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튼쿰 해안과 리조트 단지
일대의 랜드마크인 아폴론 신전
1. 개요
튀르키예어 Didim그리스어 Δίδυμα
튀르키예 서부의 도시. 아이든에서 서남쪽으로 60km, 쿠샤다스에서 남쪽으로 50km, 밀라스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7만명으로, 에게해 연안의 주요 휴양 도시 중 하나이다. 지명은 고대 밀레투스 소속의 신전 도시 디디마 (Δίδυμα)에서 유래되었는데, 시가지 북쪽에 남아있는 아폴론 신전은 이오니아 일대에서 영험한 신탁으로 유명한 성소였다. 내륙의 디디마 유적과 해안의 리조트 단지 및 알튼쿰 해변이 어울린 역사 / 휴양 관광지로써 여름 성수기 철이면 상주 인구가 1만이 늘어난다. 인근 볼거리로 북쪽 17km 지점의 밀레투스 (밀레트) 유적지와 과거 만이었다가 메안데르 강의 퇴적으로 호수가 된 바파 괼뤼 등이 있다. 이러한 관광업 외에 농업과 어업 역시 발달하였다.
2. 역사
귈뤼크 만의 북쪽 연안에 할리카르나소스와 마주한 과거의 포시데이온 반도[1]에는 크레타와 미케네 인들이 왕래하였고, 이오니아와 카리아의 경계점인 현 디딤에는 기원전 8세기경 카리아인들이 정착하여 도시를 세웠다. 디디마이온 혹은 디디마라 불린 도시는 아폴로와 아르테미스 남매를 중심으로 한 여러 신전들이 세워져 신성시되었다. 그 중심인 아폴로 신전은 신화 속 아폴론의 동성 연인인 브란코스의 후예를 자처한 브란키다이 가문이 관장하였고, 그들은 신전 앞의 신성한 샘에서 여사제가 행하던 신탁을 해석하였다. 다만 이오니아 반란 시기인 기원전 494년, 반란의 향방을 결정지은 라데 해전 후 페르시아 군대가 디디마를 점령하고 신전 내의 아폴로 청동상을 엑바타나로 가져가는 등 수난을 겪었다. 그후 신성한 샘이 멎으며 신탁도 중단되었다. 한세기 이상 폐허로 남아있던 디디마는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점령한 후 샘이 다시 솟아나고[2] 브란키다이 가문이 돌아왔다.
헬레니즘기 재건된 아폴로 신전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사모스 섬의 헤라 신전과 함께 지중해권 최대 규모의 신전 중 하나였다. 기원전 300년 경에는 셀레우코스 1세가 2세기 이전 약탈된 아폴로 청동상을 다시 봉안하였고, 역대 셀레우코스 군주들이 방문해 후원을 하고 신탁을 구하였다. 기원전 277년경 신전은 갈라티아 인들에게 약탈당했으나 비티니아, 페르가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의 후원으로 복구되었다. 헬레니즘기 신전에서는 밀레투스 인들이 주관하는 디디메이아 축제가 열렸고, 기원전 2세기에는 그리스 문화권 전역에서 참가하는 4년 단위의 대축제로 변모하였다. 다만 기원전 70년경 로마는 밀레투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한 대가로 디디메이아 축제를 금하였고, 기원전 67년 신전은 킬리키아 해적들에게 약탈되었다.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 후 기원전 63년 디디메이아는 다시 열렸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디디마 시가지를 확장하였다.
로마 제국기 칼리굴라는 신전 보수를 도왔고, 서기 101년 트라야누스는 밀레투스와 디디마 간의 신성한 길을 보수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129년 신전을 방문해 예언자 행세를 하였고, 콤모두스 황제는 자신을 숭배하는 콤모데이아 행사를 열게 하였다. 4세기 초엽 아폴로 신전의 신탁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를 승인하였다. 다만 4세기 말엽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화하며 신전을 폐쇄하였고, 신탁 역시 영영 사라졌다. 그후 디디마에는 주교구가 들어섰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는 유스티니아노폴리스로 명명되었다. 동로마 제국기에는 '성소'라는 의미인 히에로드나로 불렸고, 이는 20세기 초까지 신전 유적 위에 살던 그리스계 주민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후 1086년 차카의 튀르크 인들이 점령했으나 1098년 1차 십자군에 힘입어 동로마 제국이 수복하였다. 하지만 1280년 멘테셰 후국이 점령한 후 튀르크 인들이 지배하게 된다.
1300년 아이든 왕조 령이 되었다가 1413년에는 메흐메트 1세가 정복하여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비록 동로마 시기 내부가 요새로 변모하긴 했어도 1446년만 해도 신전 기둥이 대부분 잔존했다. 다만 1673년에는 이미 붕괴하였고, 1873년 프랑스 탐험대가 일부 유물을 가져간 이후 1895-1913년 프랑스 고고학 팀이 발굴에 나섰다. 오스만 시기 마을은 히에로드나 (예론다)의 튀르크식 발음인 요란다 혹은 요란이라 불렸고,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후에는 성채란 의미인 히사르로 명명되었다. 1955년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복구된 후 '새로운 성채'란 의미인 예니히사르라 불리게 되었다. 본래 아이든 도 하의 소케 면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1991년 자체적인 면으로 승격되었는데, 튀르키예 내의 여러 예니히사르 지명들과의 혼선을 막기 위해 옛 디디마에서 따온 디딤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1962년 이래로 독일 고고학 팀이 일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에 착수하여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3. 갤러리
디디마 남쪽 해변
밀레투스-디디마 간의 성스러운 길과 스토아 유구. 디디메이아 축제 시에 행진로였고, 신/인물/동물상[3] 나열되어 있었으며 역참까지 있었다.
로마 시대 목욕탕 유적
서북쪽 해안의 앞바다에 있는 타브샨 섬. 미케네 문명을 비롯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다
아폴로 신전
서쪽 해안의 포세이돈 제단
성스러운 길 양 옆에 세워져 있던 석상
디디마 서북쪽 옛 파노르모스 항구가 있던 얄르코이의 해변
- [디딤 기타 사진들]
아르테미스 신전 기단부 출토 석상 옛 유적을 활용해 세워진 동로마 시기 성당을 개조한 히사르 자미
- [아폴로 신전 부조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