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 | |||||||||
19세기 초반~19세기 중반 |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 20세기 후반 | 21세기 | 한계와 비판 |
1. 개요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의 19세기 초반~19세기 중반을 다룬다.2. 유럽 자본의 라틴아메리카 유입
(19세기) 라틴아메리카에 유입된 유럽 자본이 실질적으로 현지의 금융시장이나 금융기관을 구축하는데 투자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현지의 금융시장과 금융기관이 형성되었다면 그곳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본들이 그들 스스로 좀 더 광범위하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경제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는 이런 금융기관들이 없었기 때문에 산업 기반의 구축이 어려웠고, 멕시코 사례가 보여주듯이 심각한 기업 집중 현상이 초래되었다. 오직 소수의 부자만이 공장을 건설할 자금을 모을 수 있었기 대문이다. (기업 집중 현상은 심지어 비교적 적은 투자자금만 필요한 경공업 분야에서도 일어났다.) 기업 집중 현상은 심지어 미국과 유럽이 이미 앞서 나가던 제2차 산업혁명에 속한 산업 분야보다 훨씬 더 적은 자금이 필요했던 면직물 공장에서조차 발견되었다.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750~1870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750~1870
다만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해외투자처를 찾던 영국 자본 상당량이 들어오긴 했다. 대부분 쪽박치거나 투자사기라서 영국에 금융공황을 일으키는 결과로 돌아오긴 했지만.
3.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의 대립
이후 영국빠이자 비교적 반 가톨릭 교회 성향을 나타낸 자유주의 노선[1]과 남미 군벌세력인 카우디요의 보수주의 세력은 서로 내전 상태로 치닫게 된다. 자유주의 세력이 그란 콜롬비아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면, 자유주의자들이 원주민 공동체를 해체하는 정책을 펴는 것을 혐오한 원주민 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이 가톨릭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여 신교를 허용하려 하는 것을 혐오한 가톨릭 교회 세력을 등에 업은 카우디요가 쿠데타를 일으켜 전소시키는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이를테면 중앙아메리카에선 프란시스코 모라산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력이 원주민의 공동체 토지를 '자유화'해서 자기들이 빼앗을 수 있게 하고 유럽 이주민을 끌어들여 나라를 '하얗게 하얗게'하려 했으나 거기 반발한 원주민들의 힘을 등에 업은 카우디요에 의해 실패했다.[2]반면 스페인 식민지 시절 비교적 개발이 덜 되었던 남미 칠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에서는 상황이 반대로 흘러갔다. 자유주의자들이 카우디요보다 우위에 있었고, 원주민들이 쓸려나간 빈자리에 유럽계 이주민들이 들어와 백인 인구 비중이 급증하였다. 캘리포니아에 골드러시가 한창일 당시 아직은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이었고 캘리포니아는 식량이나 비료, 생필품 상당수를 어쩔 수 없이 칠레에서 수입하였다. 이후 호주에서도 골드러시가 이어지며 인구가 급증하는데 이 과정에서 수요가 늘어난 생필품들은 영국 대신 칠레에서 수입되었고, 칠레는 대호황을 맞이하였다. 영미권과 교류가 급증한 칠레에는 일찍이 친영파 자유주의자들이 자리잡았다.
스페인 식민지에서 독립한 백인들 사이에서 스페인 전통에 대한 의견은 분명하게 나뉘어졌다. 대다수 히스패닉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악폐의 근원은 스페인에 있다고 규탄했다. 즉 식민 모국인 스페인은 종교의 자유에서부터 경제적 부, 정치적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근대 유럽이 대표하는 모든 것을 식민지에서 박탈했던 것은 아닐까? ... "스페인 군대는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는 않지만, 그 군대의 전통은 여전히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유산과 절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19세기 초반 프로이센 왕국(오늘날의 독일)은 인구 과밀과 퇴역 군인들의 빈곤 문제가 심각했는데,[3] 전역한 장교들 상당수가 물려받은 토지가 없으면 연금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미국이나 남미로 향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비롯한 남미 신생국가 정부들은 독일인들을 통해서 프로이센의 근대적인 교육 정책 및 사회 제도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남미 지식인들은 스페인 문화 잔재를 낙후된 것으로 간주하고 19세기 들어서 강성해진 프로이센 문화를 자국에 도입하는데 열심히였다 프로이센을 모방하여 파라과이는 근대적인 형태의 징병제를 실시하였고, 파라과이와 3국 동맹 전쟁으로 붙은 브라질과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는 유럽 프로이센 등에서 전역했던 장교들을 불러와서 자국군대를 근대화시켰다.
