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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유럽의 문화를 정리한 문서.2. 상세
동유럽의 문화적 기반은 크게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으로 볼 수 있다. 이들로부터 만들어진 문화로는 종교(동방 정교회)와 이콘화 전통, 그리고 문자(키릴 문자)가 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불가르 칸국의 구성원들이 우크라이나 남부 평원지대에서 다뉴브 이남으로 점차 이동하여 생긴 국가로 투르크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3. 정치, 사회
대부분 전제군주제였다.3.1. 계급 제도
3.1.1. 지배자
- 키예프 대공국, 모스크바 대공국: 벨라키 크냐지(Великий Князь, 대공) → 루스 차르국: 차르 → 러시아 제국: '임페라토르(Император)'
- 불가리아 제1제국, 불가리아 제2제국 : 차르(황제)
- 세르비아 제국: 차르(황제) → 세르비아 공국: 데스포티스: 1402년 8월,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동로마 제국 섭정 황제, 요안니스 7세로부터 하사받은 호칭
- 왈라키아 공국(1330 ~ ): 보이보드 혹은 호스포다(Hospodar), 선거군주제를 통해 선출
- 폴란드 왕국: 보이보드(태수)
3.1.2. 특권계급
3.1.3. 노예
3.2. 토지
4. 종교
5. 문자
6. 군사
6.1. 무기
6.1.1. 파이크(장창)를 사용하지 않음.
동유럽 쪽에서는 파이크(장창)를 잘 사용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스텝초원 지형이 많은 동유럽에서는 보병보단 기병이 중심이 된 전투가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병에 대한 관심과 양성이 부족했다. 파이크 방진을 이루려면 기병의 돌격을 이겨내기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이 필수인데 서유럽에 비해 가난한데다, 농노들로 구성된 오합지졸들에게 돈과 시간을 써가며 그런 훈련을 시키고 싶지 않아 했다.전술 역시 보병과 총기의 화력이 주가 되고 기병은 보조 였던 서유럽에 비해 기병이 주가 되고 보병과 총기의 화력은 들러리에 불과할 정도로 그 차이가 심했으며, 폴란드의 경우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3:7일 정도로 기병 몰빵이 심했고, 보병은 포대나 지키는 애들 정도로 여겨졌다.
실제로도 폴란드 리투아니아군의 주요전술은 마차를 이용해 임시 방어벽을 만들고 그 안에서 포병과 보병이 우주방어를 하며 적의 주력을 막는 동안 기병이 우회하여 적들을 격퇴하는 전략이였다. 그래서 보병들도 대부분 화승총 등으로 무장했다. 물론 아예 안 쓴 건 아니지만 서유럽과 같은 대규모 운용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가면 자신들 사정으론 파이크를 운용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고 그냥 버디슈를 지급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경우 목책으로 기병의 접근을 막는 전술을 쓰거나, 버디슈를 애용하면서도 스웨덴 같은 군사 선진국에게서 파이크 방진을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있었다.
6.2. 갑옷
6.2.1. 경번갑
경번갑의 전성기는 대략 13~16세기에 걸친 기간동안이었으며, 특히 러시아, 중동 등지에서 표준적이라고 할만큼 다량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전 시대에는 단순한 체인메일이나 러멜러 아머등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굳이 경번갑이 전성기를 맞이한 이유는 중동의 뜨거운 기후에서 통풍이 잘 되는 갑옷이 보다 적합했고, 또한 러멜러 아머는 튼튼하지만 세세한 부분을 가려주지 못하고 체인메일은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가리지만 유연성 때문에 방어력의 약점이 있었으며, 둘을 겹쳐 입으면 무거워지므로 무게도 합리적이면서 방어력도 보완하는 경번갑이 주류를 이룬 것이다. 특히 이슬람세계의 경우, 동체 갑옷 뿐만이 아니라 팔다리 방호구, 마갑까지 경번갑으로 만드는 경우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철판의 두께는 0.6~2mm정도. 위아래가 겹쳐지는 베흐쩨리쯔 같은 경우는 0.6~1.2mm대이고, 철판 각각이 독립된 형태일 경우에는 0.8~2mm정도가 된다.
6.3. 기병
6.3.1. 동로마 제국의 기병
동로마 제국과 중동에서는 국가 단위로 대규모로 기병을 육성하였는데, 서유럽에서 중기병들이 정면 돌파를 담당한 거와는 달리 전통적인 양익 배치 편제로 주로 측후방을 공략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서유럽에 비해 궁기병을 자주 활용했다.6.3.2. 헝가리의 후사르
세르비아 공국에는 전통 병과로써 도둑, 약탈자를 뜻하는 구사르(Gusar) 경기병이 있었다. 이들은 나무방패와 금속 패딩, 창으로 무장하고 기사들을 2선에서 지원하는 경기병들이였는데, 전장에서는 주로 기사들을 지원하는 지원병으로 보조적 임무를 맡았고, 전방에서 척후임무 및 적이 패주할 때에 추격전을 벌이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임무는 후의 후사르들이 맡은 것과 유사했다.오스만 제국이 14세기 말~15세기 초에 세르비아 공국를 공략하면서 다수의 세르비아 전사들이 헝가리 왕국으로 이주해갔고, 최초의 후사르를 형성하는 인적 기반이 되었다.
