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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11:01:35

매염방

아니타 무이에서 넘어옴
매염방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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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ong_Kong_Film_Award_Trophy.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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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염방
梅艷芳 | Anita Mui
파일:매염방프로필사진3.jpg
<colbgcolor=#29323c> 본명 매염방(梅艷芳 | Anita Mui Yim-fong)
출생 1963년 10월 10일
영국령 홍콩 구룡반도 웡곡
(現 홍콩 구룡반도 야우침몽구 몽콕)
사망 2003년 12월 30일 (향년 40세)
홍콩 홍콩 섬 완차이구 해피밸리 컨발센트병원
국적
[[틀:국기|]][[홍콩|]][[틀:국기|]]
묘소 홍콩 Po Lin Monastery (보린사)
신체 168㎝ | 47㎏ | B형
본적 광둥성
직업 가수, 배우
종교 불교
언어 광둥어, 보통화, 영어
학력 중졸
가족 2남 2녀 중 막내, 어머니
별명 梅姐, 阿梅, 梅姑姑
데뷔 1982년 1집 앨범 《心債》
취미 테니스, 음악, 독서
대표작품 동방삼협 (東方三俠)
영웅본색 3 (英雄本色)
신조협려 (九一神鵰俠侶)
심사관 (審死官)

1. 개요2. 앨범 목록3. 영화4. 수상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chinasmack.com/anita-mui-02.jpg
홍콩의 가수배우. 20세기 후반 홍콩 느와르, 무협 영화의 전성기 당시 카리스마 여배우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있었으며, 1988년 5월에는 서울프레올림픽쇼에 홍콩 가수 자격으로 출연했다. 생전에 장국영과의 친분이 깊었으며, 그가 자살 직전 매염방과 전화 통화를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코믹 연기에도 굉장히 능해 주성치 영화에도 여배우들 중에서는 가장 자주 출연한 편에 속하기도 했다.

1988년 일본 후지 TV에 한 쇼프로에서 MC 를 한국 중국 양국에 당시 대세배우들을 찾아서 격주로 돌아가면서 쇼프로를 진행했는데 그때 한국 배우는 이혜숙이었다.

2003년 9월 기자 회견에서 자궁경부암 판정을 받았다고 고백했으며 같은 해 12월 30일에 향년 40세로 생을 마감했다.[2]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인생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다는 의미에서 2003년 11월 웨딩드레스를 입고 히트곡 석양지가를 부르면서 콘서트의 끝을 맺었는데[3] 이 때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하다.[4] 그녀의 언니 매애방도 2000년에 자궁경부암으로 세상을 떠나서 그녀는 생전에 자궁 경부암에 대한 집안 내력이 있다고 밝혔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전 재산을 기부 및 여러 모로 처분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의미에 불교 자선단체에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으나, 매염방 사후 모친[5]이 그 유언장이 가짜라고 주장하면서 자선단체를 상대로 딸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기도 했으나 홍콩법원에서 패소판결을 내리기도 했다.[6] 매염방의 시신은 홍콩 케이프 콜린슨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보린사에 안치되었다.[7]

옹핑 360에 매염방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2013년 12월 30일에는 그녀의 10주기를 맞아 장학우, 증지위가 주최한 '매염방.10.사념.음악.회(梅艷芳。10。思念。音樂。會)'[8]가 열렸고, 2014년에는 홍콩 스타의 거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소룡의 동상에 이어 두 번째로 스타의 거리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동상 아래에 새겨진 '홍콩의 딸 매염방(香港女兒梅艷芳)'이라는 글씨는 유덕화가 그녀를 기리는 마음으로 남긴 친필이다.

일본의 유명 아이돌 콘도 마사히코와 1985-1986년 당시 연인관계였다.[9]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몽반(夢伴)은 콘도 마사히코의 동명곡을 번안한 곡이다.[10]

국내 더빙은 MBC 성우는 윤소라이고 KBS판에서는 서혜정, 이현선, 최문자, 안경진이 번갈아 맡았다.

2021년 매염방의 전기 영화 《매염방: Anita》가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공개되었다. 이후 2022년에 5화로 구성된 디렉터즈컷 시리즈로 디즈니+에 올라왔으며 한국에도 5월에 올라왔다.

