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闘, ruby=たたか)]う[ruby(哲学者, ruby=てつがくしゃ)] / Fighting Philosopher> [ruby(西村, ruby=にしむら)] [ruby(修, ruby=おさむ)] / Osamu Nishimura |
본명 | [ruby(西村, ruby=にしむら)] [ruby(修, ruby=おさむ)] 니시무라 오사무 | |
생년월일 | 1971년 9월 23일 ([age(1971-09-23)]세) | |
신장 | 185cm | |
체중 | 105kg | |
혈액형 | A형 | |
출생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도쿄도 분쿄구 | |
학력 | 킨죠가쿠엔([ruby(錦城学園, ruby=きんじょうがくえん)])고교 (졸업)[1] | |
유형 | 테크니션 + 올드 스쿨 | |
시그니쳐 무브 | 엘보[2] 피겨 포 레그락 슬리퍼 홀드[3] 코브라 트위스트[4] 탑 로프 니 드랍[5] | |
피니쉬 무브 | 미사일 킥[6] 문설트[7] 더블암 수플렉스 리버스 인디안 데스락 스피닝 토 홀드[8] | |
별명 | 자유인 ([ruby(自由人, ruby=じ ゆうじん)]) 미스터 무아 (ミスター[ruby(無我, ruby=む が)]) 무아의 전도사 ([ruby(無我, ruby=む が)]の[ruby(伝道師, ruby=でんどう し)]) 싸우는 철학자 ([ruby(闘, ruby=たたか)]う[ruby(哲学者, ruby=てつがくしゃ)]) | |
테마곡 | FLYING HIGHT AGAIN (1991 - 1995) ヴァイオレンス・ウィンド 〜[ruby(超翔, ruby=ちょうしょう)]〜 (1995 - 1998)[9] [ruby(無我, ruby=む が)]GOVERN - 스즈키 오사무 (2010 - 2011) HEAVEN KNOWS[10] (1998 - 2010, 2011 - ) | |
데뷔 | 1991년 4월 21일 (19세) 오키나와현 이토만시 니시자키종합체육관 신일본 익스플로젼 투어'91 6일차 vs 이이즈카 타카유키 | |
SNS | 블로그 사이트 | |
주요 커리어 | IWGP 태그팀 챔피언십 2회 IWGP 캐치 오브 더 랭커셔 토너먼트 우승 (1996년) G1 태그 리그 우승 (2003년) IWGP 트라이애슬론 서바이버 리그 우승 (2002년) CWA 서브미션 슛파이팅 챔피언 1회 GWF 라이트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IWW 원 나잇 토너먼트 우승 (1998년) WNC 챔피언 1회 NKP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3회 FC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챔피언 1회 !Bang! TV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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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프로레슬러 겸 정치인. 현 분쿄구의회 3선 의원.2. 커리어
여행을 좋아하는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니시무라는, 야구, 배구 등을 해오다 킨죠가쿠엔고교 시절에 야마모토 코테츠가 열였던 신일본 프로레슬링 학교[11]에 입문한 뒤 졸업 후인 1990년 4월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문하게 된다.1991년에 신일본 오키나와현 원정에서 이이즈카 타카유키와의 경기를 통해 데뷔전을 치러 이이즈카 타카유키의 서브미션에 걸려 패하고, 이후부터 야마모토 히로요시, 카네모토 코지, 오하라 미치요시와 자주 경기를 벌이나 그들에게 각각 패하고 다녔다. 계속 연패행진을 이어나가다 7월 17일루모이시 흥행에서 자신보다 3달 늦게 데뷔한 코지마 사토시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첫 승리를 거워 연패에서 탈출하게 된다.
매주마다 이전에 상대했던 선수들과 경기를 가지다가 새로운 상대들과도 경기를 벌이게 되고, 1993년에 제 4회 영 라이온 컵에 출전해 준결승까지 진출했으며, 준결승전에서 나카니시 마나부를 꺾지만 결승전에서 야마모토 히로요시에게 패하며 우승에 실패했다.
