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87년 3월 15일 교토부 아야베시에서 당시 21세였던 니시야스 요시유키(西安義行)가 실종된 사건. 생존해 있다면 현재 [age(1966-01-01)]세.2. 전개
이 사건의 당사자인 니시야스 요시유키는 고등학교 졸업 후 희망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무직이었지만 열심히 취직 잡지를 읽고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고 있었던 청년이었다. 그는 평소 낚시를 즐겼으며 종종 교토의 마이즈루로 드라이브를 나갔기 때문에 실종된 날도 효고현 이치지마쵸(현 탄바시)의 자택을 나와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인 이시카와 야스시(石川靖)와 함께 마이즈루를 향해 드라이브를 나가는 참이었다. 이시카와는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아 니시야스가 운전하였고 "바다를 보고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특별한 점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저녁이 되어 교토부 아야세시 JR 아야베역 근처에서 니시야스는 "열차로 돌아가겠다"고 차에 내렸고 약 1시간 뒤 카스가쵸(현 탄바시)에서 이시카와의 집으로 "무사히 도착했어?"라는 전화를 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후의 행적을 알 수 없다.
3. 꺼림칙한 사건들
니시야스의 실종 후 여러번의 불길한 일들이 일어났다.- 1987년 5월 어머니인 히사코에게 전화가 걸려왔는데 작은 목소리로 "나 학교 옆"이라고 하면서 떨고 있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요시유키지?"라고 말을 걸었으나 곧 전화가 끊겼다.
- 실종된 지 1년이 지난 1988년 자택으로 나고야의 중앙 우편국 소인으로 전화번호가 적힌 낙서가 날아왔는데 이 번호는 없는 번호였다.
- 실종 6년째인 1993년 3월경 여자아이의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노래 부를테니까 들어줘"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윽고 "초롱불에 등불을 켜요...(明かりをつけましょ、ぼんぼりに…)"라는 동요[1]를 불렀는데 문득 히사코가 "잘 부르는구나. 네 아버지는 요시유키니?"라고 묻자 대답이 없다가 이내 전화가 끊어졌다.[2]
- 실종 11년째인 1998년 요시유키가 살던 도시의 구청장 집으로 노동자용 작업화를 신은 남자 2명이 나타나 "니시야스 요시유키 3건의 부모 집은 어디인가"라고 물어 왔다. 이 구청장(현재는 고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을 '요시유키가 결혼할 상대의 근처에 사는 자들'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 2011년 11월에는 여자아이에게서 "케이코 씨는 안 계신가요?"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부재중임을 알리자 전화는 끊겼다.
4. 납북의 가능성
이유 없이 실종된 후 종적을 감춘 사건이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까지 드물게 있었던 북한의 납북 일본인으로 추정한 사람들이 있었다. 요시유키는 납북된 실종자들을 조사하는 '특정 실종자 문제 조사회' 명단에 올라와 있으며 일본 경찰 측의 '납북의 가능성을 지울 수 없는 사안에 관련된 분들'의 명단에 들어가 있지만 이 명단은 북한의 경제 사정이 매우 안 좋아져 일본인을 납치할 이유도, 여력도 없어진 1990년대 이후의 실종자들도 전부 납북으로 간주하는 등 미해결 실종 사건이면 넣어 놓았기 때문에 의미는 없다. 공식적으로도 “아주 낮은 확률이더라도 납북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2013년 '특정 실종자 문제 조사회'에서 북한의 평양에서 니시야스로 추정되는 인물의 사진을 공표했다.
실종 전 찍은 사진.
평양에서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함께 발표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 '특정 실종자 문제 조사회'는 이 사진을 6년 전에 입수했으며 2000년 전후로 평양 주변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
* 사진의 남성은 거의 틀림없는 일본인.
* 원본 사진은 뒷배경이 지워지지 않았다.
5. 남겨진 가족들
니시야스가 사라진 지 [age(1987-03-15)]년이 지난 현재도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2014년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인 이치로는 "27년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니시야스를 그리워했으며 당시 취직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력서의 정보를 누군가 빼서 직장을 구실로 납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가족들은 "요시유키가 북한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것이라 믿고 싶다. 살아있다고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절망하면 끝난다."고 이야기하면서 "요시유키의 안부를 알고 싶고 가족이 있다면 함께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졌다.
[1] 'うれしいひな祭り(즐거운 히나마츠리)'라는 제목의 1936년에 나온 동요.[2] 몇 년 전 아다치 토시유키 행방불명 사건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같은 범인 또는 집단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