프랑스 문화는 바스크계 이민자들에 의해 현지식으로 재해석되고 보급되었다. 스페인의 바스크인 거주 지역은 프랑스의 바스크인 거주 지역과 이어져 있었고 남미에 있는 친지들의 초청으로 이주해온 바스크계 프랑스인들은 남미 팜파스나 파타고니아의 온대 기후에 맞는 포도 재배 및 와인 양조 기술을 보급하여 현지 식문화를 개량함은 물론, 동시에 오페라를 비롯한 파리의 최신 문화 트랜드를 남미 각국에 알리고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4. 먼로 독트린
유럽에 빈 체제하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피해를 추스리고 시민혁명 확산을 방지하느라 집안단속에 급급하여 라틴아메리카는 아웃 오브 안중일 동안 19세기 초 신생독립국에 불과했던 미국은 미리 유럽의 간섭을 배제하고 라틴아메리카를 장차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둘 사전 포석으로 먼로 독트린을 발표한다. 유라시아 대륙에 미국은 관심없다. 그러니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도 관심 꺼라.이렇게 시작된 먼로 독트린은 21세기인 현재도 사실상 유효하다.
누에바에스파냐 시절 멕시코는 비옥한 중부 고원지대에 인구가 몰려있었고, 북부의 건조지대는 점과 선 형태의 느슨한 지배를 유지되고 있었다. 같은 시대 미국 동부의 펜실베이니아나 뉴욕, 보스턴 등의 항구로 입항한 유럽계 이민자들은 새로 개척할 농지를 찾아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였고 텍사스에 상당한 수의 독일계와 영국계 이민자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멕시코 정부는 미국을 거쳐 자국에 들어온 이들 미국계 멕시코인들에게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개신교 대신 가톨릭을 믿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텍사스의 독일계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실세(19세기 초 텍사스 인구의 90%가 미국을 거쳐온 이주민들이었다.)라는 점을 파악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시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주민 세력에 무장해제 이후 텍사스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텍사스 미국인들은 이를 무시하였고, 이후 미국계 이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출동한 산타 안나가 졸전 끝에 산 하신토 전투에서 텍사스 반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자세한 전개는 미묵전쟁 참고. 멕시코 측에서는 미국이 멕시코 중부로 내려오면 아이티 혁명 이후 아이티를 재차 침공했던 프랑스군마냥 질병으로 떼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애초에 배멀미를 앓으며 섬나라에 온 아이티 침공 프랑스군과 별 저항을 받지 않고 멕시코 북부 영토를 뚫고 들어온 그것도 보급체계가 잘 갖추어진 미군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전쟁 패배로 영토의 55%[4][5]를 뜯기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멕시코는 이후 다시 미국에 대항하지 못했다. 그나마 국가가 멸망하지 않은 이유는(멕시코가 미국에 완전히 먹히지 않은 이유는) 멕시코 민중들이 격렬하게 단결해서 저항해서... 는 아니었고, 19세기 당시 만연했던 미국의 인종주의 때문이었다.