나가타 유지, 오오타니 신지로와도 자주 경기를 벌이다가 서양 레슬러들과도 경기를 가지는 일도 생기고, 사이토 아키토시와의 경기에서 패한 이후 8월 20일에 무사 수행을 떠나 미국 플로리다로 활동지를 옮기게 된다.
NWA 활동을 하던 중 GWF에 출연해서는 알렉스 포르토를 꺾고 첫 챔피언 경력을 만든다. 미국 각 단체를 돌며 활동하던 도중에 1994년 11월쯤 신일본에서 귀국 명령이 나왔지만 더욱 미국에서 있고 싶었던 니시무라는 이를 거부했다. 그 댓가로 신일본으로부터의 생활금 송금이 정지되었음에도 1995년 1월에는 뉴욕으로 본거지를 이전하여 ECW에 출연하고, 이후 네덜란드, 영국 위건, 그리스 등을 도는 등 매우 자유로운 행보를 보인 후[12] 귀국 명령 1년 뒤인 95년 10월 10일이 되서야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다시 신일본에서 활동하며 같은 일본 레슬러들 외에도 해외에서 방문한 서양 레슬러들과도 경기를 벌이게되고, 1997년 중순에 다시 해외진출을 하며 오스트리아의 CWA를 포함해 독일의 VDB에도 출연하고, 1998년에 잠시 신일본으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해외 원정을 가면서 잠시 독일의 IWW에서 경기를 가지게 된다. 이 해 G1 클라이맥스에도 처음으로 출장했으나, G1이 끝난 이후 검진에서 후복막종양(암) 판정을 받으며 수술 및 치료를 위해 선수 생활을 쉬게 된다. 이 때 거주지도 아예 플로리다로 옮겼고,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치료에 전념했다.
1년 반 후인 2000년 6월 복귀한 니시무라는 '자유인'이라는 별명답게 매일 자신의 기량 향상을 위해 해외 원정을 떠나는 일이 많았고, 신알본 활동을 하며 매번 챔피언 경력을 만들지 못하다가 2001년에 후지나미 타츠미와 팀을 이뤄 텐코지(코지마 사토시 & 텐잔 히로요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IWGP 헤비급 태그팀 챔피언에 등극하며 일본에서도 챔피언 경력을 만든다.
2002년에는 멕시코의 CMLL에도 잠시 출연하고, 프로레슬링 NOAH에도 첫 출연하며 시가 켄타로와도 경기를 갖지만 시간 경과로 인한 무승부로 끝난다.
2003년에 가끔씩 해외무대에 출연해서 미국의 IPW, Funkin' Conservatory, 독일의 EWP에서 경기를 갖고, 신일본에서 열린 G1 태그 리그에 텐잔 히로요시와 출전해 결승전에서 TOA & 타카야마 요시히로를 꺾고 우승한다. 몇달 후 타나하시 히로시 & 요시에 유타카를 꺾고 통산 2회 IWGP 태그팀 챔피언에 오른다.
2004년에 잠깐 미국의 Funkin' Conservatory에서 경기를 갖다가 신일본에서 활동을 하던 중 전일본 프로레슬링에도 출연하기 시작하면서 무토 케이지와 경기를 갖지만 패하고, 그 후로 신일본 프로레슬링 활동 외에도 전일본 프로레슬링에도 출연하는 일이 늘며 두 단체를 병행하며 활동한다.
계속해서 일본과 해외 활동을 오가며 활동하던 니시무라 오사무는 2006년에 야마모토 나오후미와 팀을 이뤄 마카베 토우기 & 야노 토루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끝으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퇴단하면서 FA가 된다.
