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01 09:57:29

마츠토야 마사타카

<colbgcolor=#43434e><colcolor=#fff>
마츠토야 마사타카
松任谷 正隆 | Masataka Matsutoya
파일:matsutoya masataka profile.png
본명 마츠토야 마사타카 ([ruby(松, ruby=まつ)][ruby(任, ruby=とう)][ruby(谷, ruby=や)] [ruby(正隆, ruby=まさたか)])
출생 1951년 11월 19일 ([age(1951-11-19)]세)
도쿄도 스기나미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 졸업)
배우자 마츠토야 유미(1976. 11. 29. 결혼 ~ 현재)
데뷔 1971년 ~ 현재
직업 키보디스트, 편곡가, 프로듀서, 작곡가
소속사 키라라샤(雲母社)[1]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데뷔까지2.3. 데뷔 이후2.4. 아라이 유미2.5. 이후
3. 디스코그래피4. 편곡 목록5. 저서6.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음악가. 일본의 국민 싱어송라이터인 마츠토야 유미의 남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애칭은 만타(マンタ).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matsutoya masataka1.jpg
마츠토야 마사타카는 1951년 11월 19일에 태어나 할아버지의 집인 도쿄도 스기나미구 가미타카이도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대지주로 막대한 부동산 수입이 있었고, 아버지는 요코하마 쇼킨 은행 이사 지점장으로 300여 평의 광대한 부지에 연못과 테니스 코트가 있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어머니는 마츠토야 마사타카에게 일찍이 4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했고 절대음감이 있어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TV에서 들은 멜로디를 금방 연주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피아노 학원에 다니며 꾸준한 연습을 이어나가는 게 싫어 마음대로 건반을 두드리고 규칙 없는 소리를 연주하기 일쑤였다.

마츠토야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공황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전철을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 증상이 나타나면 중간에 역장실에서 쉬거나 그 길로 등교 거부를 했다. 단체 행동도 서툴러 중・고등학교 수학여행은 모두 빠졌다. 그런 그가 겨우 등교할 수 있었던 것은 전철 안에서 망상에 빠져있는 것.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객석에서 큰 박수와 환호가 오가는 가상의 세계가 그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클래식 이외의 음악은 더러운 것으로 생각했으나, 중학교 입학 후 여자애들을 상대로 하는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엉뚱한 칼리지 포크 연주를 보고 자극을 받는다. '이런 패거리들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는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든 후부터 클래식 이외의 레코드를 구입하고 친구들과 포크 밴드를 만들었다. 게이오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할머니에게 빚을 내 비싼 밴조를 사서 대학생들과 밴드를 결성하며 음악에 푹 빠지는 나날들이 이어진다. 그런 탓인지 성적이 전교 꼴찌에서 두 번째로 내려가 버리고 만다. 진학 할 수 있는 과는 그나마 문학부였는데 그마저도 위태로웠다. 결국 부모가 과외 교사를 5명이나 붙여 간신히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에 입학한다.

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공황장애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생활을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긴 방학이 있는 학교 교사로 전향할까도 생각했지만 음악적인 재능의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2.2. 데뷔까지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한 사이였던 스가 세츠카라는 친구가 있었다. 마츠토야가 스가의 집에 놀러 온 어느 날, 방에 있던 전화기가 울렸다. 말투로 여자아이인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그녀가 음악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비틀즈가 어떻고, 프로콜 하럼이 어떻고 등의 밴드 이름이 들려왔다. 스가는 "이 애, 은근 유명해. 아직 중학생인데 신주쿠롯폰기 가게에 자주 드나들면서 곡도 만들더라." 그가 아라이 유미의 존재를 처음 안 순간이었다.

아오야마 학원에 다니는 하야시 타츠오[2]라는 동료도 생겼다. 하야시가 마츠토야에 집에 놀러 가서 한창 음악 이야기로 분위기가 고조 되어갈 때, 아래층에 전화기를 빌려 옛 친구인 호소노 하루오미에게 전화해 "좋은 키보디스트를 찾았다"고 전한다.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치는데, 마츠토야의 어머니였다. "우리 아들을 이상한 세계로 유혹하지 말아 주세요."라며 째려보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이 된 마츠토야는 키보디스트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그날도 시부야에서 하야시와 함께 스가의 아마추어 콘테스트 세션을 맡고 있었다. 관객은 드문드문 있었고 박수도 없었지만, 압도적으로 우승했다. 정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마츠토야와 하야시에게 다가온다. 그 사람은 당시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로 유명했던 카토 카즈히코였다. 두 사람의 실력에 흥미를 느낀 것인지 스테레오 광고 음악 의뢰를 부탁했다. 그렇게 부름을 받고 스튜디오에서 하야시와 녹음에 참여한다. 이후 요시다 타쿠로의 '결혼하자' 편곡을 맡으며 점차 프로의 길을 걸어간다.

