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마르코스 바페이아디스 Μάρκος Βαφειάδης | Markos Vafeiadis | |
| |
출생 | 1906년 1월 28일 |
오스만 제국 토스야 | |
사망 | 1992년 2월 22일 (향년 86세) |
그리스 아테네 | |
국적 | [[그리스|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NNNcm, NNkg, 혈액형 |
가족 | 이름 (관계) |
학력 |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
종교 | 무신론 |
직업 | 정치인, 군인 |
소속 | 그리스 공산당 |
서명 |
[clearfix]
1. 개요
그리스의 정치인. 그리스 공산당 소속으로, 그리스 내전 당시 공산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2. 생애
마르코스 바피아디스는 1906년 1월 28일,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현재 터키 동부 에르주룸(테오도시우폴리스)에서 태어났다.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군의 패배로 소아시아의 그리스계 주민들이 대거 추방되자 그는 처음에 테살로니키로 피신한 뒤, 카발라로 이주하여 담배 노동자로 일했다.1928년, 그는 테살로니키에 정착하며 이미 그리스 공산주의 청년 연맹(OKNE)의 일원이 되어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1932년, 그의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감옥과 유배 생활을 겪었으며, 1933년 10월 석방된 이후에도 그리스 공산당(KKE)의 지도 하에 펠로폰네소스, 이피로스, 마케도니아 등지에서 조직 활동을 이어갔다. 1936년 8월 4일, 요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독재 정권을 수립하면서 그는 다시 체포되어 아기오스 에우스트라티오스 섬으로 유배되었으나 같은 달 탈출했다. 1937년 여름부터 그는 크레타에서 KKE의 조직을 담당했으며, 1938년 7월 28~29일에 발생한 하니아 반(反)메탁사스 반란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반란이 실패하자 그는 아테네로 도망쳤지만 곧 체포되었고, 이후 아크로나우플리아 감옥과 가우도 섬으로 유배되었다.
1941년 5월, 그는 가우도 섬에서 탈출하여 독일 점령 하의 크레타에서 다시 공산주의 저항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아테네와 테살로니키에서 활동하며 1942년 KKE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마케도니아 지역의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1944년 5월, 그는 국민해방위원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그는 아리스 벨루치오티스와 충돌했다. 벨루히오티스는 영국군과의 전면전을 주장했지만, 바피아디스는 맞서 싸루기 위해서는 게릴라 전투 방식을 고수해야 한다며 이에 반대했다. 1944년 12월, 아테네에서 발생한 데켐브리아나 동안, 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ELAS 부대는 영국군과 직접적인 충돌을 피했다.
1946년 2월, 바피아디스는 KKE의 지도자 니코스 자카리아디스와 의견 충돌을 겪었다. 자카리아디스는 무장 투쟁을 통한 혁명을 주장했지만, 바피아디스는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1946년 7월, 자카리아디스는 바피아디스를 산악 지역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 게릴라 부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바피아디스는 1946년 8월 말, 자카리아디스와의 회담 후 산악 지역에서 무장 투쟁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받고 전선에 나섰다. 그는 서부, 중부, 동부 마케도니아, 중앙 핀도스, 루멜리아 등지에서 활동하며 우익 민병대와 경찰대를 격퇴하고, 자유 지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KKE의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그는 22,000명의 게릴라 전력을 확보했다고 보고했으며, 이에 따라 당은 1948년까지 마케도니아를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46년 10월, 민주군(DSE) 총사령부가 창설되면서, 바피아디스는 공식적으로 DSE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47년 12월 24일에는 ‘임시 민주정부’ 총리 및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두고 자카리아디스와 계속 갈등을 빚었으며, 1949년 1월 30일, KKE의 5차 전체회의에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50년 10월, KKE 3차 대회에서 그는 당에서 공식적으로 축출되었으며, 당시 그는 소련에 망명 중이었다. 그는 총회에서 쫓겨나 즉시 알바니아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소련으로 옮겨져 30년 이상 그곳에 머물렀다.
""우리는 정규군이 아닙니다. 그리고 정규군처럼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게릴라군이며, 그런 방식으로 싸워야 합니다. 또한 모든 병력을 그라모스에 집중시키면 그리스 전역에서 병력이 공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정부군이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어 우리를 괴멸시킬 수 있습니다. 정부군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원하는 곳에 신속하게 부대를 배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한 전략은 게릴라 전술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표를 선택하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유리한 지형에서 싸워야 합니다."
1957년 2월, KKE 지도부가 자카리아디스와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갈등으로 인해 니코스 자카리아디스를 축출하고 코스타스 콜리얀니스가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되면서, 바피아디스는 KKE 정치국 위원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1958년 1월, 그는 다시 지도부에서 제거되었고, 1964년 6월에는 KKE에서 완전히 제명되었다.
1968년, KKE가 내분으로 분열되면서, 바피아디스는 KKE 내의 개혁파에 의해 복권되었다. 1983년 3월 26일, 그는 33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그리스로 귀환했다. 1984년 5월 23일, 그는 내전 당시 상대편 지휘관이었던 트라시볼로스 차칼로토스와 만나, 국가적 화해를 촉구하며 역사적인 화해의 순간을 연출했다.1985년부터 그는 PASOK과 협력하기 시작했으며, 1989년 11월과 1990년 4월 총선에서 PASOK의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마르코스 바피아디스는 1992년 2월 22일, 아테네의 소티리아 병원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86세였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국회의원 자리는 코스타스 라리오티스가 승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