잠깐 미국의 CHIKARA에 출연해 타케무라 카츠시와 같이 태그팀 경기에 출전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신일본을 퇴사한 후지나미 타츠미, 히로 사이토, 고토 타츠토시와 같이 무아 월드 프로레슬링을 창설하고 소규모 대회를 개최하고 더불어 타단체인 EWE에서 활동하다가 NOAH, HUSTLE에서도 경기를 가지고, 2007년부터는 무가 월드 프로레슬링을 퇴사하고 무아의 동료 레슬러인 소야 마나부와 함께 전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으로 활동한다.[13]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하면서 가끔씩 해외활동을 하는 것은 변함없었는데, 2009년 3월 22일에는 한국에 내한해서 신한국 프로레슬링에서 열린 NKPWA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매치에서 윤강철, 크리스찬 엑스타인을 상대로 트리플 쓰렛 매치를 벌이나 윤강철이 승리를 거두면서 챔피언 등극에 실패한다.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을 이어나가다가 2011년에 고향 분쿄구의 구의회의원 선거에 나갔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후치 마사노부 & 나카노우에 야스후미와 팀을 이뤄 BUSHI & 하마 료타 & 아론 아길레라[14]를 상대로 패한 것을 끝으로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퇴단, 4월에 분쿄구의원에 당선되는 데 성공했으며 6월에는 16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다.
FA가 된 후로도 프로레슬링 활동을 이어가며 전일본 프로레슬링, 신일본 프로레슬링 외에도 단체 합동무대에도 출연하며 경기를 가지고, 2012년에 대일본 프로레슬링(BJW)에도 출연하면서 타니구치 유이치와 팀을 이뤄 오오타니 마사시 & 이시카와 신야를 상대로 패하지만 이시카와 신야와의 싱글 경기에선 승리를 거둔다. 이후로 이시카와 신야와 같이 태그 리그에 출전해 결승전까지 진출하며 오카바야시 유지 & 시노부를 상대하지만 패하면서 우승하는데 실패한다.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의 활동이 다시 늘며 다른 단체에서도 활동하고 2020년이 돼서도 이어지며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포함해 다른 단체들에서 경기를 가지며 VAMOSTAR에서도 활동하는 많아지면서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의 출연도 가끔씩 출연하는 수준으로 변하고 그 밖에 NOAH 및 DDT 프로레슬링에서도 경기를 가지며 베테랑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3. 인생의 위기를 맞이하다
2024년 4월, 식도암 4기를 진단받고 일본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암 병원에서 투병에 들어간 사실이 알려졌다. 발견 시점에서 이미 왼쪽 상반신 전체에 암이 전이된 심각한 상황이었으며, 뇌로까지 전이되어 7월 어느날에는 병원 안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뇌종양으로 인해 경련하면서 실신하여 집중치료실에 보내지기까지 했었다.[15]그 와중에도 아내와 5살밖에 안 되는 아들을 위하여 식사를 정상적으로 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체력을 온존하기 위해 식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94kg까지 떨어졌던 체중을 104kg까지 다시 증량했고 상반신에 퍼진 종양을 70% 감소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8월 24일, 5개월 만에 테리 펑크 1주기 추도 & 오니타 아츠시 데뷔 50주년 기념 대회로 후지쯔 스타디움 카와사키에서 열린 '카와사키 전설 2024'의 메인이벤트에서 테리의 형이자 자신의 스승인 83세의 도리 펑크 주니어와 함께 출전하여 오니타와 라이진 야구치 팀을 상대로 전류 폭파 데스매치를 치렀으며, 여기서 스승 도리와 자신의 전매 특허인 스피닝 토 홀드로 라이진에게 직접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6]
9월에는 의회에도 재출석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10월에 다시 쓰러져 검사를 받았고 왼쪽의 전두엽에 뇌종양이 재전이되었다는 것이 판명되어 개두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 다시 트레이닝을 시작하는 등 대단한 의지와 회복력을 보여주며 12월 8일, 요코하마시의 츠루미 청과 시장에서 열린 FMWE홈 제12전 2024연내 최종전~TO DO IS TO BE~의 메인 이벤트, 노 로프 가시철선 + 거대 전류폭파배트 데스매치에 타케무라 카츠시 & 아오키 신야와 함께 출전해서 오오니타와 라이진, 맘모스 사사키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 여담
- 토니 세인트 클레어[17]의 제자이며, 그 밖에 야마모토 코테츠 & 하세 히로시 & 사사키 켄스케 & 후지나미 타츠미 & 히로 마츠다 & 돈 저딘[18] & 칼 고치[19] & 도리 펑크 주니어에게서도 트레이닝을 받았다.[20]
- 도쿄도 분쿄구가 고향인 현역 분쿄구 3선 의원으로, 외삼촌할아버지[21]가 5선 분쿄구 의원이었던 호소다 히코이치(細田 彦一)라고 한다.
