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01 01:27:26

김종성(1906)



1. 개요2. 사업가 김종성3. 월남 이후4. 재단 설립5. 여생6. 타계

1. 개요

김종성(金琮成)은 학교법인 육하학원의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이다.

2. 사업가 김종성

1906년 대한제국시기 평양부 출생의 사업가, 교육인이다. 김종성은 해방 전 평안북도 박천군 양가면 영미역(경의선) 인근에서 일대 최대 규모였던 삼일백화점의 경영자, 기업가였다. 광복 이후 일제가 남긴 조선제약을 인수하면서 평양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공산정권이 득세한 후, 모든 재산을 몰수당해 항의했으나 돌려받지 못했다. 이후 공산정권 하에 여섯 식구들의 신변을 위협받은 김종성은 1949년 두 아들과 함께 월남한다. [1] 남겨둔 가족[2]에게는 수년내에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으나, 6.25 전쟁이 발생하는 탓에 데려올 수 없는 것은 물론 연락까지 두절 되게 된다.

3. 월남 이후

월남 후 그는 친누나가 살던 충청북도 충주에서 먼저 월남시킨 두 아들과 재회한다. 서울의 친구에게 밑천이 될 돈을 빌려, 1950년 부산에서 행상업을 하며 사업자금을 마련한다. 평양에서 백화점을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사업이 번창했다. 그러나 동업자가 부도하면서 다시 월남 당시와 다를 바 없는 무일푼이 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상경해 공무원 뱃지 공급 계약을 체결해 당시로서는 큰 사업자금이 될 수 있는 금액인 500만원을 확보한다. 이후 1955년에 장남의 결혼을 준비하며 큰 지출이 있었지만, 전쟁통에 고무신 장사를 성공했던 그의 경험을 살려 경제가 어려웠던 50년대에 폭등하는 고무신 수요에 대응하여 사업을 벌였다. 1960년에는 상경하여 마포구 등지에 주유소를 차리고, 운수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시켰다.

4. 재단 설립

그렇게 사업을 확장시켜나가며 마련한 자금으로 '사회를 위해 무언가 남길 만한 일을 하자'는 생각이 들어 1978년육하학원을 설립하였다. 1979년상일여중[3],1980년 상일여고, 1984년 상일고[4]를 개교하여 명문사학재단을 일구어낸다.

5. 여생

6. 타계


[1] 정확히는 아들들은 브로커를 통해 미리 내려보내고, 본인은 1년 뒤에 따로 어선을 타고 강원도 주문진으로 월남한다.[2] 처와 세 자녀들[3] 현재는 상일중학교(서울)로, 남녀공학 전환 및 교명변경이 되었다.[4] 현재의 상일미디어고등학교[5] 북한실상 바로알기 등의 주제로 우수작에 선정된 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논문대회 등의 사업을 주관하는 장학재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