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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2:33:43

모하마드 나지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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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공화국 초대 대통령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제5대 혁명평의회의장
모하마드 나지불라 아흐마드자이
محمد نجیب‌الله احمدزی
Mohammad Najibullah Ahmadzai
파일:mohammad najibullah afghan p.jpg
<colbgcolor=#cd0000><colcolor=#febe00> 출생 1947년 8월 6일
아프가니스탄 왕국 카불
사망 1996년 9월 28일 (향년 49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카불
부족 파슈툰족
직업 정치인
학력 카불 대학 의학 박사
배우자 파타나 나지브
자녀 3녀
종교 무종교 (무신론) (1960년대~1987)
수니파 이슬람 (1987~1996)
정당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경력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초대 대통령(1987 ~ 1992)[1]
1. 개요2. 생애
2.1. 대통령 재임기간 (1987~1992)2.2.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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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1987년 9월 30일부터 1992년 4월 16일까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비록 집권 6년만에 무자헤딘과의 내전에서 패배해 정치적으로 몰락했지만, 1970년대 군주정이 폐지된 이후에 집권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역대 지도자들 중 그나마 영민했던 정치가이기도 해서 2000년대와 2010년대에는 재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집권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미군 철군 시작 몇 달 만에 국민을 저버리고 망명을 가면서 소련군이 철군하고도 4년 가량을 버텼다는 점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세속주의자들에게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

모하마드 나지불라는 1947년 8월 6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한 나지불라는 아프가니스탄 최대 공산주의 좌익계 정당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75년 카불대학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나지불라는, 의사 일을 하면서 인민민주당 당원들과 교류하였다. 이 당시 나지불라는 인민민주당의 주류 분파였던 할크(Khalq)파와 대립하던 파르참(Parcham)파에 속했다. 1978년 인민민주당과 군부내 좌익계 군 인사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후 나지불라는 새로 수립된 인민민주당 공산 정권 아래에서 하위 관리직을 맡게 되었지만 할크파 주도의 파르참파 숙청 당시 부정부패 혐의를 받게 되면서 국외로 망명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나지불라는 다시 귀국했고, 소련군의 침공 아래 새로 성립된 친소계 바브라크 카르말 정권 하에서 비밀경찰 국장 하위 직급인 정치국 고위급 관리로 승진했다. 1986년에는 인민민주당 당수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카르말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하지 모하마드 참카니가 뒤를 이었지만 실권을 장악한 건 나지불라였다. 이후 나지불라는 1987년 9월 30일 정식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2.1. 대통령 재임기간 (1987~1992)

