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 미사 제3번 F단조
(Messe Nr.3 f-moll/Mass no.3 in F minor)
마렉 야노프스키,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의 2012년 6월 녹음[1]
1. 개요
늙어가는 본인은 f단조(미사)를 듣고 싶습니다! 제발, 제발! 그것이 내 인생의 정점이 될 것입니다.[원문]
안톤 브루크너, 1895년 4월 14일에 지크프리트 옥스[3]에게 첫 출판본을 비판하는 취지로 보낸 편지 중
안톤 브루크너, 1895년 4월 14일에 지크프리트 옥스[3]에게 첫 출판본을 비판하는 취지로 보낸 편지 중
안톤 브루크너의 번호 붙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작곡된 미사곡. 전체적인 창작 시기를 개괄해 봤을 때 아직 중기까지 가지도 못했을 때의 작품이고, 대중적인 인지도와 연주, 녹음 빈도도 낮은 편이지만, 곡 자체의 완성도만 보고 따졌을 때에는 역대 서양음악사의 미사곡들 중 최상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작곡 시기는 1867년 9월 14일부터 1868년 9월 9일까지. 브루크너가 린츠에 머물던 시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이기도 하다. 연주 시간은 약 55~60분 가량으로, 브루크너가 남긴 미사곡 중 가장 길고 대규모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작곡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고 하는데, 착수하기 직전인 1867년 여름에 신경쇠약으로 인한 발작 때문에 요양원 신세를 지는 등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원인은 오랜 기간 동안의 과중한 업무와 음악 수업으로 인한 과로였고, 여기에 개인적인 실연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직무 수행의 문제로 가을에 퇴원해 복직했는데,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종종 증세가 심해지기도 했다.
2. 곡의 형태
전작들인 1번과 2번, 그리고 19세기까지 창작된 절대 다수의 미사곡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의 라틴어 미사 통상 전례문 다섯 장을 따르고 있다. 단, 이 곡은 위의 두 작품과 달리 대영광송(Glória)과 신앙 고백(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Credo)에서 나오는 사제 선창까지 포함해 완벽한 형태로 음악을 붙여놓고 있다.1번에서처럼 독창자를 기용하고 있지만, 그 중요성은 오히려 약화되어 있다. 오히려 가장 강조되는 것은 합창과 관현악이며, 작품 전체를 따져봤을 때는 처음으로 재기를 발휘한 1번이나 르네상스 풍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2번에 비해 다소 수수하면서 중후한 인상이다. 하지만 숙련된 대위법 기교나 교향곡에서 보이는 독특한 스타일로 처리한 관현악 등은 분명한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 Kýrie와 Benedíctus의 주제들은 2번 교향곡에도 인용된 바 있다.
합창의 경우 2번 만큼, 혹은 그보다 더 어려운 것으로 악명이 높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소프라노와 테너 파트는 막말로 고음역 때문에 '죽어나는' 상황을 종종 겪고, 대영광송과 신앙 고백의 마지막 대목에서 나오는 푸가는 합창단의 고른 성부 배분과 균형감을 시험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브루크너가 신앙 고백의 마지막 대목에서 푸가를 쓴 것은, 번호 붙은 미사곡들 중 이 곡이 유일하다. 관현악 파트의 음색과 규모가 확대된 것도 오히려 성악부에 난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연주 편성은 독창자 네 명(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과 혼성 4부 합창(마찬가지로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파트)이라는 성악진에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2/트롬본 3/팀파니/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오르간[4]의 2관 편성 관현악이라는 형태로 되어 있다. 호른의 경우 갓 완성되었을 때는 두 대였고, 개정되면서 네 대로 늘었다.
1번이나 테 데움에서처럼 오르간은 옵션으로 되어 있는데, 단 오르간 파트는 관현악에 완전히 종속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부분도 꽤 있다. 그래서 교회나 성당, 오르간이 있는 콘서트홀에서 공연할 경우 거의 대부분 오르간을 추가해 공연하고 있다. 간혹 오르간 없는 홀에서도 전자 오르간 등을 대체품으로 사용해 공연하는 경우도 있다.