19세기 미국의 파워 엘리트들은 멕시코 전쟁을“규모가 확대된 인디언 전쟁”(a grand-scale Indian war)으로 간주했고(181), “야만을 정복한 신세계에 민주주의와 경제 진보의 장을 건설하는 일이 앵글로색슨족의 사명”이라고 못 박았다(175).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이 체결될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존 칼훈은 한술 더 떠서 “만약 멕시코가 합병되어 미국의 준주가 된다면 멕시코의 잡종 인구들이 인종적으로 순혈인 미국인들과 평등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므로 결단코 거기까지 가서는 안 된다”(Hine and Faragher 211쪽에서 재인용)고 목청을 높였다. 다음장에서 논의하겠지만, 미국의 사병(私兵) 집단과 ‘명백한 운명’ 간의 연관성을 파헤치는 로버트 메이(Robert May)가 지적하듯이, “명백한 운명의 인종주의적 경향은 멕시코와의 정전 이후 중미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간 여러 군소 군사원정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다”(163)
국경의 틈새에서 ‘명백한 운명’을 욕망한 희생양과 사생아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 다시 읽기 #
국경의 틈새에서 ‘명백한 운명’을 욕망한 희생양과 사생아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 다시 읽기 #
이후 멕시코는 미국의 충실한 앞마당 멀티로서 기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 먼로 독트린을 묘사한 1896년 만평
1860년대 미국 남북 전쟁 와중에, 프랑스가 멕시코에 30년전 빌려주고 떼먹힌 돈을 돌려받기 위해 제2차 프랑스-멕시코 전쟁을 일으키고 여기에 영국, 벨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면서 멕시코 제2제국이 성립되었으나,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는 멕시코 반란군들이 멕시코 제국 정부군을 공격하고, 프랑스가 미국 눈치 때문에 철군하면서 멕시코 제2제국은 붕괴하고 이후 멕시코 합중국 정부가 들어섰다.
5. 브라질, 노예 해방과 공화정 수립
포르투갈이 운영하던 브라질 식민지는 원주민 인구 밀도도 적은데다가 종주국인 포르투갈이 인구가 부족하여 그 대안으로 흑인 노예를 대거 수입. 16~19세기 동안 미국으로 388,000명, 스페인어권 라틴아메리카로 250만여 명의 흑인 노예로 수입되는 동안 브라질에는 400만여 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가 수입되었다.당시 브라질 플랜테이션의 노예 노동 환경은 무척 가혹하였는데 과로에 영양 불균형으로 브라질로 수입된 남성 노예들은 브라질에 도착한 이후 7~10년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들에게 소나 노새한테 사료를 주듯 콩밥만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포르투갈계 브라질인 농장주 상당수는 문맹이었는데, 이들은 책상에서 서류를 만지는 일은 유대인이나 하는 일이라 경멸해서, 흑인 노예 중에 글을 읽고 쓸 줄 알던 사람들에게 새로 포르투갈어를 배우게 한 후 일을 맡기는 편이었다. 이렇게 서기나 마름 일을 맡은 흑인들은 말레(Malê)라고 불렸으며 일정 수준 이상의 자유를 보장받고 가정을 이루고 재산을 모을 권리가 암묵적으로 승인되는 등 비교적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6]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이후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으며, 1822년부로 브라질 제국이 되는 전후로 노예 무역이 영국에 의해 방해를 받자, 독립국 브라질은 1824년부로 독일계 이민자,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백인 인구 중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인구가 증가한 것을 계기로 말레들이 누리는 권리가 축소되자 1835년 소수의 말레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가혹하게 진압되었으나[7] 1851년 노예무역 금지과 흑인노예 대우 향상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8]
유럽계 이민자들이 유입된 지 약 반세기 이후 흑인 노예 플랜테이션이 발달했던 브라질 북동부 지역에 지역 약화와 가뭄이 겹쳐 1877~1878년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다. 기근으로 많은 농장들이 파산하고 노예 수십만이 명이 굶어죽거나 농장을 탈출하여 브라질 각지를 떠돌았다. 여기에 19세기 초반부터 유럽 각국이 하나둘 노예제를 폐지하기 시작했고 남북 전쟁을 계기로 미국까지 노예제를 폐지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마지막까지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브라질 내에서도 점차 노예제 폐지 운동이 거세졌다. 개인적으로 선량한 성격인 황제 페드루 2세 역시 노예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황제의 딸이자 후계자인 이자베우 공주 역시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여기에 이 상황에서 영국이 브라질 측에 노예 무역을 포기하면 투자를 늘리겠다고 회유하자, 페드루 2세는 이자베우 공주의 주도 아래 1886년에는 사라이바 코테지피 법을 통해 60세 이상의 노예들을 해방하고 1888년에는 노예제를 완전 폐지하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노예 해방에 분노한 플랜테이션 노예주들이 공화정을 원하는 브라질 군부와 손을 잡고 188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폐지하고 브라질 제1공화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 공화국을 세운 농장주들은 노예제를 원복하는데 실패하였다. 