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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23:22:21

여호사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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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여호사밧 Jehoshapat
출생 기원전 907년경
미상
사망 기원전 847년경
미상
출신 유다 지파 소속
재위년도 기원전 872년~기원전 847년
약 25년 (성경)
국적 남유다 왕국
아버지 아사
자녀 여호람(유다)
이전 국왕 아사
다음 국왕 여호람(유다)

1. 개요2. 업적
2.1. 우상숭배 금지2.2. 부국강병2.3. 종교 개혁2.4. 암몬과의 전쟁
3. 외교-군사적 실책4. 역사적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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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호사밧은 35세에 유다 왕이 되어 25년 간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실히의 딸로서 이름은 아주바였다고 하였다.
역대하 20:31 (공동번역성서)
남유다 왕국의 제4대 왕(재위 기원전 870년 ~ 기원전 848년). 한국 천주교 성경에서는 여호사팟이라고 한다. 행정적으로 뛰어났고, 외교력을 동원해 국력을 신장시켰으나 나중에 전투 한번 잘못 참여했다가 군사력을 모조리 날려먹은(...) 왕이다.

주요 치적으로는 유다 왕국의 체제를 정비하였고, 국력을 모아 주요 강국으로 성장시켜 그동안 적대했던 북이스라엘동맹 관계를 맺고, 조공 무역을 이웃 약소국가인 모압, 에돔에서 받아내는 등 유다 왕국의 영향력을 크게 늘렸다. 또한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민심을 결집시켜 내부 민족 결속을 다지는 등 내치에서는 굉장히 유능한 면모를 보였다. 아래 후술할 실책 이후에는 재판관들을 각지에 세우는 등, 체제 정비에 힘썼다. 그래서인지 히즈키야와 더불어 열왕기에서 평가가 좋은 왕 중 하나다.

2. 업적

2.1. 우상숭배 금지

예호샤팟은 전왕 아사와 실히의 딸 아주바의 아들로 하느님을 잘 섬기고 옳은 일을 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 아사의 시대까지 남아 있던 아세라 목상[1]들과 산당[2] 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유다의 모든 성읍에 군대를 배치해 튼튼하게 했다. 또한 유다 땅과 자기 아버지 아사가 정복한 에프라임[3]의 성읍들에도 수비대를 두었다.

재위 3년째 되는 해에는 대신들을 유다 성읍들에 보내 백성들을 가르치게 했다. 또 그들과 함께 레위인들을 엘리사마 사제와 여호람 사제와 함께 보냈다. 그들을 신의 율법서를 가지고 유다 백성들을 가르쳤다.

2.2. 부국강병

이렇듯 유다가 강성해지자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여호사밧에게 전쟁을 걸지 못했다. 그리고 점차 주변 나라들이 유다에 조공을 보내기 시작하여 필리스티아인들은 은을 예물로 가져오기도 하고 아라비아인들도 숫양 7,700마리와 숫염소 7,700마리를 가져왔다.

예호샤팟의 세력을 점점 세져 유다에 요새와 양곡 저장 성읍들을 세워 많은 일을 하고 예루살렘에는 전사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그의 재위기 때 유다군의 총 군사 수는 유다 집안의 천인대장 아드나 휘하의 군대 30만, 그 밑의 천인대장 여호하난과 그의 부하 휘하의 군대 28만, 그 밑에 신을 위해 자원한 지크리의 아들 아마스야 휘하의 군대 20만, 베냐민 집안의 용사 엘야다 휘하의 군대이자 할과 작은 방패로 무장한 군사 20만, 그 밑에 여호사밧과 그의 휘하 군대 18만 등 총 군사가 116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임금이 모시는 군사로 임금은 그 밖에도 온 유다의 성읍들에 이들 군대를 배치하였다.

다만 해당 병력의 숫자는 교차검증상 수사학적 과장으로 보이며 학자들도 그렇게 추측한다. 만약 실제로 저 병력이 실재했다면 유다 왕국은 길르앗 라못서 이 모든 병력을 날려버린 후 인구 회복이 불가능한 숫자이기 때문.[4]

2.3. 종교 개혁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에 머물다가 다시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 산악 지방의 백성들을 둘러보며 그들의 신을 믿게 하였다. 그는 유다 전역의 모든 요새 성읍에 일일이 판관들을 세웠으며 예루살렘에도 레위인들과 사제들과, 이스라엘 가문의 우두머리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세워 신을 대신해 판견을 내리고 송사를 해결하게 하였다. 이것으로 신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아마르야 사제가, 임금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이스마엘의 아들 즈바드야가, 레위인들은 관리자로서 그들을 돕게 되었다.

