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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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24대 군주 Demetrius III Eucaerus 데메트리오스 3세 | ||||
<colbgcolor=#000> 출생 | 미상 | |||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키아 | ||||
사망 | 기원전 87년 이후 | |||
미상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96년 ~ 기원전 87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제호 | 데메트리오스 3세 에우카에로스 Demetrius III Eucaerus | ||
가족 | 안티오코스 8세 그리포스(아버지) 트뤼파이나(어머니) 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첫째 형)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둘째 형) 필리포스 1세 필라델포스(셋째 형) 안티오코스 12세 디오니소스(남동생) 라오디케 7세 테아(여동생) | |||
참전 | 유대 전쟁, 셀레우코스 내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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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24대 군주. 안티오코스 10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안티오코스 10세가 파르티아와의 전쟁 도중 전사한 틈을 타 제국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셋째 형 필리포스 1세가 불러들인 파르티아군에 패배하여 파르티아로 끌려갔다.2. 생애
안티오코스 8세와 트뤼파이나의 네번째 아들이다. 형으로 셀레우코스 6세, 안티오코스 11세, 필리포스 1세가 있었고, 남동생으로 안티오코스 12세, 여동생으로 라오디케 7세 테아가 있었다. 기원전 113년 안티오코스 8세의 이복동생 안티오코스 9세가 반란을 일으킨 이래, 제국은 안티오코스 8세 세력과 안티오코스 9세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기원전 96년, 안티오코스 8세가 최고 관료 헤라클리온에 의해 암살되었고, 안티오코스 9세가 일시적으로 제국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자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들이 각지에서 반기를 들었다. 셀레우코스 6세는 킬리키아 서부의 셀레우키아 시를 거점으로 삼았고, 데메트리오스 3세는 다마스쿠스에서 자립했다.기원전 96년 말, 셀레우코스 6세가 안티오코스 9세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모의 원수인 안티오코스 9세를 죽인 뒤 안티오키아에 입성하여 단독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10세가 기원전 94년 반란을 일으켜 안티오키아로 진격했고, 셀레우코스 6세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몹수에스티아로 피신했으나 거기서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가 폭동에 휘말려 비참하게 사망했다. 데메트리오스 3세는 형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안티오코스 10세에게 복수하고자 북상하여 수년간 전쟁을 치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던 기원전 92년 또는 기원전 88년, 안티오코스 10세가 길르앗의 여왕 라오디케와 연합하여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르던 중 전사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의 화폐를 주조한 사실이 고고학적 증거로 확인된 걸 볼 때, 그가 안티오코스 10세의 뒤를 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주도권을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자신의 근거지인 다마스쿠스에 '데메트리아스'라는 이름을 붙였고, 셈족 최고의 여신이었던 아타르가티스를 동전의 뒷면에 등장시키는 등 셈족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 한편 그의 치세에 유대로 진입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인 가다라를 점거했다.
얼마 후, 유대 왕국에서 하스몬 왕가와 바이사이(바리새)파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데메트리오스 3세는 바리새인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유대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유대 왕 알렉산드로스 야나이가 이를 막으러 출진하자, 데메트리오스 3세는 야나이의 용병들이 그와 같은 그리스인 점을 이용해 회유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뒀지만 많은 병력을 잃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3세를 따르던 유대 반군 6,000명이 동포가 무참히 살육되는 걸 가엾게 여겨 야나이와 합류했다고 한다. 그 후 데메트리오스 3세는 시리아로 철수했는데, 시리아에서 형제들과의 세력다툼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 원정에서 복귀한 뒤, 데메트리오스 3세는 형 필리포스 1세와 내전을 벌였다. 기원전 87년, 필리포스 1세는 베로에아에서 데메트리오스 3세의 보병대 10,000명과 기병대 1,000명에게 포위당했다. 이에 파르티아에 구원을 요청했고, 파르티아 총독 미트리다테스 시나체스가 출진해 데메트리오스 3세의 진영을 포위했다. 물을 구할 길이 없어 수많은 병사가 갈증으로 고통받자, 그는 전의를 상실하고 파르티아군에 항복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3세는 파르티아로 끌려간 뒤 파르티아 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죽을 때까지 편히 지냈다고 한다. 사망년도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