애초에 맞기 싫어서 눈치보면서 일하는 노예 노동이 임금 노동자들로 운영되는 플랜테이션과는 절대 경쟁해서 이길 수 없었고, 화풀이로 황제를 내쫒는데 성공한 대농장주들도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역행할 수는 없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영국과 네덜란드가 운영하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 카리브해 식민지의 플랜테이션은 쿨리 노동력을 바탕으로 생산성이 대폭 개선되었는데, 브라질의 대농장들은 바로 이들과 경쟁해야 했다. 브라질의 농장주들도 질 수 없다며 유럽계/아시아계 임금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연유로 19세기부터 개발이 시작된 브라질 남부에는 기존의 흑인/파르도 인구 대신에 유럽계/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브라질 북부의 경우 무더운 날씨 때문에 유럽계나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 돈을 주고도 일을 시키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흑인 노예 노동력을 이용한 것도 있었지만 새로 개발되는 상파울루를 비롯한 남부는 온대기후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없었다. 브라질에서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던, 흑인 인구가 밀집한 북동부 지방은 황폐하고 낙후된 변방 지대로 전락하고,[9] 대신 해안 대도시 및 새로 개척된 남부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 노예제의 상흔. 파란색은 백인, 초록색은 혼혈, 빨간색은 흑인 우세지역이다.
당시에 만연한 인종차별주의 사상(흑인은 우매하고 게으르다는 인식) 때문에 브라질 남부 개발에는 흑인이 사실상 배제되었고, 브라질의 흑인 노예 해방은 결국 미완의 개혁으로 남게 되었다.
6. 멕시코,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오늘날 멕시코는 자국의 국부로 산타 안나 대신 지방에서 반란 직후 진압당했던 미겔 이달고를 추켜세우는데, 이는 그만큼 멕시코 독립 직후의 상황이 실망스러웠고, 당시 지도자들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미겔 이달고는 한국으로 치면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만도 못한 포지션으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지휘한 것도 아니고 미겔 이달고의 반란이 당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을 각성시켰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원래 스페인 제국의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중심지였던 멕시코의 기득권 계층은 시몬 볼리바르의 반란 초반 당시에는 왕당파의 편에 서서 독립을 반대하던 상황이었다. 미겔 이달고의 반란 당시 멕시코의 크리오요들은 반란군을 자체적으로 진압하였고, 독립 이후 멕시코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바로 미겔 이달고의 반란을 진압했던 크리오요 계급이었다.멕시코의 독립은 왕당파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누에바에스파냐의 왕당파들은 1821년 스페인의 카디스 쿠데타로 스페인 국왕이 자유주의적 헌법에 서명하자, 여기에 큰 배신감을 느끼고 스페인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였다. 멕시코는 왕권신수설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주도로 독립이 되었기 때문에, 독립 직후 멕시코는 제국이 되었다. 2년만에 초대 황제 아구스틴 1세가 폐위되고 멕시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이 임시정부는 1년만에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쿠데타가 계속 발생하고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권력투쟁으로 만성적인 정정불안을 겪었다.
취약했던 행정력이나 지방 장악력이 개선되지 않으면서 멕시코가 원래 보유했던 광대한 영토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과테말라 총독령이 관할하던 중앙아메리카 지역은 대지주들이 힘을 합쳐 1823년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해당 지역의 기층 원주민들이나 메스티소 주민들의 별개의 민족 의식을 느껴서 분리독립을 한 것이 아니라, 크리오요 대지주들이 임의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독립한 것이다.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은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 등 여러 나라로 쪼개지는데 이는 상술한 것처럼 대지주들의 이해 관계에 의한 분리독립이었지 지역 주민 전반의 민족 의식, 분리 독립 의지 등과는 무관했다.
