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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06:59:07

라코루냐


라코루냐
A Coruña (갈리시아어)
La Coruña (스페인어)
파일:라코루냐 문장.png
국가 스페인
지역 갈리시아
면적 37.83㎢
인구 249,964명
시간대 UTC+1 (서머타임: UTC+2)
라코루냐 (스페인)

1. 개요2. 역사3. 랜드마크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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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코루냐는 스페인 갈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대서양의 가장 큰 만인 아르타브라 곶에 위치해 있다.

2. 역사

로마인들은 기원전 2세기에 갈리시아 지역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히스파니아 지역의 전략적 위치를 차지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철 교역을 위해 이 곳에 왔으며, 현재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이라 불리던 지역 무역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교역이 축소되자 사실상 어촌 마을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하자 기존의 토착세력은 끄트머리로 밀리었다. 이 때 라코루냐는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기독교가 중심이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요충지가 되었다. 1208년 알폰소 9세는 소금 독점 판매권을 라코루냐에 부과해 번영을 누렸다. 라코루냐는 유대인, 템플 기사단, 프랑스 망명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등 상당히 열린 도시였다. 또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1492년 스페인이 기독교 원리주의가 되어서 유대인과 무어인을 쫓아내면서 라코루냐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또한 연이은 식민지 개척으로 인한 인구 부족과 증세와 더불어 1589년 영국의 제독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라코루냐를 공격하였다. 포위 기간 라코루냐 시민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면서 도시가 함락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 기도는 이루어졌으나 항만과 어업 지역이 파괴, 약탈당하여 도시는 사실상 무너진거나 다름없었다.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경제회복이 되기 시작하였다. 시의회가 미래를 내다보고 생산과 수출 증대에 힘썼기 때문이다. 이 시기 카디스의 대미무역독점권이 깨지면서 라코루냐는 대미무역 및 쿠바,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무역 거점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808년 5월 나폴레옹이베리아반도 전쟁 당시 프랑스에 지배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5월 30일 나폴리 귀족인 안토니오 팔랑기에리 장군을 쫓아내고 국방위원회가 구성되어 프랑스와 전쟁을 결의하였다. 민병대와 갈리시아 게릴라로 인한 피해가 누적되어 프랑스군은 50%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갈리시아 지역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 라코루냐는 점차 쇠퇴해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말 스페인 카리브해 식민지인 쿠바푸에르토리코가 독립 혹은 미국령이 되면서 대미무역이 쇠퇴한 것이다. 20세기 중반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라코루냐는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는 군 지휘관들이 곧바로 도시를 장악하여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총살하였다. 프랑코 독재가 끝난후 당선된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시장이 추진한 유럽에서 가장 긴 대형 해상 산책로와 3개의 과학관, 콜로세움, 오페라 극장, 해안 공원을 만들어 관광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3. 랜드마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70px-A_coruna_torre_de_hercules_sunset_edit.jpg
헤라클레스의 탑(Torre de Hércules)

4.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