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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36:49

무악재

<colbgcolor=#363><colcolor=#fff> 무악재
毋岳岾
위치 <colbgcolor=#363><colcolor=#fff>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서대문구 현저동·홍제동
좌표 북위 37°34'44"
동경 126°57'12"
해발고도 75m
1. 개요2. 이름의 유래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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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서대문구 현저동서대문구 홍제동 사이에 있는 해발고도 75m의 고개. 이칭으로는 무학재(無學岾)·무악현(毋岳峴)·무학현(無學峴)·모래재·길마재·추모현(追慕峴) 등이 있으며, 모래재를 한자훈차하여 사현(沙峴), 길마재를 한자로 훈차하여 안현(鞍峴)·안령(鞍嶺) 등으로도 불렀다.

북동쪽으로는 인왕산, 남서쪽으로는 안산(鞍山)이 있으며, 통일로가 이 고개를 지나간다. 지하로는 서울 지하철 3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인근에 3호선 무악재역이 있다.

2. 이름의 유래

이 고개는 신라시대 무렵부터 모래재, 혹은 사현(沙峴)이라고 불렀는데, 이 고개 근방에 신라시대에 세워진 인 사현사(沙峴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밖에도 말안장 같이 생긴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고 하여 길마재, 혹은 안현(鞍峴)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이 세워진 후, 새로운 도읍를 물색하라는 태조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는, 한양 땅을 수도로 삼을 것을 태조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태조를 데리고 이 고개에 올라 한양 땅을 관망하니, 태조 역시 가히 도읍으로 삼을 땅이라며 그대로 한양을 새 도읍으로 결정하였다.

무악재라는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무학대사는 북한산인수봉이 마치 어린 아이가 달아나는 모양이라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지기(地氣)가 빠져나가는 것으로 보았으며, 아이가 달아나지 못 하게 달랜다는 명목으로 한양도성 서남쪽에 있는 안산을 어머니의 산으로 삼아 모악(母岳), 혹은 무악(毋岳)이라 이름을 고쳤다. 이에 따라 안산 북동쪽을 지나가는 이 고개의 이름도 무악재가 되었다. 한편 한양도성 동남쪽에 있는 버티고개는 아이가 달아나면 벌하여 달아나지 못 하게 한다며 벌아현(伐兒峴), 또는 벌아령(伐兒嶺)으로 이름을 고쳤다.

다른 설도 여럿 있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학대사가 태조와 함께 이곳에서 한양 정도(定都)를 하였다 하여 무학재라고 하였던 것이 변하여 무악재가 되었다는 설이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곳을 무학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으며, 인근에 있는 무악재역까지도 무학재역이라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설로는 사람을 모은 뒤에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모아재라고 했던 것이 모악재, 무악재로 변하였다는 설이다.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들이 이 고개를 통하여 인왕산안산을 넘나드는지라, 이 고개를 넘다가 호환(虎患)을 당하던 사람이 많았고, 이에 조정은 사람들이 고개를 아래에 유인막(留人幕)이라 하는 막사를 설치하고, 그곳에 군사들을 주둔시켰으며, 유인막에 행인 10명이 모이면 군사들이 그들을 이끌고 고개를 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군사들이 행인들을 상대로 호송료를 갈취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무악재 호랑이보다 유인막 호랑이가 더 무섭다"는 말을 할 정도로 원성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모화현(慕華峴)이 변하여 무악재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서대문독립공원(舊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중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지금의 영빈관 격인 모화관(慕華館)이 있었고, 모화관 옆에 있던 이 고개를 일컬어 모화현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영조는 부왕 숙종의 능인 명릉에 참배하고 올 때면 반드시 이 고개를 지났는데, 고개 위에 올라서서 명릉 쪽을 바라보며 부왕을 추모하였고, 이 고개 이름을 추모현(追慕峴)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3. 역사

이 고개는 오랜 기간 동안 서울의 서쪽 경계로 여겨졌던 곳으로, 고려 시대에 지금의 서울 일대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양주목(楊州牧)과 남경의 서쪽 경계가 되었으며, 한양 천도 이후에는 한성부의 영역이 무악재를 넘어 녹반현(碌磻峴, 지금의 녹번역 남동쪽에 있는 고개)까지 확장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서울의 서쪽 경계 노릇을 하였다. 예로부터 중국사신(使臣)들이 서울에 올 때나,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에 갔다가 서울에 돌아올 때면, 무악재를 넘기 전에 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 자리에 있던 홍제원(洪濟院)이라는 역원(驛院)에서 하룻밤 머물며 예복을 갈아입고, 날이 밝으면 무악재를 넘어 서울로 들어갔다. 또한 무악재에는 조선 사신과 중국 사신들이 모두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잘 완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 사신당(使臣堂)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호환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고개를 넘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도 했다고 한다.

한양도성이 지어지면서 무악재 인근에는 서대문이 세워졌고, 무악재는 도성에서 서대문으로 나와 곧장 평양의주 방향으로 가는 간선도로인 의주로(義州路)의 시작점이 되었다. 서대문은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좋지 못 하다 하여 때때로 폐쇄되기도 하였고, 자리도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서대문이 폐쇄되어도 남동쪽으로 직진하면 숭례문 방향으로 통하였기 때문에 무악재는 언제나 의주로의 시작점 구실을 하였다. 태종 대에는 옛 수도인 개성의 예에 따라 한양도성에 외성을 덧붙여 지을 구상을 하면서 이곳으로도 성곽이 지나갈 뻔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지금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서울과 의주 간 도로보다는 서울과 부산 간 도로가 훨씬 중요해졌지만, 당시에 의주로는 중국으로 통하는 길이었으므로 경부간 도로보다는 중요도가 훨씬 높았다. 조선과 중국 양국의 외교 사절뿐만 아니라, 상인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조선시대 내내 이 고갯길을 빈번히 넘나들었다. 무악재는 지금으로 따지면 경부고속도로에서 서울과 경기도 경계 부근에 있는 달래내고개에 비할 만큼 중요한 길목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도로를 짓는 과정에서 고개를 깎아 높이를 낮추고,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확장되었지만, 예전에는 길의 폭이 좁고 경사가 가팔라 매우 험한 고개였다. 성종 19년(1488년)에 명나라 사신인 동월(董越)이 조선에 다녀가면서 지은 '조선부(朝鮮賦)'에는 무악재를 "천 길의 험한 산세를 이루었으니 어찌 천 명 군사만을 이기겠는가. 서쪽으로 하나의 관문길을 바라보니 겨우 말 한 필만 지날 수 있겠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그 구절에 단 주석에는 "홍제동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5리도 못 되어 하늘이 관문 하나가 북으로 삼각산을 잇대고 남으로 남산과 연결되어 그 한가운데로 말 한 필만 통할 만하여 험준하기가 더할 수 없다"고 하여 그 당시 무악재의 험준함을 글로나마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