한 편 멕시코의 북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일대는 선교사들이 설치한 미션(Mission)이라는 선교 기지 겸 요새가 드문드문 흩어져 원주민들을 간접 통제하던 상황으로,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는 해당 지역의 원주민 기병들을 상대하기 귀찮아서 방치하던 곳이기도 했다. 중세시대도 아니고 선교사들이 영토의 상당 부분을 관리했다는 점은 당시 멕시코가 북부 지방 행정력 개편에 얼마나 무성의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작정하고 멕시코 북부의 영토를 노리자 영토는 댕강댕강 떨어져 나가는게 당연했다. 텍사스 지역에 유입된 미국계 유이민이 반란을 일으켜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텍사스를 둘러싼 미국과 멕시코의 분쟁은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의 참패로 멕시코는 리오 그란데 강 이북의 영토를 모두 상실했으며 그 넓이는 아직 남아있던 멕시코 영토의 절반에 달했다. 추가로 1853년에도 개즈던 매입으로 북쪽의 영토 일부를 더 할양했다.
이후 1861~1867년에는 채무 불이행 문제로 제2차 프랑스-멕시코 전쟁을 겪었다. 이 와중에 멕시코의 보수주의자(대지주와 가톨릭 성직자)들은 프랑스 편에 투항하였고, 오스트리아 출신 막시밀리아노 1세가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프랑스의 간섭으로 들어섰던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의 지지기반은 보수주의자들이었으나 그의 정책은 바로 그 보수주의자들을 실망시키곤 했다. 자유무역을 확대하여 기존 대지주 기득권층에게 위기감을 주었으며, 종교의 자유 개념을 도입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여, 보수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실망감을 주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 편 막시밀리아노 1세는 원주민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평균 교육 수준이 극히 낮았던 멕시코 원주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의 간섭으로 프랑스가 멕시코 개입을 포기하자, 자체적인 지지 기반마저 취약했던 멕시코 제2제국은 바로 붕괴하고 만다. 1870년대부터 정권을 장악한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물러터졌던 막시밀리아노 1세와 다르게 강경한 독재정책을 펼쳤고, 멕시코는 일단은 정치적인 안정을 유지하게 되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은 한 편으로는 멕시코 제2제국 시대 외국의 투자 및 이민을 적극 유치하는 정책 등 자유주의적 정책은 일부 유지하였다.
7. 콜롬비아, 양당제의 정착
라틴아메리카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와 그의 부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의 노력으로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1819년 그란 콜롬비아를 선포하고 볼리바르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산탄데르가 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란 콜롬비아는 1830년에 해체되었다. 오늘날 콜롬비아 지역은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으로 독립했으며 산탄데르가 대통령이 되었다.[10]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은 1863년 콜롬비아 합중국으로 국명을 변경했고 1886년 다시 콜롬비아 공화국(현행)으로 국명을 변경했다.콜롬비아 정치의 지배적인 양상은 보수당(볼리바르파, 1849년 창당)과 자유당(산탄데르파, 1848년 창당) 간의 대립으로, 보수당은 강력한 중앙정부와 로마 가톨릭과의 동맹, 제한선거를 주장한 반면 자유당은 지방자치와 선거권 확대 및 민사(民事) 전반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통제 철폐를 주장했다. 19세기와 20세기를 통틀어 양측은 거의 비슷한 기간 집권했고 양자간의 대립은 천일전쟁(1899~1902) 같은 전면적인 내전으로 폭발하기도 했다. 콜롬비아의 자연환경은 여기에 중앙과 지방 간의 대립양상 또한 부과하였다. 콜롬비아의 광대한 국토는 산맥과 강, 밀림 등 자연적 장해물로 나뉘었고 기술과 통신의 한계로 인해 자연스럽게 중앙정부로부터 반독립적인 공동체들이 구축되었다. 각 공동체들을 통치하는 카우디요들의 정치적인 야심은 콜롬비아의 주도권을 둘러싼 자유당과 보수당 간의 이념 대립과 결합되어 만성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을 유발했으며 이런 국론분열은 1830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의 독립, 1903년 파나마의 독립까지 초래했다.