- 친형이 빅토리아[22]에서 일하고 있었던 영향도 있어서, 가장 큰 취미 중 하나는 스노우보드 타기라고 한다. 30년이 넘어가는 경력을 자랑한다.
- 럼주와 시가도 좋아해서, 쿠바에서 자주 흥행을 열어보는 것이 최대 목표 중 하나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와 같이 애주가 겸 애연가였으나 2024년 식도암 투병 시작 이후 치료를 위해 모두 끊게 되었다.
- 1998년 후복막 종양(암)을 앓았을 때, 요양을 위해 아예 미국 플로리다를 생활 거점으로 삼은 후, 다녀온 나라만 26개가 넘어갈 정도로 세계 곳곳을 방랑했다.[23] 본인도 가족이 없을 때는 파이트 머니의 거의 전부를 비행기비와 호텔비로 사용했다고 했으며 이로 인해 비행기 방면 지식도 상당하다.
- 1997년 가을, 독일 브레멘 원정 당시 현지의 여성을 만나 사귀게 되었고, 귀국한 뒤로도 계속 국제 전화로 데이트를 이어왔는데, 말도 달라서 더듬더듬 얘기하느라 매일 2~3시간동안 전화했더니 첫달에 무려 150만엔, 두번째 달에 50만엔으로 두 달만에 200만엔의 청구서가 날라왔다고 한다. 결국 이 여성과는 헤어졌지만 2005년에 친구로 재회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니시무라가 웃으면서 말하길 "싸움과 사랑을 확인하는 작업에 꽤나 돈을 썼네요"라고...
-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SANADA와는 17세나 차이나지만, 인생관, 취미 등등 거의 모든 취향이 일치하는 나이를 초월한 친분으로 유명하다. "영화는 007 시리즈, 음악은 80년대, 차는 캐딜락"이라고.[24] 맥주를 잘 안 마시고 위스키를 좋아하는 것과, 여행을 할 때 신칸센을 잘 안 이용하고 일부러 천천히 여행 시간을 보내는 취향까지도 일치하다고 한다. 2023년 4월, 그때까지 금발과 수염을 유지하던 SANADA가 수염을 깎고 흑발로 변신한 것도 니시무라 오사무가 SANADA에게 과거 시절의 사진을 보내며 '이때의 SANADA는 기세를 타고 빛났었다'라고 말했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 도쿄에서 택시에 스마트폰을 두고 내린 니시무라가 택시 회사에 연락했음에도 폰을 찾지 못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그 전화를 받은 것은 다름아닌 SANADA였다. 알고 보니 니시무라가 탔던 그 택시에 SANADA가 바로 다음에 탔고, 눈에 익은 친한 형의 폰을 발견한 SANADA가 폰을 갖고 있었던 것.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SANADA가 쩔쩔매고 있던 타이밍에 니시무라가 전화를 걸어와 타이밍 좋게 전화를 찾아줄 수 있었다고 한다.
- 구의원 당선 이후인 2011년 6월, 도쿄 내의 백화점에서 일하던 16세 연하의 아내 사이토 메구미(齋藤 恵)와 결혼했다. 슬하에는 40대 후반에 얻은 아들(2018년생)이 있다.
- 의원 활동을 하면서 식육 지도자 및 소년 야구팀 코치도 하고 다닌다.