대통령이 된 나지불라는 국호를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으로 변경하고, 사회주의식 경제 체제를 버리고 일단의 시장 경제 체제를 아프가니스탄에 도입했다. 그리고 1978년 공산 정권 출범 이래 사실상 내전 상황에 놓여 있던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한 정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국 내 여러 비공산 정치 세력들과 무자헤딘 반군 측에게 인민민주당 1당 공산 독재 정치 철폐와 연합 정부 수립 등 일단의 유화 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무자헤딘 측은 이러한 나지불라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나지불라의 유화 정책은 실패로 끝났고 결국 정권에 비교적 협조적이고 무자헤딘에게 적대적인 일부 비공산주의 세력들만이 나지불라 정권에 참여했으며,[2] 나지불라 정권 말기이던 1990년에는 무당파 출신의 정치인인 파잘 하크가 나지불라 정권 아래에서 총리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편 무자헤딘에 대한 유화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통령 임기 초반이던 1987년과 1988년에 나지불라는 소련군과 함께 무자헤딘에 대한 토벌 공세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그러던 1988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래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었던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하면서 나지불라의 운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지불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수한다면 아프가니스탄은 끔찍한 피바다가 될 것이라며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아프간 철군 계획을 비난하며 철회를 요청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더라도 현 아프간 정부에 대한 무기 지원 등은 계속해서 이어갈 것이라고 나지불라를 설득했고, 그에 따라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에도 나지불라는 이어지는 소련의 무기 지원 아래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련군이 두고 간 전투기, 전차, 공격헬기, 미사일 등 막대한 무기들과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련의 지원으로 나지불라는 무자헤딘에 대한 강력한 진압 작전에 나서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편 소련군이 철수하고, 무자헤딘 반군과 나지불라 정부군 간 내전이 진행될 무렵, 나지불라는 정권을 공격하는 무자헤딘 세력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갖가지 심리전을 벌였다. 이슬람주의를 이념으로 삼는 무자헤딘 반군들을 흔들고 국민의 민심을 정부 편으로 돌리기 위해 직접 모스크를 찾아가 예배하는가 하면, 자신의 권력에 이슬람주의 성향의 종교 지도자들을 어느 정도 끌어들이기도 하고, 자신은 이슬람을 적으로 돌리지 않으며 본인도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라고 주장하며 공개적으로 자국 내 이슬람 세력들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적대 세력인 무자헤딘 내부에서 반군 간의 내분이 일어난 사실도 간파하여 1989년 6월 잘랄라바드에서 나지불라의 정부군이 내분으로 세력이 약화된 무자헤딘을 상대로 승전을 거두는가 하면,[3] 1989년 2월 소련군 철수 직후에 일어난 수도 카불 함락을 겨냥한 무자헤딘의 1차 공세를 저지시키고, 그 이듬해인 1990년 10월에 있었던 카불에 대한 무자헤딘 측의 2차 공세도 격퇴하여 수도 카불을 방어/사수하는 기염까지 토했다. 거기에 나지불라는 무자헤딘 진압을 앞세우면서 한편으론 무자헤딘에게 평화회담을 제의하거나 또는 무자헤딘 반군병과 간부들에게 항복, 귀순을 권유하여 투항한 무자헤딘 반군을 정부군 소속 민병대로 편입시키는 등의 삼중 전략도 사용하여 무자헤딘 세력들을 압박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현지 사학계에서는 1978년과 79년 이후 아프가니스탄 역대 공산 정권의 독재자들 중 아예 대놓고 무신론 공산주의 노선을 고집하며 이슬람 향촌 세력들을 적으로 만들어 내분을 악화시켰던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하피줄라 아민이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에 의해 집권한 뒤에도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도 무자헤딘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전임 지도자인 바브라크 카르말에 비해 나지불라는 상당히 기민하고 영악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자헤딘과 나지불라 정부군 간의 무력충돌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내전이 장기화되고 사회불안이 가중되자 나지불라는 군대의 힘을 빌어 강압적인 권위주의적 독재 정치를 펼쳤다.

그러던 1990년 일부 정부군 장성 인사들이 나지불라를 축출하기 위해 군사 쿠데타를 모의, 시도했지만 나지불라는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군부의 쿠데타를 진압했다. 특히 나지불라 정권을 겨눈 정부군의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당시 정부군 국방장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샤나와츠 타나이 장관이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밝혀져 당시 나지불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결국 쿠데타 진압 후 나지불라는 타나이 장관을 비롯하여 쿠데타에 가담했던 정부군 장군들을 모두 체포, 해임하거나 사형시키는 조치를 내렸는데[4] 문제는 나지불라가 이 당시 숙청한 정부군 장성의 상당수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 철수 후 일어난 내전에 직접 참전해 무자헤딘과 싸우던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인재들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부재로 인해 1989년까지 잘랄라바드에서 무자헤딘을 상대로 승전할 정도로 굳건했던 정부군의 전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내전의 전세가 무자헤딘 측에게 유리해지는 악영향을 초래했고, 1991년 3월에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 지대에 위치해 있던 정부군 장악도시이자 군사 요충지인 호스트 시를 둘러싼 무자헤딘과 정부군 간의 전투에서 정부군은 참패하고 도시를 빼앗겼다.