자유주의 세력은 볼리바르 몰락 후 한동안 보수주의 세력과 경합하다가 토마스 시프리아노 데 모스케라 대통령(1845~1849, 1861~1862, 1862~1864, 1866~1867)과 호세 일라리오 대통령(1849~1853) 재임기를 기점으로 우위를 누렸다.[11] 아직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이 유지되던 1853년 제정된 누에바그라나다 헌법으로 연방제 도입, 노예제 폐지,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으로 참정권 확대, 대통령·국회의원·주지사의 직선, 정교분리 및 종교의 자유 확립과 같은 대개혁이 이루어졌다. 더 나아가 1860~1862년 내전에서는 자유주의 세력이 승리했고 1863년 콜롬비아 합중국으로의 국명 변경과 함께 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정책을 골자로 한 리오네그로 헌법을 발포했다. 시간이 지나 자유당은 급진파와 국민파로 분열되었고 국민파는 보수당과 연합하여 1880년에 집권했다. 이에 급진파가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국민파-보수당 연립정부에 토벌되었다. 정부는 1886년 연방제에서 다시 중앙집권제으로 회귀하고 국명도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보수당 정부는 1930년 대선 패배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정치적 혼란과 만성적인 폭력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주목할 점은 이웃 국가들과 대비되는 강력한 민주주의 전통을 꿋꿋이 지켜나갔다는 점이다.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성립 이래 콜롬비아가 겪은 군사독재는 2024년 기준 아직까지 단 두 차례에 불과하다.(1854년 호세 마리아 멜로, 1953~1957년 구스타보 로하스 피니야) 사회적으로는 스페인 세력이 물러간 뒤에도 아시엔다(대농장) 위주의 농업경제가 유지되었고 여기에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광업이 성행했다. 19세기 말부터 담배와 커피 수출이 증가하였고 이는 신흥 상인들과 도시의 성장에 기여했다.
8. 아르헨티나, 중앙주의-연방주의 대립
아르헨티나의 전신인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은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에 영향을 받아 1810년 5월 임시정부(Junta)를 수립했다.[12] 나폴레옹 세력이 스페인 본토에서 축출된 1814년부터 스페인이 영향력 회복에 착수하자 아르헨티나는 1816년 7월 9일 투쿠만 회의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1818년까지 호세 데 산 마르틴의 지도 하에 스페인 세력을 리오데라플라타에서 축출했다.독립 초 아르헨티나는 느슨한 연방 형태로 묶여 있었고 하나의 국가라고 보기도 힘들었다.[13] 이름조차도 연합주(Provincias Unidas)였고 제대로 된 중앙정부 조직도 없이 지역별로 영주(카우디요)가 알아서 통치했다. 이에 아르헨티나는 지방자치를 추구하는 지역 연방주의자 세력과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앙주의자 세력간의 대립을 겪었다. 1831년 아르헨티나 연합을 수립했지만 이 나라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일종의 국가원수 역할을 했을 뿐, 공식적인 국가원수는 여전히 공석이었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인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Juan Manuel de Rosas)[14]가 독재를 하면서 아르헨티나는 점점 하나의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갔다.
로사스는 우루과이 문제로 촉발된 브라질과의 전쟁(1851~1852)에서 대패하고 중앙주의자 잔당들의 반란 진압에 실패하여 권력을 잃고 망명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를 제외한 각 주의 주지사들은 1853년 미국을 모범으로 신헌법을 제정하고 아르헨티나를 연방국가로 만들었지만 의석 배분 문제[15]와 대외교역에 관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독점 철폐 문제[16]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이탈하여 독립했다. 곧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나머지 주 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1861년 파본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승리했다.