5. 둘러보기
역대 월드 태그 리그 우승자 | ||||
2001 | → | 2003 | → | 2006 |
텐코지 코지마 사토시 & 텐잔 히로요시 | → | 텐잔 히로요시 & 니시무라 오사무 | → | 나카무라군 쵸노 마사히로 & 나카무라 신스케 |
[1] 도쿄도 치요다구 칸다 소재. 1880년 개교로 동문 중에는 정치가, 학장 등이 많다. 이곳 출신의 같은 업계인으로는 DDT 프로레슬링의 히라타 카즈키가 있다.[2] 상대의 목을 잡아 최대한 수그려 놓고 몸통의 회전을 이용해 타격 순간 몸통을 돌리면서 빠르게 치며, 마치 유로피안 어퍼컷같이 들어간다. 기본기지만 도리 펑크 주니어에게 직접 전수받은 니시무라의 상징 중 하나이다.[3] 상대를 로프반동 시켜두고 돌아오는 상대를 팍 낚아채는 방식을 애용한다.[4] 전성기에는 개발자인 안토니오 이노키만큼 폼이 좋다는 평을 받았다. 상대를 로프반동 시켜놓고 반대 쪽으로 달렸다가 링 가운데에서 상대를 순식간에 집어서 사용하는 등 올드스쿨의 달인다운 모습을 보여준다.[5] 올드스쿨을 지향하는 니시무라의 몇 안되는 공중기.[6] 신인 시절에 사용하던 주무기. 발을 접었다가 상대를 찰 때 딱 펴면서 상대를 찼다.[7] 무사수행 출발 전에는 무토 케이지에게 전수받아 피니셔로 썼으나, 다녀오고 나서는 니시무라 본인이 추구하는 스타일이 크게 변해서 올드 스쿨 스타일로 변한 것도 있어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8] 기술 개발자인 도리 펑크 시니어의 아들이자 자신의 스승인 도리 펑크 주니어에게서 전수받은 기술. 니시무라의 올드 스쿨을 상징하는 전가의 보도이다.[9] 바이올런스 윈드~초상~. 해외 무사수행 복귀 이후 사용했던 곡.[10] 니시무라 오사무의 상징곡. 프로레슬러 테마곡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질적인 곡이지만, 팬들에게 수수하지만 멋진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11] 1988년 4월 야마모토 코테츠가 설립했으며, 프로레슬러 지망이지만 신장이 모자라다던가 경력이 부족한 프로레슬러 지망자를 야마모토 코테츠가 직접 가르쳐서 데뷔시키기 위해 설립되었다. 약 2년간 유지되었으며, 니시무라 본인을 비롯해 '도호쿠의 영웅' 더 그레이트 사스케, '맹우' 텐잔 히로요시,'파직파직 파이터' 이케다 다이스케 등이 여기 출신이다.[12] 이 때, 영국 위건에서의 짐에서의 생활을 당시 신일본 사장 겸 선수 후지나미 타츠미에게 중도 보고했는데, 후지나미도 이에 굉장히 흥미를 느꼈고 위건에서 둘이 함께 훈련한 적도 있다. 이 경험은 나중에 후지나미와 함께 무아 월드 프로레슬링을 만드는 본바탕이 되었다.[13] 무아 월드 프로레슬링은 니시무라 오사무가 '무아'라는 상표명을 소유하고 있어서 2008년 1월 1일부터 후지나미 타츠미에 의해 드라디션으로 단체명이 변경되었다.[14] WWE에서 헤수스로 활동한 레슬러.[15] 병원 내여서 다행이었지, 외부였으면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한다.[16] 의료진은 당연히 허가하지 않았으나 의지가 굳건한 니시무라를 말릴 수가 없어, 링 사이드에서 의료진 4명이 대기하는 조건 하에 허락되었다.[17] 영국출신 프로레슬러.[18] 캐나다 출신 프로레슬러.[19] 벨기에 출신 프로레슬러. 별명은 '프로레슬링의 신'.[20] 니시무라 오사무의 경기스타일은 원래 몸의 부드러움을 이용한 관절기나 브릿지를 사용한 기술이 많다. 또 고치, 이노키, 후지나미를 원류로 한 스트롱 스타일 레슬링을 중심으로 미국시대에 신세를 진 히로 마츠다 & 도리 펑크 주니어의 기술을 이어받아 사용하고 있다.[21] 니시무라 오사무의 할머니의 오빠.[22] 일본의 겨울 스포츠 용품 회사.[23]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독일,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튀르키예, 스웨인, 모로코, 이집트, 미국, 캐나다, 바하마, 자메이카, 대만, 홍콩, 태국, 싱가포르, 몰디브, 스리랑카, 인도 등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방랑을 해 왔다.[24] 니시무라 오사무는 구의원 당선 이전 애차가 캐딜락이었고, SANADA는 집안의 차가 캐딜락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