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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왕국 제2대 국왕 아비얌 אֲבִיָּם | Abijah | |||
<colbgcolor=#0038B8,#467EFF><colcolor=#fff> 출생 | 기원전 950년경 | ||
예루살렘 | |||
사망 | 기원전 910년경 | ||
예루살렘 | |||
재위 기간 | 제2대 남유다 왕국 국왕 | ||
기원전 913년 ~ 기원전 910년 (약 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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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르호보암 | ||
후임자 | 아사 | ||
부모 | 아버지 르호보암 | ||
자녀 | 아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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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유다 왕국의 제2대 국왕. 아버지는 선대 왕인 르호보암이며, 어머니는 아비살롬의 딸인 마아가였다.[1] 고조부는 이새고, 증조부는 다윗, 할아버지는 솔로몬이다.2. 행적
부왕 르호보암 때문에 분열된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 1세와 전쟁을 벌였다. 에브라임 전투에서 남유다의 40만 대군과 북이스라엘의 80만 대군[2]이 맞붙었는데 이때 스마라임 산에서 레위 지파 제사장을 쫓아낸 북이스라엘 왕국의 부당한 풍속을 비난하며[3] 남유다 왕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유다 왕 아비얌 연설의 기조는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역설하고, 반역을 일으킨 북이스라엘을 배반자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북이스라엘군이 복병을 숨겨 두어 포위 공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전하여 북이스라엘군 50만을 궤멸시키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이 승리로 베델, 여사나, 에프론을 수복할 수 있었다. 에프라임 전투 패배로 여로보암 1세는 생전에 군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아비얌은 14명의 아내에게서 아들 22명과 딸 16명을 두었으며 그중 아사가 보위를 이었다.[1] 역대기에서는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인 미가야의 아들 아비야라고 기록한다.[2] 여담으로 이 숫자는 상당히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수백년이 지난 시점에 진시황이 흉노 정벌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긁어 모아 만든 병력이 20만명이 채 못되었었다. 애초에 저 시점이면 고대국가의 기틀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연맹왕국 수준이라 저런 규모의 병력을 모으지도 못하고 모았다간 전쟁은 커녕 지휘권을 놓고 내전이나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대 대한민국 국군이 국민 5천만 명 중에서 36만 명 뽑아 육성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민 1천 5백만 명 중에서 18만 명 뽑아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을 보면 무리하면 저 정도 규모가 가능할 수도 있다.[3]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1세로 인해 정통 야훼 신앙을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