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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3:19:13

르호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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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호보암
רְחַבְעָם | Rehoboam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Rehoboam._Fragment_of_Wall_Painting_from_Basel_Town_Hall_Council_Chamber%2C_by_Hans_Holbein_the_Younger..jpg
바젤 시청사 벽화에 묘사된 르호보암 왕.
<colbgcolor=#0038B8><colcolor=#fff> 출생 기원전 972년
이스라엘 왕국 예루살렘
사망 기원전 913년 (향년 59세)
유다 왕국 예루살렘
묘소 예루살렘 다윗성
재위 기간 이스라엘 국왕
기원전 931년 (1년)
남유다 국왕
기원전 931년 ~ 기원전 913년 (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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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B8><colcolor=#fff> 지파 유다 지파
전임자 솔로몬
후임자 아비얌
부모 아버지: 솔로몬
어머니: 나아마
가족관계 아들: 아비얌 등 28명
딸: 6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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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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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윗의 손자이자 솔로몬의 아들로 이스라엘 왕국을 물려받는다. 히브리어 원음로는 르하브암이라 부르며, 어머니는 암몬 출신의 나아마(가톨릭 표기)다.

2. 상세

아버지 솔로몬으로부터 이스라엘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실정으로 다윗 왕가에 대한 반감이 폭발 직전까지 갈 정도로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에 백성들은 여로보암을 앞세워 부역과 세금을 낮춰 달라는 요구를 하자 3일 뒤 답변하겠다고 한 뒤, 먼저 아버지를 모시던 장로들과 상의했는데, 장로들은 아버지 때 너무 과했으니[1] 여로보암과 백성들의 의견을 들어줄 것을 충고하였다. 그 다음에는 자신과 함께 자랐던 귀족 출신의 소장파 신하들[2]에게 또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가뜩이나 가혹한 세금과 노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너무 풀어주면 건방져진다며 더 가혹하게 통치하라는 조언했다. 결국 르호보암은 약속한 사흘이 지나 백성들이 찾아오자 젊은 신하들의 주장을 선택하고 말았다.

[ 르호보암에게 백성을 더 가혹하게 대하라고 권하는 젋은 신하들의 조언에 대한 각 한국어 번역 비교 ]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아뢰어 이르되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열왕기상 12:10~11 개역개정판
왕과 함께 자란 젊은이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백성들이, 선왕께서 메워주신 멍에가 무거우니 그것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구하더라도 임금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나의 새끼손가락이 부왕의 허리보다 굵다.
너희는 부왕께서 메워주신 멍에가 무겁다고 한다마는, 나는 그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너희에게 지우리라. 부왕께서는 너희를 가죽채찍으로 치셨으나 나는 쇠채찍으로 다스리리라.'"
열왕기상 12:10~11 공동번역성서
그러자 임금과 함께 자란 젊은이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메우신 멍에가 무거우니 그것을 가볍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저 백성에게 임금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소.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는데, 나는 그대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소.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
열왕기상 12:10~11 주교회의 인준본 가톨릭 성경

당연히 다윗 가문에게 반감이 터진 10지파는 분노하여[3] "우리와 다윗과 무슨 연관이 있나, 이새의 아들에겐 더 기대할 것이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모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자. 다윗, 너는 이제 네 가문이나 잘 챙겨라." 하고는 여로보암을 이스라엘의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결국 르호보암이 통치하는 영역에는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만이 남았다.[4] 그의 왕국이 유다 왕국이라 불리는 이유이다.[5]

이에 르호보암은 여로보암을 토벌하기 위해 18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했지만 선지자 스마야가 이를 막아서자 그의 말을 듣고 북벌을 물린다. 이후 정통 신앙을 수호하는 듯하다가 교만해져서 이방신을 섬겨 이로 인해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다고 한다.

재위 5년차에는 이집트에게도 침략을 받아 시삭[6]이라는 파라오에게 탈탈 털려서 왕궁까지 유린당했다. 그때서야 르호보암은 하느님을 찾았다. 이후에도 여로보암의 이스라엘 왕국과 분쟁을 이어가는 등 외교적으로 무능했다.[7] 하지만 정력은 정말 임금다워서 아내 18명과 첩 60명에게서 아들 28명, 딸 60명을 낳았다. 많은 자식들 중 아비얌에게 재위를 넘겨주었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그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것이었다.


[1] 이스라엘의 황금기였던 절대 군주 솔로몬 통치 당시는 7년 간 성전을 건축하고 13년 간 왕궁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 곳곳에 수많은 성과 요새를 짓는 등 수많은 노역에 시달린 시기였기 때문이다.[2] 성경에서는 같이 자란 청년들(소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네에 흔히 돌아다니는 청년들은 아닐 것이고 귀족 자제 출신 젊은 신하를 말하는 것이다.[3] 학자들 가운데는 이미 이전부터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힘을 모은 10지파의 수뇌부가 합심하여 왕국의 분열까지도 각오한 채로 르호보암에게 협상을 하고자 마음 먹고서 나아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4] 이마저도 당시 벤야민 지파는 사실상 유다 지파와 동화된 상태였다.[5] 대하 10:15을 보면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한 것은 하느님이 아히야로 하여금 여로보암에게 10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될 거라고 예언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였다.[6] 셰숑크 1세, 기원전 943~기원전 922년 재위, 고대 이집트 제22왕조의 창시자.[7] 다윗과 솔로몬도 정치적인 특면에서 상당히 부실하긴 했지만 그래도 국내외의 크고 작은 혼란 정도는 수습했다. 반면 성경에 기록된 모습만 보면 르호보암은 각 지파마저도 통제하지 못하는 일말의 정치력도 없는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