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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04:59:31

대만 실업 야구

대만의 야구 리그
<rowcolor=#00437a> 구분 명칭
프로 중화직업봉구
실업 대만 실업 야구


1. 개요2. 상세
2.1. 프로 입단
3. 주요 대회4. 참가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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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봉구협회(中華民國棒球協會)에서 관할하는 대만의 아마추어 성인 실업 야구 체계. 주로 대학 야구와 함께 묶여 成棒(成人棒球)으로 불리며 실업 야구만 따로 묶어서 칭할 때는 業餘棒球라고 한다.

대만 프로야구는 중화직업봉구대연맹이 관할한다. 봉구는 야구를 의미하며 직업봉구는 프로야구를 의미한다. 대한야구협회-KBO의 관계와 유사하지만 대만은 야구협회의 실질적 권한이 막강하다.

2. 상세

일본의 사회인 야구처럼 드래프트에 미지명된 프로지망 선수들은 여기 입단하곤 한다. 수준은 프로 2군 수준에 못 미치며 버는 돈도 일반 직장인 수준이다.

한국에는 한 때 팝콘 리그라는 세미프로 리그가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팝콘 리그는 실업 야구대회 중 하나일 뿐이며 프로 리그와 맞대응 할 상황도 아니다. 더구나 팝콘 리그는 방송사에서 만든 대회인데 과거 방송사가 중계권에 욕심 내서 타이완메이저리그(TML)라는 별도 프로 리그를 창설해서 CPBL과 TML 모두 공멸한 흑역사도 있거니와, 현존하는 프로 리그 CPBL도 그럭저럭 버티는 실정이라 이에 대항하는 리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2018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팀이 대만에 패배한 이후 팝콘 리그를 대만 실업 리그 자체로 지칭하는 신문 기사나 블로그가 많은데 분명한 오류다.

대만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실업팀들이 프로로 전환하면서 실업 야구가 급속하게 위축되었다. 90년대 초반까지는 8개팀이 존속하고 있었으나, 1992년 올림픽 은메달로 야구붐이 일어나 쥔궈건설(쥔궈베어스)과 중국시보 야구팀이 1993년 프로로 전환하였다. 1997년 중신 야구단의 프로 리그 가맹이 통과되고 프로 가맹이 거절된 셩바오 자이언츠는 아예 타이완메이저리그(TML) 창설을 주도하여 실업에서 나갔으며 퇴역군인사업처(榮工處,RSEA)야구단도 TML과 합작 및 민영화에 따라 1998년 해체하게 된다. 이 당시 프로팀만 11개가 되면서 실업 야구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실업팀에서 프로로 전환하지 않은 합작금고와 공기업인 타이완전력 그리고 국군팀까지 고작 3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과는 다르게 원래 프로 출범 이전부터 대학팀들이 일부 실업 대회에 참여하고 있었고 이후 대학팀들의 참여를 늘려나갔기에 실업 리그가 붕괴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더구나 대학팀들이 실업팀을 꺾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중국문화대학은 대표적인 대학 강팀으로 프로 출범 전인 1980년대부터 실업 야구 대회에 참여하여 실업팀을 꺾는 팀이었는데, 이런 역사가 있기에 기업들이 명명권 형태로 대학팀에 후원하면서 실업팀과 공존해왔다.[1]

실업팀 3개와 대학팀 체제로 유지되던 실업 야구는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는데 지자체팀 창단이다. 2008년 CPBL에서 블랙미디어사건이라 불리는 승부조작 스캔들로 프로팀이 4개만 남게 되었다. 이에 대만 야구계는 실업 야구 부활을 시도하였는데, 연쇄적인 스캔들로 기업들은 야구계에서 발을 빼고자 해 지방정부와 연계해 실업팀을 대거 창단한다. 이후 실업팀 창단은 지속적으로 늘어 2021년과 2022년 핑둥훙웨이와 랩터보가 각각 창단하여 현재 실업팀은 11개 구단이다.

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2010년대 들어서는 오히려 대회가 줄줄이 폐지되고 있다. 1998년 창설된 협회장배(協會盃)는 2020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단기 이벤트성 대회도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어 여름에 1주일 정도 진행되는 이벤트 대회가 있을 뿐이라, 매해 팀 마다 50경기 미만의 정식 경기만을 치르고 있다.

