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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2:50:05

안티오코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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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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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2대 군주
Antiochus I Soter
안티오코스 1세
파일:안티오코스 1세.png
<colbgcolor=#000> 출생 기원전 324년
마케도니아 왕국 바빌론
사망 기원전 261년 6월 2일
셀레우코스 제국 사르데스
재위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기원전 281년 9월 ~ 기원전 261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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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제호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
Antiochus I Soter
가족 셀레우코스 1세(아버지)
아파마(어머니)
스트라토니케(부인)
셀레우코스(장남)
라오디케(장녀)
아파마 2세(차녀)
스트라토니케 2세(삼녀)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차남)
참전 시리아 전쟁}}}}}}}}}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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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2대 군주. 부친 셀레우코스 1세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혼란에 빠진 제국을 수습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상대로 시리아 전쟁을 벌였다.

2. 생애

파일:안티오코스가 병든 원인을 발견한 에라시스트라투스.jpg
1774년 자크루이 다비드 작, 안티오코스의 질병 원인을 발견한 에라시스트라투스.

기원전 324년 바빌론에서 셀레우코스 1세소그디아 귀족 스피타메네스의 딸 아파마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기원전 301년 아버지와 함께 입소스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에 기여했으며, 이후에도 부친이 새로 확보한 영역의 지배권을 굳히는 데 공헌했다. 그러던 중 부친이 새로 맞이한 17세의 젊은 계모 스트라토니케(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의 딸)를 보고 짝사랑에 빠졌다. 그는 계모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죄악심과 절망이 겹쳐 상사병에 빠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죽어가는 왕자를 진단한 그리스 의사 에라시스트라투스는 그의 질병이 상사병이라는 걸 눈치채고, 궁궐의 여인들에게 안티오코스 앞에 한 명씩 나타나게 했다. 스트라토니케의 차례가 오자, 왕자의 맥박이 빨라졌고, 에라시스트라투스는 왕자가 스트라토니케를 사랑한다고 보고했다. 셀레우코스 1세는 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기원전 294년 스트라토니케와 결혼시켰다. 이와 동시에, 안티오코스는 공동 왕이 되었으며 동방 영토의 통치자가 되었다. 스트라토니케는 셀레우코스 1세와의 사이에서 딸 필라를 낳았고, 안티오코스 1세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낳았다.

281년 9월 트라키아 원정에 착수한 셀레우코스 1세가 리사마키아 인근에 도착한 뒤 희생제를 치르고 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 1세가 이끌던 군대를 고스란히 자기 수중에 넣었고, 몇년 전 셀레우코스 1세에게 복속했던 소아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안티오코스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이후 양자는 1년간 전쟁을 벌였지만 쉽사리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 사이 시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안티오코스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와 화해하고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가 그의 수중에 있는 걸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1세가 이끄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 연합에게 눈길을 돌린 그는 소아시아 서부 지역의 사트라프 파트로클로스에게 니코메데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지포에테스 2세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니코메데스 1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기원전 279년 여름,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소아시아 서부를 공략하고자 군대를 일으켰다. 안티오코스 1세는 이에 맞서 그리스의 여러 도시와 연합했다. 이후의 전쟁 경과는 기록이 미비해서 알 수 없지만, 양측이 승부를 내지 못하고 화해한 것만은 분명하다.

파일:터키 갈라티아 5.png
기원전 281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판도

기원전 278년, 켈트족이 소아시아 해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해안가 마을을 약탈한 뒤 좀더 깊숙이 들어가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 안티오코스 1세는 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고, 기원전 275년, 양측은 소아시아 한복판에서 맞붙었다. 병력에서 열세했던 그는 켈트족이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전투 코끼리를 투입했고, 켈트족은 이 '괴물'들을 보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여 패주했다. 그는 이 전투를 계기로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로부터 '소테르'(Soter: 구세주)라고 불렸다. 하지만 켈트족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갈라티아에 정착하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275년 말, 안티오코스 1세는 군대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기습 공격해 다마스쿠스를 탈취했고, 여세를 몰아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를 점령했다. 그러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반격에 나서 빼앗긴 영토를 전부 탈환하고, 오히려 카리아와 시리아 대부분을 공략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시리아에 가있는 동안 키레나이카의 총독 마가스가 아내의 설득을 받아들여 독립을 선포하고 왕을 칭하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안티오코스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물러났다.

기원전 261년 자신의 속국이었던 페르가몬 왕국의 군주 에우메네스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손을 잡으려는 기색을 내비치자, 이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갔으나, 그해 6월 2일 사르데스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때 중상을 입은 그는 곧 숨을 거두었고, 둘째 아들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즉각 휴전을 깨고 북진하여 이오니아의 몇몇 도시를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