2.4. 암몬과의 전쟁

모압인들과 암몬인, 므운인들이 여호사밧에게 싸움을 걸어왔고 전령들이 여호사밧에게 이를 보고하였다. 이들 무리는 에돔에 주둔하여 하차촌 타마르, 곧 엔 게디에까지 진격했다. 여호사밧은 두려워 신에게 기도를 했고 그러던 가운데 즈카르야의 아들 회중 야하지엘에게 신이 내려 암몬인들을 이길 방법을 알려 주었다.

유다군은 군사를 재정비하여 노래하는 자들로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여 신을 찬송하여 이르기를 “야훼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때 신이 암몬인들과 모압인들과 세이르 산 주민들에게 복병을 보내 그들을 완전히 전멸시켰다. 이후에는 모압과 암몬인들이 서로 치킨게임식으로 팀킬전을 벌이다가 모두 궤멸되었고(...), 여호사밧은 많은 전리품을 얻었는데 전리품이 너무 많아 그것을 다 거두는 데 3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9일째 되는 그들을 모두 모여 브라가 골짜기에서 신을 찬미하였다. 이 싸움으로 주변 국가들은 다시 여호사밧을 두려워 하게 되었고 나라는 안정되었다.

3. 외교-군사적 실책

다만 이 여호사밧의 단점이 있었다면 지나친 민족주의자였다는 점. 이것이 국력을 깎아먹는 원인이 된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 공략전에 공동전선을 이뤄 공격해 들어가지만, 결과는 실제 지휘를 맡았던 북왕국 왕 아합이 전사하면서 연합군의 대패(...).[5]

여기서 유다 국방력의 대부분을 날려먹어버리는 통에 결국 굴복시켰던 이웃 국가들이 침공해오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아합 사후에도 여호람과 연합하여 모압 정벌에 참가했다가 물부족으로 곤경에 빠지고 선지자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엘리사는 여호람을 도울 마음이 없었지만 여호사밧은 경건하게 하느님을 모셨기 때문에 여호사밧의 얼굴의 봐서 돕는 거라며 해결해주긴 했다.

이후에도 이런 여호사밧의 기질은 변하지 않아서 북왕국과 또 공동으로 타르시스[6]와의 금무역을 시도했다가 폭풍으로 해군력을 대부분 바다속에 쳐넣어버리는 등(...) 국력을 신장시켰으나 그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이 국력을 깎아먹어 멸망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볼 수도 있다.

4. 역사적 사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남유다 왕국이 사실상 북이스라엘 왕국의 속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성서에서 대등한 동맹관계처럼 묘사된 것과 달리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복종해야 하였고 아합이 군사를 보내라고 해서 군사를 이끌고 갔던 거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예로보암 1세가 북이스라엘을 분립했을때부터 예로보암 측은 10지파 연합을 이끌고 나왔고 분립 당시 북이스라엘 시민들의 지지도 있었던 터라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에 비해 쪽수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1] 木狀, 나무이나 나무 부자재으로 만든 동상을 말한다.[2] 후일의 동양의 조선시대 당파인 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나 촌락에 설치된 제단을 지칭[3] 지금의 요르단강 서안지구[4] 동양에서도 역사적인 사실을 과장해서 기록한 경우가 많다. 자세한 것은 호왈백만 참고.[5] 다만 여호사밧은 내심 탐탁치 않았는지 북왕국의 왕인 아합에게 "그래도 예언자들 말을 들어보고 갑시다." 하고 그랬는데도 모였던 예언자 400명이 전원 아합의 결정을 지지하자 또 혹시 빠진 예언자 없냐고 물어 미가야라는 빠졌던 예언자에게 물었는데 처음에는 다른 예언자들과 같은 말을 하던 미가야가 제대로 말해보라고 아합이 다그치자 "가면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하자 아합이 빡쳤는지 미가야를 가두고 진군해버렸다(...). 즉 여호사밧은 내켜하지 않은 눈치인데 아합이 가자고 하니까 따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아합은 저래놓고 정작 쫄았는지 여호사밧의 마부로 위장하고 참전했다가 엉뚱하게도 눈먼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6] 현대의 스페인 인근으로 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