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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01:24:26

디오도토스 트리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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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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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14대 군주
Diodotus Tryphon
디오도토스 트리폰
파일:디오도토스 트리폰.jpg
<colbgcolor=#000> 출생 미상
셀레우코스 제국 카시아나
사망 기원전 138년 말 또는 기원전 137년 초
셀레우코스 제국 아파메아(현재 터키 샨르우르파)
재위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기원전 142년/기원전 141년 ~ 138년 말 또는 137년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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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제호 디오도토스 트리폰
Diodotus Tryphon
가족 기록 없음
참전 셀레우코스 내전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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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14대 군주. 안티오코스 6세를 옹립하여 데메트리오스 2세와 경쟁하다 안티오코스 6세가 죽자 왕을 자칭했으나, 안티오코스 7세에게 폐위되었다.

2. 생애

소아시아 아파메아(현재 터키 산르 우르파) 인근의 작은 마을 카시아나 출신으로 전해지지만, 출생년도 및 가족관계, 군대에 입대하기 이전 행적 등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셀레우코스군에 입대한 뒤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장군으로서 활약했다. 기원전 145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데메트리오스 2세를 지지하기로 하고 시리아를 침공했을 때, 그는 히에락스와 함께 안티오키아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도시를 넘겨주면서, 그가 셀레우코스 국왕을 겸임해달라고 요청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통합한다면 로마 공화국이 좌시하지 않을 거라 보고 이를 거부한 채, 데메트리오스 2세를 잘 섬기라고 한 뒤 이집트로 귀환했다.

안티오키아에 입성한 데메트리오스 2세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따랐던 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아라비아로 망명한 뒤, 거기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던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 6세를 옹립한 뒤 안티오키아로 진격했다. 기원전 144년, 그는 임금 삭감에 반감을 품은 장병들의 귀순에 힘입어 데메트리오스 2세를 물리치고 안티오키아에 입성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6세의 이름으로 안티오키아, 아파메아, 라리사, 칼키스를 포함한 시리아 대부분을 지배했다. 한편 데메트리오스 2세는 킬리키아와 제국 동방 일대, 그리고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해안 도시들을 장악했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은 안티오코스 6세 세력과 데메트리오스 2세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디오도토스는 요나단 압푸스가 이끄는 유대인들에게 데메트리오스 2세를 물리치는데 힘을 보태준다면, 유대 왕국이 완전히 독립하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요나단은 이를 받아들이고 형제 시몬 타시를 지원군으로 보냈다. 하지만 디오도토스는 곧 마음을 바꿨다. 기원전 143년, 그는 요나단에게 의논할 일이 있으니 프톨레마이스로 와달라고 청했다. 요나단은 이를 받아들여 그곳으로 갔다가 사로잡혔다. 디오도토스는 그를 처형한 뒤 예루살렘을 포위했지만, 폭설이 내리자 포위망을 풀고 시리아로 돌아갔다. 이후 예루살렘에 돌아온 시몬 타시는 디오도토스를 적대하고 데메트리오스 2세와 연합했다. 같은 해 프톨레마이스와 티레 사이에 주둔한 데메트리오스 2세의 함대를 격파했으나, 그 직후 해일이 밀려오는 바람에 군대를 거의 잃어버리고 도주했다.

기원전 142년 또는 141년, 안티오코스 6세가 사망했다. 공식 기록에는 배 수술을 받던 중 사망했다고 하나, 디오도토스가 암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군대를 설득하여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게 한 뒤, '바실리오스'의 칭호를 받았다. 또한 '트리폰 오토크라토르'(Tryphon Autocrator)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트리폰'(Tryphon)은 '사치'를 뜻하는 말로,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였지만 신민들에게 자금을 골고루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다는 걸 과시하고자 그런 호칭을 쓴 것으로 보인다. '오토크라토르'(Autocrator)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의 사례를 본뜬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한 원정을 떠나기 앞서, 전 그리스 도시로부터 '스트라테고스 오토크라토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사실을 그리스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자신의 왕권이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계 도시 모두에 미친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도토스는 로마 공화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승리의 여신 니케의 황금 동상을 로마에 보냈다. 그러나 원로원은 안티오코스 6세가 보낸 선물로서 받기로 했을 뿐,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던 기원전 139년, 데메트리오스 2세가 동방 영토를 갉아먹고 있는 파르티아에 맞서고자 출정했다가 매복에 걸려 사로잡힌 뒤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바빌로니아 일대가 파르티아에 넘어갔고, 디오도토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남은 영토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 2세의 동생 안티오코스 7세가 로도스에서 페니키아에 상륙한 뒤 자신을 왕으로 선포했다. 그는 형의 아내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결혼하여 입지를 강화했으며, 시돈과 티레의 지지를 받아냈다. 양자는 곧 전장에서 맞붙었는데, 결과는 안티오코스 7세의 완승이었다. 안티오코스 7세는 기원전 138년 중반 안티오키아를 탈환했다. 디오도토스는 도르로 이동한 뒤 농성전을 벌였으나 함락이 임박하자 해로를 통해 오르토시아로 탈출한 뒤 고향인 아파메아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도 포위되었다. 결국 기원전 138년 말 또는 기원전 137년 초 사망했다.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는 설과 자살했다는 기록이 병존하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