청으로 시구자로 나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리공화당 후보들에 대한 지원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5.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인천 부평 을 | [[자유민주연합|]] | 8,851표 (9.80%) | 낙선 (3위)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5,755표 (6.81%)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인천 계양 갑 | 1,736표 (2.48%) | 낙선 (5위)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자유선진당|]] | 3,021표 (5.49%) | 낙선 (3위) |
득표율이 참으로 낮다. 심지어 선거비를 반액이라도 보전받는 10% 득표라도 한 적이 없다. 정치적 호오를 떠나, 한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양당이 아닌 충청기반의 지역정당에서 활동하면서 수도권 출마, 그것도 인천 내에서 민주당-진보정당 지지성향이 강한 부평구와 계양구에서 출마를 강행하다보니[7] 성적이 좋을 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6. 관련 문서
[1] 양력 5월 11일.[2] #[3] 1984년에는 54번을 달았다. 이 번호는 김영신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김영신만 달았다고 아는 사람이 많지만 김유동이 1984년에 달았던 번호이다.[4] 그는 그날 경기 후 인터뷰에서 "경기 전 낮잠을 자다 꿈을 꿨는데 친구 4명과 함께 상갓집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오늘 만루홈런의 예지몽이었는듯?" 하고 소감을 밝혔다 한다. 그런데 김유동은 6차전에서 홈런 2개(2회 솔로, 9회 만루-5타점)를 날렸다. 상갓집에선 절을 두 번 한다는 걸 생각하면...[5] KBS예능프로그램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 공포의 쿵쿵따 프로그램에서 주영훈과 강병규가 김유동이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친 홈런이 만루홈런인지 3점홈런인지 내기를 한적이 있었고 틀린 사람이 김유동 선수에게 꿀밤을 맞는 내기였다. 스태프가 조사한 결과 만루홈런으로 밝혀졌고 촬영장에 방문한 김유동이 3점홈런이라고 주장한 강병규한테 꿀밤을 살짝 때렸다. 여담으로 김유동이 홈런 쳤을 때 공이 떨어진 자리에 주영훈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예능에서도 다뤄질 만큼 김유동에 홈런에 대한 기억이 사람마다 다른지 연장전에서 홈런이 나왔다거나, 이종도에게 개막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허용한 이선희가 홈런을 허용한 덕에 그와 헷갈려 끝내기 홈런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6] 외상 술값이 지나치게 깔린게 화근이었다고 한다(...).[7] 그래도 인천에 충청도 출신이 많은 편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