헝가리에는 중세시기부터 전통적으로 오랜 경기병 전통이 있었다. 동로마 제국이 10~11세기 무렵에 이지역에서 '호사리(Chosarioi)'라는 용병 경기병들을 모집해 전장에서 활용할 정도였다. 여기에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제압되면서 많은 수의 세르비아 전사들이 헝가리로 이주했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의 병제가 헝가리로 대거 유입되면서 '후사르'라는 경기병 병과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을 조직적으로 편성한 것은 야노슈 후냐디의 아들이자 헝가리의 왕이 되어 헝가리의 마지막 전성시대를 열었던 마챠시 1세 코르비누스(Matthias 1 Corvinus)[1]로, 국왕 친위대인 '검은 군대'[2]에 주력 경기병으로 조직화, 편성한 것이다. 이들은 마챠시 1세의 정복활동 기간중 오스만 제국의 시파히과 대등한 전투력을 지녔음을 입증했다. 마챠시 1세가 헝가리 왕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대공 및 보헤미아 왕을 겸임하던 중 사망하면서 '후사르'는 동유럽 일대로 퍼져나갔다.
쉴레이만 1세에게 헝가리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주요 경기병 병과로 존재했으며, 오스만 제국도 일부 이들 후사르들을 활용했다.
6.3.3.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처음으로 후사르를 접한 것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온 세르비아 용병에게서부터로 여겨진다. 마챠시 1세의 '검은 기사단' 에게서 강한 충격을 받은 폴란드 귀족들은 1500년대부터 세르비아인 용병들을 주축으로 하는 '후사르'들을 다수 확보해 전장에 참여했다. 폴란드 또한 기병전통이 상당히 강한 국가였기에 이러한 병종 도입은 어렵지 않았다. 이들 '폴란드 후사르' 들은 차츰 중무장화하기 시작했고, 이로인해 후사르들 중에서도 '폴란드 후사르'는 경기병이 아닌 중기병에 가까운 병과로 평가되고 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전성기, 명군이라 일컬어지는 '스테판 바토리'가 1570년대에 이들을 모아 조직화한 것이 그 유명한 윙드 후사르의 시작이다. 이후 항목은 윙드 후사르 참조.
튼튼한 갑옷과 말의 빠른 기동성으로 움직이는 중장기병은 냉병기 시대의 현대전차라 할 수 있을 만큼 위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화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점차 힘을 잃어간다. 이러한 중장 창기병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폴란드 윙드 후사르로 당시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던 몇 배의 파이크 보병 방진을 돌파해 버리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선보이기도 했다.[3]
이는 동유럽은 서유럽과 달리 평원과 스텝 지대가 널리 펼쳐져 있어 보병보다는 기병에 투자하는 성향이 강했기에, 그 기병 중 가장 중무장한 윙드 후사르가 활약할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7. 복식
7.1. 모자
7.1.1. 투르크
- 바쉴륵(Başlık): https://en.wikipedia.org/wiki/Bashlyk
- 칼팍(Kalpak): https://en.wikipedia.org/wiki/Kalpak
7.1.2. 러시아
샤프카(Shapka): '모자'라는 뜻- 콜팍(Kolpak): 원추형 모자, 가장자리 부분을 접어올릴 수 있음
- 끝이 뾰족한 모양
- 끝이 둥근 모양
- 골라트나야 샤프카(Gorlatnaya Shapka, 영어: boyar hat)
- 말라카이(MALAKHAI)
- 타프야(Tafya)
- 부됸노브카(군인 버젼)
부됸노브카를 쓴 소련 육군(1919년).
소련에서 활동할 시기의 홍범도 장군
- 우샨카(ushanka, 군인버젼): ushi = ears, + shapka : 귀모자, 귀를 덮을 수 있는 털모자(일명, 군밤장수 모자)
이에 소련군뿐만이 아니라, 동독,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동유럽부터 중국, 북한을 비롯한 공산국가들도 소련의 영향을 받아 우샨카가 제식 복장화가 된다. 그러나 아무래도 추위의 끝판왕인 러시아에서 나온 것이다보니, 방한 성능 하나는 수준급. 때문에 단순 방한장비로써는 한국군을 포함한 전세계의 수많은 군대와 민간에서 사용하고 있다.
- 코코쉬니크(Kokoshnik)
- 클로북(KLOBUK)
[1] 재위기간 1458~1490(헝가리 왕), 1486~1490(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왕 겸임)[2] 1458년에 창설되어 1494년까지 활동한 상비 용병군으로, 전성기 때에는 병력이 28,000명에 달했다. 중앙 유럽 정복 활동 등 마티아슈의 군사 활동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기병 강국 헝가리답게 기병이 2만에 보병이 8천이었다고 한다. 다만 보병 가운데 25%가 총병이었다는 점도 중요한데, 검은 군대가 해산되고 10년이 지나 16세기로 바뀐 뒤에도 서유럽의 전체 군대 가운데 총병의 비율은 10%에 불과했기 때문. 또한 당시 유럽에서는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면 상비군을 거느린 유일한 나라가 프랑스였는데, 그나마도 전원이 중기병에 그 수도 수천 명에 불과했다.[3] 윙드 후사르가 격파한 파이크 방진이 서유럽의 파이크 방진에 비해 뒤떨어기는 했다.[4] 우샨카기 도입된 이후로도 독소전쟁 초창기까지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