3. 초연과 출판
일단 1868년에 완성 후 이듬해인 1869년에 요한 헤르베크 지휘의 빈 아우구스티누스 성당 성가대와 관현악단 연주로 비공개 시연됐다(완성 당해인 1868년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헤르베크는 이 곡에 대해 '너무 길고 가창이 불가능하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하지만 브루크너는 그 후로도 곡에 별 손질을 하지 않았으며, 1872년에야 열린 초연 때도 마찬가지였다. 교향곡들에서 브루크너가 보여준 비굴하리만치 많았던 개정 사례와 비교하면 대단히 이례적인 태도였는데, 그 만큼 자신의 작품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초연을 위한 연습의 지휘는 마찬가지로 헤르베크가 맡았는데, 시연 때와 달리 브루크너가 민망해할 정도로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헤르베크는 이 곡에 대해 '베토벤의 장엄미사와 이 곡 외에 다른 미사곡은 아는 게 없다'는 말까지 했으며, 심지어 이 곡에 너무 큰 감동을 받은 헤르베크가 지휘대에서 기절했다는 풍문도 전해진다.
이 곡의 공개 초연은 1872년 6월 11일에 브루크너 자신의 지휘로 빈 아우구스티누스 성당 성가대와 관현악단에 의해 성사되었는데, 전술한 헤르베크뿐만 아니라 프란츠 리스트 등 친바그너 계열의 음악인들도 이 곡을 높이 평가했고, 심지어 나중에 브루크너에 대해 독설을 퍼부은 것으로 유명했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까지도 호평했을 정도였다. 요하네스 브람스도 사적인 언급이기는 했지만, 이 곡의 완성도에 대해 극찬했다고 한다. 초연 후에야 브루크너는 개정 작업을 시작했는데, 학술적인 분류로는 1883년과 1893년에 크게 두 차례 개정한 것 외에 1876~1877년[5]과 1881년[6]에 연주를 쉽게 하기 위한 소폭 개정 등 추가 작업이 계속 진행되었다고 한다. 다만 성악 파트는 첫 완성 이후로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초판 악보는 브루크너의 제자인 요제프 샬크의 편집으로 1894년에 나왔는데, 1893년의 최종 개정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곳곳에 브루크너의 의견과 상관없이 무단으로 첨삭과 재편곡이 행해지는 등 무단 개정이 행해진 부분이 있어서 브루크너가 악보를 받아보고 짜증을 냈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자기가 삭제한 부분을 편집 과정에서 돌려놓은 부분들에는 직접 주석까지 달았다고 한다. 지금도 브루크너의 종교음악 초판들 중 최악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 이후 이 판본은 1924년에 요제프 뵈스의 편집으로 재출판되었다.
브루크너의 원본은 1893년 개정판이 먼저 로베르트 하스의 편집으로 1944/1952년에 간행되었고, 이후 레오폴트 노바크가 1960년에 1893년판을 편집해서 재출판했으며, 한스 프리드리히 레틀리히도 1967년에 1893년판 편집본을 출판했으고, 폴 호크쇼는 2005년에 1893년판과 함께 1883년판도 추가적으로 간행했다. 1868년 원전판은 아직까지 출판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초판을 제외한 1893년 개정판들의 차이점은 연주상으로 거의 나타나지 않는 미미한 것이고, 주로 사소한 오식이나 오류들을 고치는 선에서 편집 작업이 이루어졌다. 최신판인 호크쇼판은 1883년과 1893년의 두 가지 개정판을 합본으로 묶어 출간했고, 개정 과정에서 나온 스케치 등의 자료들도 총정리해 부록으로 싣는 등 학술적인 충실도를 높인 악보다.
공연과 녹음에는 하스판과 노바크판이 주로 상용되고 있고, 호크쇼판도 채택 빈도가 점점 느는 추세다. 하지만 헤르베크가 시연 무렵에 했던 비판은 지금도 유효한데, 특히 합창부에 요구하는 숙련도와 기교가 상당히 난이도가 높아 웬만한 프로 합창단들도 이 곡을 한다고 하면 강도높은 리허설을 거듭해야 할 정도다.
[1] 특히 '베네딕투스' 악장 연주가 천상의 아름다움 수준으로 굉장히 뛰어나다.[원문] Der Bruckner wird alt und möchte doch so gern noch die F-Moll(Messe) hören! Bitte, bitte! Das wäre der Höhepunkt meines Lebens.[3] Siegfried Ochs, 1858~1929, 독일의 합창 지휘자 겸 작곡가[4] 일반적으로는 빼고 연주한다.[5] 첫 세 악장을 약간 수정했다.[6] 크레도를 약간 수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