하지만 당시 나지불라 입장에서는 이들에 대한 숙군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게 당시 쿠데타를 주도했던 이들은 타라키와 아민의 할크파에 속한 인물들이었고, 이들은 카르말과 나지불라가 속한 파르참파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거기에 파르참파는 할크파가 집권했던 공산정권 초기 시절에 할크파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아프간 전쟁과 무자헤딘과의 내전에서 실전 경험이 있었던 이들 할크파 출신의 정부군 장군들이 쿠데타 혐의로 인해 대거 숙청되면서 나지불라 정부군의 전력이 약화된 것도 사실이며 실전력을 갖추고 있었던 할크파 정부군 장군들이 숙청된 이후 나지불라 정권은 정부군의 모든 전력을 당시 쿠데타를 진압하는데 앞장서며 타나이의 뒤를 이어 신임 국방장관이 된 모하마드 아슬란 와탄자르 장군과 누르 울 하크 울루미 장군, 술탄 알리 케시트만트 전 총리 등 나지불라 정부를 지지하던 군부/정권 내의 소수 파르참/할크파 핵심층들,[5] 마자르이샤리프 등 북부 지역의 정부군 점령지를 통제하고 있던 우즈베크족 출신 지도자 압둘 라시드 도스툼이 이끄는 친정부 민병대를 중심으로 재편해 작전 및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 일을 겪고 난 이후에 나지불라는 남아있던 정권에 대한 군부의 충성파 인사들도 언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을 죽이려고 들지 모를 잠재적 배신자로 생각하는 등 군부에 대한 나지불라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전쟁이 3년 동안이나 이어지면서, 정부군의 민가 약탈과 민간인 학살 같은 만행들과 무자헤딘을 잡기 위한 공군기의 지상공격으로 애꿎은 민간인들이 죽고 다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국민들은 나지불라 정권을 비난하였고, 장기적으로 민심 유지마져 실패한 나지불라 정부군은 1989년 잘랄라바드 전투와 1990년 정부군의 쿠데타 모의 이후에 있었던 여러 전투에서 무자헤딘에게 패퇴에 패퇴를 거듭했으며, 정부군 내부에서도 군에서 탈영하거나 무자헤딘 쪽으로 투항, 전향하거나,[6] 나지불라 정부에게 불만을 느끼는 병사와 장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정국 상황이 안정은 커녕 악화일로를 걷게 되자 나지불라는 대통령직 사임을 여러번 시사하기도 했으나 측근들의 만류와 반대,각하 전시 상황에 사임이라뇨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 정치인들의 부재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고[7] 결국 계속 대통령직에 남았다.

더욱이 엎친데 덮친격으로 1991년 12월 아프간 나지불라 정권의 후원국이었던 소련이 해체되었고, 그 뒤를 이은 러시아의 옐친 정권은 아프간에 대한 모든 지원을 1992년 1월부로 중단한다고 선포했다. 이 때문에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이어져 오던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면서 나지불라 정권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 틈을 노린 무자헤딘은 1991년 연말과 1992년 연초 사이에 수도 카불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주요 거점지들을 장악하며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1992년 4월 무자헤딘이 수도 카불에 대한 대대적인 대공세에 돌입하자 국제연합(UN)은 나지불라를 대통령에서 퇴임시키고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문제는 UN이 나지불라 퇴임 후를 생각하지도 않고 나지불라를 설득·압박하는 바람에 그가 대통령 퇴임 의사를 표명하자마자 나지불라 정권은 순식간에 붕괴되어 장관들은 각자 연줄이 있는 군벌들에게 우르르 붙어버렸고 카불 방위부대와 공항까지 죄다 전향해버렸다. 이 때문에 UN 비행기를 타고 망명할 계획이었던 나지불라는 공항으로 가는 도로 검문소에서 막혀 암호를 요구받는 상황이 되었다. 나지불라는 자신의 통치력이 카불에조차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UN 구역으로 달아났으며 그것이 나지불라 정권의 최후였다.