2. 앨범 목록

3. 영화

한국에 미출시된 몇몇 영화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4. 수상



[1] 조연상은 제4회 부터 수상하였다.[2] 그래도 9월 기자 회견에서는 암판정을 받았으나 말기암은 아니라서 지금처럼 치료에 전념하면 충분히 나을 수 있으니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밝히기도 했다.[3]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 게 생전의 큰 소원이자 행복이었다고 한다.[4] 현재도 아시아권의 많은 연예인들이 이 모습을 오마주할 정도로 유명하다. 2016년 중국판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바다 역시 경연에서 '석영지가' 를 부르며 이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5] 이 모친은 심지어 소송에 재산을 다 탕진하느라 그나마 매염방이 생전에 남겨준 유산마저도 없는 상태라고 한다. 사실 매염방의 유년시절부터 제대로 된 교육은 안시키고 부려먹는 차원에서 연예활동을 시키고 딸의 죽음 이후에는 딸의 유산만 탐내고 있는 그야말로 막장부모의 전형이기때문에 매염방의 팬들은 이 모친을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로 취급한다. 최근까지도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심지어 영화 <매염방>의 저작권침해를 주장했다가 세간의 비웃음을 사기까지 한건 덤. 심지어 2023년을 기점으로 100살을 넘겼음에도 정정함을 유지하면서(?) 지금도 계속 소송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궁경부암이 집안 내력이었던만큼 이 모친도 매염방, 매애방 자매처럼 자궁경부암 판정을 받았으나 세상을 떠난 딸들과 달리 완치판정을 받기까지 했다.[6] 그나마 모친의 몫으로 매염방이 남겨준 돈마저 이 소송에 탕진하느라 생활고에 시달릴 정도라고 한다.[7] 자신의 생전 절친이었던 장국영과 같은 곳에서 화장되었다.[8] 장학우, 장혜매, 임억련, 초맹, 두덕위, 하운시, 양천화, 소영강, 양한문, 허지안, 양조위, 임자상, 정수문, 진혁신, 곽부성, 유덕화가 매염방의 곡을 부른 뒤, (엔딩곡인 석양지가를 부르기 전에) 무대에 올랐던 이들을 포함해서 성룡, 유가령, 양가휘, 장만옥 등의 출연진들이 붉은 색 장미꽃을 들고 석양지가를 제창했다. ##[9]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나카모리 아키나가 그의 연인으로 훨씬 유명했다. 한마디로 콘도가 양다리를 걸친 셈.그는 결혼 이후에도 불륜을 저질렀고, 결국 연예계에서 은퇴 또한 매염방은 나카모리 아키나의 당시 곡들(Oh no, Oh yes!, 난파선 등)을 중국어로 커버하기도 했었다.(...)[10] 이외에도 석양지가(夕陽之歌) 역시 콘도 마사히코의 석양의 노래(タ焼けの歌)를 번안한 곡이다.[11] 床前明月光. 이백의 시 정야사(靜夜思)를 소재로 부른 노래.[12] 장국영, 장만옥과 함께 주연을 맡았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 극중에서 장만옥에게 빠져있는 장국영을 괴롭히면서(...) 대놓고 좋아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로 나왔으며 이 작품에서 장만옥이 로맨스를 강조한 이미지라면 장국영 망가뜨리기로 점철된(...) 코미디적인 요소는 매염방이 크게 활약했다.[13] 매염방의 영어 이름이기도 하다.[14] 주윤발과 함께 주연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홍콩으로 건너온 대륙 청년인 주윤발을 일류 플레이보이로 교육시키면서 점차 그에게 빠져드는 츤데레(...)적인 면모를 잘 연기해냈다.[15] 한국 개봉은 1992년[16] 보통 주성치는 주연 작품에서 기본적으로 무술에 능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말 싸움을 못하는 약골로 등장하고 오히려 매염방이 무술 고수로 등장해 위기 때마다 남편을 구하러 날아온다.[17] 제12회 금상장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완령옥'의 장만옥에게 근소한차로 수상하지 못했다.[18] 심사관 이후 1년만에 주성치와 주연을 맡은 작품.[19] 3000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20] 영화 제목과 동명의 노래로 매염방이 부른 노래[21] 1990년 생일날 더 이상 홍콩 내에서 가수 상을 받지 않겠다는 입장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