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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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22대 군주 Seleucus VI Epiphanes 셀레우코스 6세 | ||||
<colbgcolor=#000> 출생 | 미상 | |||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키아 | ||||
사망 | 기원전 94년 | |||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키아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96년 ~ 기원전 94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제호 | 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 Seleucus VI Epiphanes | ||
가족 | 안티오코스 8세 그리포스(아버지) 트뤼파이나(어머니)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남동생) 필리포스 1세 필라델포스(남동생) 데메트리오스 3세 에우카에로스(남동생) 안티오코스 11세 디오니소스(남동생) 라오디케 7세 테아(여동생) | |||
참전 | 셀레우코스 내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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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22대 군주. 부모의 원수인 숙부 안티오코스 9세를 타도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 2년만에 사촌인 안티오코스 10세에게 축출된 뒤 몹수에스티아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2. 생애
안티오코스 8세와 트뤼파이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기원전 96년 부왕 안티오코스 8세가 숙부 안티오코스 9세의 사주를 받은 최고 관료 헤라클리온에게 피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망명지에서 돌아와 반란을 일으켜, 가까스로 안정된 셀레우코스 제국을 20년여간 양분시켜 약소국으로 만든 안티오코스 9세가 단독 군주가 되었다. 안티오코스 9세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뒤, 약속을 어기고 헤라클리온을 처형한 후, 안티오코스 8세의 두 번째 아내였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강제로 결혼했다.
이렇게 되자, 부모를 모두 숙부 손에 잃은 셀레우코스 6세는 복수를 다짐하고 가까스로 탈출해 훗날을 도모했다. 그는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의 측근 대신들과 함께 반격을 도모하다가, 킬리키아 서부의 셀레우키아 시를 거점으로 삼고 반기를 들었는데, 스스로 수염을 깎은 뒤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에 맞춰 동생 데메트리오스 3세가 다마스쿠스를 점거했다. 그해 말 셀레우코스 6세는 병력을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쳐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그는 원수인 안티오코스 9세의 군대를 박살내고, 안티오코스 9세를 죽여 복수에 성공했다. 이후 수도에 입성한 그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10세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안티오코스 10세는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아내로 삼았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했다.
가까스로 안티오키아에 돌아온 셀레우코스 6세는 숙부 안티오코스 9세의 반란과 그로 인한 오랜 내란으로 망신창이가 된 제국의 경제를 재건하고 무너진 왕권과 군사력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그는 매부리코라는 별명으로 불린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의 정통성을 되살리고 창건자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직계임을 강조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면서 스스로를 매부리코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하고 별칭을 '니카토르'로 자칭해 이를 제국 전역에 강조했다. 안티오코스 9세를 제거한 직후, 발행한 안티오키아 주조 화폐는 모두 복수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수염을 기르지 않는 도안으로 새겼고, 할아버지 데메트리오스 2세,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의 초상화에 그려진 뿔을 자신의 주화 안에 넣게 하여 복수의 성공을 기렸다.
이렇게 셀레우코스 6세는 살아 있는 신이자 헬레니즘 세계의 패권자로 대변된 셀레우코스 제국 군주로서의 권위를 강조하고자 다양한 홍보를 했다. 이어 그는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선조들의 정책을 따르지 않고 중앙 권력을 강화하겠다고 하면서 킬리키아 일대에 자치권을 내리지 않았다. 이런 그의 결정은 약소국이 된 셀레우코스 제국의 재건을 위해 내려진 극약처방이었지만, 이는 그가 훗날 아피아노스로부터 "폭압적이고 권위적인 냉혈한 군주"로 묘사돼 혹평을 들은 대표적인 결정으로 회자되었다.
기원전 94년,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10세가 안티오키아로 진격했다. 이보다 앞서, 셀레우코스 6세는 각 도시가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한 안티오코스 9세의 결정을 철회하고,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다. 도시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안티오코스 10세의 편을 들었다. 결국 전투에서 패배한 셀레우코스 6세는 몹수에스티아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주민들에게 다시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가 폭동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 작성된 단편적인 기록들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6세는 주민들에게 비참하게 화형당하느니 스스로 죽겠다며 명예롭게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훗날 그의 동생들인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가 몹수에스티아를 공격해, 주민들을 학살한 뒤 죽은 형 셀레우코스 6세의 넋을 기리며 복수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리는 주화를 발행했다.
루쿨루스의 단편적인 기록 등을 보면, 셀레우코스 6세는 아내, 딸,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은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의 손에 죽지 않았지만, 아내와 딸은 아르메니아 왕국이 셀레우코스 제국을 멸망시킬 때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