이후 모든 주가 참가한 의회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관세를 국유화하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수도 지위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수입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1862년 바르톨로메 미트레가 통합된 아르헨티나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통합만으로 아르헨티나의 정정불안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미미했고 상대적인 정치적 안정과 방대한 대초원, 농원을 바탕으로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또한 남쪽으로 현지 원주민 부족들을 정벌하고 이 지역을 확고한 아르헨티나의 강역으로 만드는 한편 북쪽으로는 파라과이와 삼국동맹전쟁(1864~1870)을 벌여 미시오네스 주와 필코마요 강 이남의 영유권 분쟁 지역을 획득했다.[17]
9. 기타 국가
[1] 당시 자유주의 노선이 영국빠였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는데, 영국에서 새로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신생국들에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독립 이후 영국 자본의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자국 내 남아도는 소고기를 냉동해서 해외로 수출하는 인프라가 확립되었다. 이런 자유주의자들 입장에서 인프라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원주민은 그저 제거대상일 뿐이었다.[2] 특히 모라산과 정면대결했던 라파엘 카레라는 그 자신이 원주민, 백인, 흑인 혼혈인 메스티소였다. 실제로 카레라는 원주민에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1871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 세력과 크게 대비되었다.[3] 19세기 초 독일에서 영국으로 이주해온 이주노동자들은 영국인들이 받는 급료의 절반만 받고 일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4] 현재 텍사스나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오리건, 애리조나, 유타, 아이다 호, 네바다, 뉴멕시코 등을 당시 미국이 접수하게 됐다.[5]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영토를 독일이 멕시코에게 참전요구조건으로 걸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세한 건 치머만 전보 사건을 참고하라.[6] 이들은 대개 풀라족, 하우사족 무슬림들로 포르투갈어 라틴 문자가 아니라 아랍 문자를 배워온 사람들이었지만, 아예 글을 읽고 쓴다는게 뭔지 아예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다른 언어로 글을 읽고 쓰던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편이 더 빨랐다.[7] 반란 주모자 중 파시피쿠 리쿠탕(Pacifico Licutan)는 채찍질 1,200번을 당하고 죽었다. 그것도 도중에 죽지 말라고 여러번 나누어 집행했다.[8] 말레는 대개 무슬림이었는데 1910년만 해도 이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질 내의 흑인 무슬림이 10만명 정도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브라질의 주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오늘날 브라질 흑인/파르도 인구 중 무슬림은 거의 사라졌다.[9] 19세기 중반 이후 브라질 북동부는 사탕수수 농사를 지으면 카리브해의 영국, 네덜란드 플랜테이션과 경쟁이 안 돼서, 대신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서만 재배 가능한(다시 말해서 해안 섬 지대에서 재배하기 힘든) 커피 농사에 집중하게 되었다.[10] 산탄데르는 한때 볼리바르의 부관이었지만 그란 콜롬비아의 정치 체제를 두고 볼리바르와 갈등을 빚어(산탄데르는 연방주의를 추구했다) 1820년대 후반이면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다. 볼리바르 몰락 후에도 산탄데르는 볼리바르파의 잔여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했다.[11] 첫번째 재임기에 모스케라는 보수주의자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지만 임기 중 자유주의에 가까운 정책을 펼쳐서 보수주의자의 원성을 샀다.[12] 흔히 알려진 것처럼 5월 혁명에서 독립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다. 임시정부가 대체하고자 한 것은 어디까지나 기존 부왕령(viceroyalty) 체제였을 뿐, 적어도 명목상으로나마 스페인 국왕의 이름 하에 권력을 추구했다. 물론 스페인 아메리카 식민지의 기반 그 자체였던 부왕령 체제와 스페인 본토에서 임명된 부왕을 독단적으로 갈아치웠다는 점에서 현지 크리오요 엘리트들은 스페인 입장에서는 그냥 훌륭한 반역자 1에 지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실제 목적은 스페인 국왕마저 갈아치우고 독립하는 것에 있었다는 분석도 있으며 실제 역사도 그렇게 흘러갔다.[13] 연방국가와 대비되는 단일국가(Unitary state)가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다. 국가 체제를 따지고 할 것 없이 아예 한 국가라고 보기도 힘들었다는 것이다.[14] 중앙주의-연방주의 대립에서 연방주의에 속했지만 정작 자기가 독재할 때는 중앙집권을 추구했다. 로사스가 기회주의자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젊은 시절 제 버릇 개 못 준 전형적인 카우디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애초에 연방주의든 중앙주의든 성향 불문하고 자기 영지에서는 왕처럼 살면서 지역 주민의 생사를 가르던게 라틴아메리카 카우디요들이다.[15] 각 주가 의회에 동일하게 2명씩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했는데 이것은 제일 인구가 많고 부유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위상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것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영향력을 제한하려고 했던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Justo José de Urquiza)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다.[16]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벌어들이던 관세를 국유화하고 파라나 강과 우루과이 강의 자유무역을 허용했다.[17] 사실 아르헨티나는 원래 부왕령의 일부였다가 분리독립한 파라과이가 독립국으로 남는 것 자체가 싫어서 파라과이의 일부 지역을 브라질에게 더 나눠주고 나머지는 합병해서 멸망시키려고 했지만 브라질의 만류로 실패했다. 전후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에게 미시오네스의 동쪽 절반을 할양하면서 현재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국경선이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