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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폴레옹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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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AD8E7><colcolor=#000> 프랑스 제국의 황태자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Louis-Napoléon, Prince Impérial
파일:Prince_Impérial,_1878,_Londres,_BNF_Gallica.jpg
이름 나폴레옹 외젠 루이 장 조제프 보나파르트
(Napoléon Eugène Louis Jean Joseph Bonaparte)
출생 1856년 3월 16일
프랑스 제2제국 파리 튈르리 궁
사망 1879년 6월 1일 (향년 23세)
줄루 왕국 울룬디
아버지 나폴레옹 3세
어머니 외제니 드 몽티조
종교 가톨릭 (세례명: 루도비코)
1. 개요2. 생애3. 여담4. 가족관계

[clearfix]

1. 개요

나폴레옹 3세의 장남이자 프랑스 역사상 마지막 황태자. 보나파르트주의자들로부터는 나폴레옹 4세라 불렸다.

2. 생애

나폴레옹 외젠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3세의 황태자였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부친이 폐위당하자 친당숙과는 달리 즉위조차 못한 채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왕립군사학교(RMA)를 수료한 후 영국군에 자원하였다.

이후 줄루 전쟁에 참전했는데[1] 참관인 자격으로 정찰하던 도중 줄루족 전사 40명의 습격을 받았다. 맹렬하게 맞서 싸웠지만 결국 다리와 어깨에 창을 맞고 쓰러져 후사를 남기지도 못하고 전사했다.

줄루족은 자신들의 전쟁 예법에 따라 죽은 자가 이승에 미련을 갖지 못하도록 창으로 열여덟 군데나 찔러 시신을 크게 훼손했는데, 이게 본의 아니게 전 유럽의 분노를 사버렸다. 그의 호위병들도 모두 전사하거나 실종됐으며, 그의 시신은 아버지가 묻힌 세인트 미카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불과 50야드 떨어진 곳에서 영국군 클레이 중위와 그의 병사들은 황태자가 죽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여왕과 황후의 중재로 겨우 풀려났지만 온 유럽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결국 그는 불명예 제대[2]를 당한 후 인도로 쫒겨나듯이 떠나서 7년 후에 봄베이에서 외롭고 비참하게 죽었다.

줄루족은 자신들이 죽인 백인 장교가 보나파르트 황가의 후계자이자 명목상 프랑스의 황태자임을 알고 대경실색했으며,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미 유럽 전체의 화두가 되어버린 주제기도 했고, 그 당시 시대배경을 감안한다면 (비록 전통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영불관계였지만) 무려 '백인' 황태자가 감히 유색인종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해 줄루 전쟁에 박차를 가해 결국 줄루랜드 전체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영국이 황태자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방조하였다는 음모론이 퍼져나갔으나[3] 근거가 없어 사그라들었다. 당시는 베를린 회의를 통해 열강 간의 갈등이 일시적으로나마 봉합된 지 고작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영국 입장에서는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 좋을 것이 없었다. 특히 일국의 황태자를 소위 '야만족'에게 죽게 내버려두는 행위는 아직 귀족적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유럽 외교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외교적 폭거이자 '야만스러운 행위'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빅토리아 여왕은 그가 죽은 곳에 위령비를 세워주었고, 역시 귀족이자 트란스발 총독이었던 영국군의 가넷 월즐리 원수는 황태자에 대해 "용감한 젊은이였으며, 군인답게 전사했다."는 평을 남겼다.

3. 여담

부르봉 왕가앙리 5세의 양자가 될 뻔했다. 다만 진지하게 고려된 것은 아니었고, 앙리 5세의 사정이 숨어 있었다. 프랑스 제2제국이 멸망한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왕당파는 여전히 3공화국에서 유력 정파 중 하나였고, 이들 중에서 왕정복고를 하여 앙리 5세프랑스 왕국군주로 추대하자는 여론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왕당파가 요구한 것은 오를레앙 왕조의 후계자인 파리 백작 필리프를 양자로 삼으라는 것이었다.[4] 하지만 오를레앙 왕조는 예전부터 왕위계승으로 대립하여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파에 동조해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에 찬성한 바 있으며, 7월 혁명에서도 부르봉 왕조의 군주인 샤를 10세를 내쫒고 왕위를 차지한 바 있기 때문에, 오를레앙가에 대한 부르봉 본가의 증오는 대단했다.[5] 이에 앙리 5세는 오를레앙 가문에게 왕위를 물려주느니 차라리 보나파르트 가문이 낫다는 뜻에서 나폴레옹 4세를 양자로 들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앙리 5세는 여러가지 문제(프랑스의 국기를 삼색기에서 백합기로 바꾸는 문제 등.) 때문에 결국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다. 이로써 정치 기반을 잃은 왕당파는 완전히 망했다.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는 이를 두고 "샹보르 백작(앙리 5세)이 프랑스 공화국의 수립자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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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제니 황후는 아들의 참전을 반대했으나 빅토리아 여왕안전을 보장하겠다며 친히 설득해 마지못해 허락하였다.[2] 장교진의 무능함 때문에 전술적으로 대참사가 연달아 일어나 대규모 군제 개편을 하기 이전인 크림 전쟁, 줄루 전쟁, 보어 전쟁 이전의 영국군은 귀족이나 소위 말하는 '있는 집 자식'들이 장교 작위를 매매하여 군 생활을 시작하고, 퇴역할 때 즈음 작위를 파는 전통이 있었다. 때문에 당시 '장교의 불명예 제대'는 귀족이 재산 몰수와 작위 박탈을 동시에 당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처벌이었다.[3] 그밖에도 프랑스 왕당파는 황태자를 국외로 내쫒았던 공화파들도 그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며 비난하였다.[4] 앙리 5세는 자녀가 없었기에 앙리 5세 사후 오를레앙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다.[5] 거기다 앙리 5세 역시 개인적으로 오를레앙에게 핍박을 받았는데, 당초 앙리 5세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카롤리나 공주와 결혼 예정이었으나 이 혼담을 오를레앙 왕조가 가로채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를 루이필리프 1세의 5남 오말 공작 앙리와 결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