대만에서는 고교 졸업 후 프로로 진출하지 않는 사례가 제법 있다. 2018년 아시안 게임에서 양현종을 상대로 홈런을 뽑아낸 린자유의 경우 프로에서 지명을 받았음에도 실업 리그에서만 활동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또한 고교 시절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선수들은 해외진출 후 대만 복귀가 자유롭기에 프로 지명을 거부하고 미국이나 일본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많고 대학야구도 어느 정도 활성화 되어 있어, 고고 졸업 후 선택의 폭이 넓다. 더구나 야구는 대만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는 종목이라 야구 저변도 상대적으로 넓은 편이다.

여기에 국가대표 선수 선발 권한을 가지고 있는 협회와 프로연맹인 CPBL의 힘겨루기가 대단한 것도 특징이다. 극단적으로 협회가 CPBL 소속 프로선수를 배제하고 해외파와 실업 리그 선수만으로도 로스터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KBO의 협조 없이 국가대표 구성이 불가능한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다. 국제대회를 다수 개최하고 국가대표 대항전을 중시하는 대만 야구계 분위기상 프로 연맹인 CPBL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기도 어렵다. CPBL과 일본 NPB는 교류가 활발하여 양 측간 친선경기를 자주 갖는 편인데, 이 때 일본 프로야구 선발팀은 무조건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나오지만, CPBL은 야구협회의 협조를 얻지 못해 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한국과 비슷하게 2017년까지는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 상비군인 궈쉰대표팀(國訓中心棒球代表隊)이 실업 야구에 참여하였다. 팀 명은 국가대표선수촌에서 따왔지만 육군야구단의 후신으로 한국의 상무야구단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국가대표팀과 동일한 유니폼을 착용했던 팀으로 2017년 군 의무복무 폐지에 따라 해산되었다.

2.1. 프로 입단

그래도 일본의 사회인 야구 기업 구단과 비슷하게 실업팀을 거쳐서 프로에 가는 선수들도 꽤 많고 일본처럼 대졸+실업 경력자와 고졸+실업 경력자 등으로 나뉘는 것도 같으며, 지명을 못 받아서 실업 야구에서 드래프트를 N수하거나 프로에서 방출당해서 실업 야구로 돌아가는 선수도 꽤 있다.

또한 사회인 야구에서 30살까지 버티다가 뒤늦게 프로에 갔던 쿠사노 다이스케같이 극단적인 사례로 퉁이 라이온스린주지에처럼 대졸+실업 야구 6년을 하고[2] 드래프트에서 지명이 안 돼서 육성선수로 28살에 프로에 데뷔하는 사례도 있다.

이 외에 해외진출했던 선수들이 CPBL 드래프트 전에 잠시 실업팀에 소속되었다가 들어가는 경우들이 있다. 아직 독립리그가 없는 대만에서는 해외진출했다가 대만에 돌아올 때 일종의 징검다리격으로 실업팀에 입단하는 것이다. 이런 케이스로는 천관위, 우넨팅이 있다.

3. 주요 대회

4. 참가 구단

중화권에서는 야구를 봉구(棒球)라 칭하며, 봉구대(棒球隊)는 야구단을 칭한다. 실업 리그이므로 지역연고제 없이 전국을 순회하며 경기를 가지며, 지역명이 붙은 팀은 지방정부의 후원을 받거나 지방정부 주도로 창단된 구단이다.


[1] 신협상무를 생각하면 되는데 현재 기준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대만맥주가 국립체육대 야구팀의 명명권을 구입하여 대만맥주 국립체육대로 참여하고 있다. 이전에 국립체육대 명명권을 행사하던 기업은 푸방 가디언스 창단 전의 푸방그룹이었고, 웨이취안 드래곤스도 원래는 명명권을 구입하여 1970년대 웨이취안 문화대학으로 시작하였다. 현재 문화대학은 한 때 CPBL 창단 루머가 돌던 메이푸가 명명권을 행사하고 있다. 대학리그 최상위팀들은 기업에 명명권을 주어 후원을 받고 있다.[2] 단 이 실업 야구에는 육군 야구단 1년이 포함되어 있다.[3] 1933년 중국농업은행으로 개업하였으며 1935년 중국농민은행으로 개칭하였다. 베이징에 본점을 둔 중국농업은행과 모체가 같았다. 대만으로 옮겨간 조직은 1999년 민영화 되었다가 2006년 합병으로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