2.3. 데뷔 이후

데뷔 후, 하야시의 권유로 포조 하프라는 밴드에 함께 가입했지만 마츠토야와 멤버 사이간의 불화로 해체된다.[3] 하야시가 마츠토야에게 쌓인 화를 어느 정도 가라앉혔는지 호소노 하루오미가 새 밴드에 키보디스트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츠토야를 불렀다. 그렇게 결성된 밴드가 캐러멜 마마. 그러나 마츠토야에게는 마땅치 않은 활동이었으니, 앨범도 만들었지만 장인정신으로 뭉친 밴드였다 보니 멤버들의 마음도 제각각이었다.

이 무렵의 마츠토야는 진지하게 자신의 음악적 방향성을 제대로 찾지 못해 고통스러웠다. 대학에 다시 들어가 교직 과정을 밟고 음악 교사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2.4. 아라이 유미

파일:matsutoya1.jpg
이야기는 운명의 상대인 아라이 유미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캐러멜 마마가 1973년 아라이 유미의 정규 1집 ひこうき雲의 세션을 맡으면서 자연스레 인연이 되었다. 당시 아라이 유미는 타마미술대학 1학년이었고 마츠토야 마사타카는 게이오기주쿠대학 3학년이었는데, 서로 첫인상이 굉장히 안 좋았다고 한다. 아라이 유미의 머릿속에는 프로콜 하럼의 음색이 울려 퍼지는 한편 마츠토야 마사타카는 외모도 패션도 아메리칸 스타일이었고 그녀와는 반대로 브리티시 록을 싫어했다. 또한 마츠토야는 처음 그녀를 보고 '언더그라운드'라고 생각했다.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고 했지만 그저 그 옷이 디올인지 몰랐을 뿐. 그 밖에도 그는 청초한 여성이 취향이었으며 아라이의 피아노 실력이 뮤지션급인 걸 알고 같은 키보드를 치는 그는 "제가 할 일은 없나요?"라며 투덜거렸다고 한다. 이 둘은 여러모로 정반대의 성격이었으나 키보드 녹음 파트가 길어지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는 일이 많아진다.

비행기구름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몇 번을 불러도 잘 안되고 녹음할 날도 얼마 안 남은 상황에 마츠토야 집 근처에 있는 이노카시라 공원을 둘이서 산책하던 중 좋아하는 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라이는 달리아라고 대답했고 그다음 날 그녀가 '오늘은 꼭 녹음 오케이 받아야지'하고 굳게 마음을 먹으며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마츠토야가 가져다 놓은 한 송이의 달리아가 피아노 위 우유병에 꽂아져 있었다. 그날 아라이가 무사히 녹음을 마친 곡이 '비 내리는 거리를'이다. 이후 마츠토야는 아라이의 레코딩에 깊이 관여하고 그녀의 재능을 인정한다.

진로를 찾지 못해 늘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던 일상 속에서 그녀와 그녀의 음악에 구원을 받았으며, 드디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찾은 듯 했다. 그렇게 아라이 유미와 마츠토야 마사타카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가 된다.

취업 생각을 그만두고 음악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무렵, 반대하던 부모도 포기했다. 하지만 졸업만은 하고 싶었다. 음악 활동 때문에 학교를 아예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라이 유미와 둘이서 기도하면서 미타 캠퍼스 학생과에 문의하러 간 적도 있었다. 보다 못한 마츠토야의 대학 친구가 노트를 주었고 시험을 볼 때 그 노트로 컨닝을 하며 성적을 유지했다. 친구의 간 건강이 나빠져 반년 동안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본인의 여자친구를 통해 조용히 답안을 보여주는 식으로 시험을 봤다. 마츠토야는 이 두 사람 덕에 간신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2.5. 이후

1976년에 아라이 유미와 결혼. 아라이 유미가 마츠토야 유미로 활동을 재개한 후부터 현재까지 그녀의 곡을 편곡 및 프로듀싱 해오는 중이며,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수의 곡과 프로듀서도 담당하면서 일본 음악계에 거물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오하라 레이, 스즈키 시게루, 하야시 타츠오와 함께 'SKYE'라는 밴드로도 활동 중이다.

3. 디스코그래피

4. 편곡 목록[6]


그 외 다수

5. 저서

6. 외부 링크



[1] 아내 마츠토야 유미의 매니지먼트를 위해 설립된 2인 전용 기획사.[2] 드러머. 이후 마츠토야 마사타카와 함께 캐러멜 마마의 멤버가 되고 아라이 유미의 앨범 세션을 맡는다.[3] 밴드 활동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그는 일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둥의 거짓말을 하며 빠졌다. 결국 똑같은 거짓말을 세 번이나 반복해 하야시에게 들통이 난 것. 아내 마츠토야 유미도 방송에서 "거짓말 엄청해요."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거짓말쟁이로 유명하다.[4] 앨범 표지는 아내 마츠토야 유미가 그렸다.[5] 수록곡 'HONGKONG NIGHT SIGHT'은 마츠토야 유미도 커버해 자신의 미니 앨범 '水の中のASIAへ'에 수록됐다.[6] 아내 마츠토야 유미는 예외.[작사・작곡] [작곡・편곡] [작곡] [10] REIMY에 수록된 ノーサイド(노 사이드)와 싱글 青春のリグレット은 마츠토야 유미 본인도 커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