2.2. 최후

1992년,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뜨리고 카불을 장악한 무자헤딘의 우두머리 중 하나였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과거 자신과 내전을 벌이던 적군의 수장이었지만 그가 한 때 아프가니스탄의 전 지도자였음을 고려, 참작해 나지불라를 보호했다. 한편 정권을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무자헤딘 지도부 인사들은 나지불라와 나지불라의 전임자였던 바브라크 카르말[8]과 모하마드 아슬란 와탄자르[9], 누르 울 하크 울루미 등 옛 친소련 정권의 전직 대통령들과 정부군의 고위급 장성들을 전범으로 기소, 처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마수드 등 당시 일부 온건파 인사들이 이를 반대했다.[10] 동년 5월 아프가니스탄의 부르하누딘 라바니 대통령은 나지불라, 카르말 등 옛 친소 정권 시기의 전직 대통령과 옛 정부군 장성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면서 나지불라는 무자헤딘 정권 아래에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탈레반 세력이 급성장하자 마수드는 카불을 내줄 수밖에 없었고, 마수드는 나지불라에게 같이 카불을 떠나 아프가니스탄 북부 산악지역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으나,[11] 파슈툰족이었던 나지불라는 탈레반도 대부분 파슈툰족이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카불에 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였는데, 탈레반은 1996년 카불을 장악하자 파슈툰이고 유엔이고 뭐고 없이 나지불라를 보호구역에서 끌어냈다. 그리고는 거세시키고 한동안 조리돌림하다 처형시킨 뒤 그 시신을 대통령 궁 앞 신호등에 목을 매달아 험한 꼴을 당하게 만들었는데, 현대사에서 한 나라의 수장으로써는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셈.[12] 비록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라지만 당연히 이런 처분은 이슬람권에서도 비난 성명을 낼 정도로 잔인했고, 탈레반 일부에서도 "저런 건 알라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이 나왔을 정도. 국내에서도 당시 탈레반의 카불 점령을 보도한 대한민국의 모 군사 잡지에 조리돌림당하는 나지불라의 사진이 실린 적이 있었고, 1998년 KBS의 아프간 다큐에서도 교수형된 나지불라의 시신을 그대로 내보낸 적이 있었다. #

살아생전에는 평판이 좋은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지불라가 죽은 이후로도 아프가니스탄은 내전과 빈곤, 부패로 홍역을 치르는 것은 여전했다. 이 때문에 2000년대와 2010년대에 나지불라의 영민함이 주목받아 재평가 바람이 불었고, 탈레반 내부에서조차도 나지불라가 적이었다해도 나라 다스리는 방법은 알았다면서 존경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을 지경이었다.


[1] 모하마드 다우드 칸 시절의 공화국과는 다른 나라이다.[2] 근데 이마저도 인민민주당 세력들이 다수석을 차지하였기에 별 의미는 없었다.[3] 전투 초반에는 무자헤딘이 도시를 통제하던 정부군 세력을 포위전으로 공격하여 도시를 함락시켰지만, 카불 외곽 지역에 주둔하던 정부군 측이 무자헤딘이 장악하고 있던 잘랄라바드 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공격, 점령하고, 도시를 차지한 무자헤딘에게 반격을 가해 잘랄라바드를 탈환했다.[4] 하지만 정작 쿠데타의 가담자들 중 타나이 국방장관은 파키스탄으로 도주/망명했으며, 2022년에 망명국인 파키스탄에서 지병으로 숨졌다.[5] 와탄자르는 할크파 출신이었음에도 파르참파 출신이던 나지불라 정부를 지지했다.[6] 물론 이런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장병들의 무자헤딘으로의 전향과 군 내 탈영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한창이던 카르말 정부 시기에도 존재했다.[7] 나지불라 행정부 아래에서 부통령과 총리직을 역임했던 정치인들이 존재했지만 이들은 나지불라보다 더 나이가 많은 1920~30년대생 노인들이라 내전 상황인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을 이끌만한 인재가 되지 못했다.[8] 그래도 이 사람은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기 훨씬 전에 아프가니스탄을 나가 러시아에서 사망해, 나지불라처럼 맞아 죽지 않았다.[9] 할크파 멤버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한 인물.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멸망 이후 러시아로 망명 갔다가 집세를 내지 못해서 가족들과 함께 쫓겨나, 좀 더 물가가 저렴한 우크라이나 오데사로 이사간 후 그곳에서 56세의 나이로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10] 사실 무자헤딘 역시 1980년대 소련과의 전쟁이나 1989년 소련군 철수 이후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나지불라 정부군과의 내전에서 민간인 학살과 가혹행위, 정부군 포로에 대한 일방적 사살이나 학대와 같은 전쟁범죄들을 자행하던 전적이 있었기에 이들도 전쟁범죄의 책임에서 그렇게 자유롭지 않았다.[11] 주변국 월경을 통한 해외 망명도 권유했다.[12] 독재자들 중에서 이 사람만큼이나 비참한 최후를 맞은 자는 리비아의 독재자인 카다피, 라이베리아의 독재자인 새뮤얼 케니언 도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 하다못해 차우셰스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조차 나지불라보단 곱게 죽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