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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7:09:37

민주당 주전파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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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주전파
War Democrats
<colbgcolor=#0044c9> 한글 명칭 민주당 주전파
창립 1860년
해체 1868년
이념 연방주의
잭슨 민주주의
정당


지도자 앤드루 존슨 (TN)
존 애덤스 딕스 (NY)
조지 밴크로프트 (MA)
존 브러프[1] (OH)
벤저민 버틀러 (MA)
1. 개요2. 역사
2.1. 1860년 대선과 민주당의 분리2.2. 1862년~1863년, 오하이오2.3. 1864년 대선과 링컨의 암살2.4. 앤드루 존슨 행정부2.5. 1868년 대선과 민주당 주전파의 해체
3. 성향

[clearfix]

1. 개요

War Democrats

미국에서 1860년부터 1868년까지 존재했던 민주당의 계파. 이들이 직접적으로 하나의 정당을 이룬 것은 아니었으므로 '전쟁 민주당원' 내지는 '민주당 주전파'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전쟁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들이 남북 전쟁 국면에서 남부와의 전쟁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직역하여 '전쟁민주당' 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과 반대로 남부의 독립을 인정하거나, 그들의 불만을 인정해 협상해야된다고 주장하던 측을 민주당 주화파(Peace Democrats) 내지 코퍼헤드(Copperheads)라고 불렀다.

2. 역사

2.1. 1860년 대선과 민주당의 분리

1860년 대선 과정은 노예제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분열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원래 민주당은 연방 유지를 위하여 노예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로 뭉쳐있었지만, 노예제 문제에서 가장 강경한 태도를 지닌 공화당이 새롭게 등장하고, 상대적으로 선명한 노선을 지닌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 당의 대선 후보로 출마하게 되자 분열하게 된다.

링컨과 공화당의 존재로 더이상 단일대오를 유지해지기 어려워진 민주당은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을 지내고 있던 스티븐 A. 더글러스'연방 유지'를 우선하는 북부민주당제임스 뷰캐넌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내고 있던 존 C. 브레킨리지'노예제 유지'를 우선한 남부민주당으로 분당해 대선을 치르게 됐고, 그 결과로 링컨이 역대 대선 후보 중 최소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링컨은 당선 이후 연방 유지를 위해 예상보다 남부에 온건한 태도를 보였지만[2] 이마저도 참을 수 없다고 반발한 남부에서 결국 연방을 탈퇴한다고 선언했고, 남부민주당이 이를 주도하면서 남북 전쟁이 일어나게 됐다. 남부민주당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북부민주당 역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는데, 일단 대선에서 맞붙었던 더글러스 등이 앞장서 연방 유지를 위해 링컨과 공화당의 손을 잡는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링컨의 손을 잡은 북부민주당 역시 결국 전쟁의 방식에 있어 무력을 통해 남부의 반란을 분쇄하는게 우선이라는 점에 동의한 전쟁민주당과 남부와 당장은 전쟁을 하더라도 결국 타협을 통해 평화를 찾아야한다는 민주당으로 계파가 다시 한번 나뉘게 된다.

2.2. 1862년~1863년, 오하이오

링컨 대통령은 전쟁 상황을 이유로 계엄령을 통해 선거를 일시 중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건재함을 보여줘야한다는 이유로 정상적으로 선거를 진행시켰고 1862년 전쟁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이 오하이오에서 진검 승부를 펼치게 되었다. 향후 민주당의 주도권을 정하게 될 승부였던 셈.

민주당 주화파의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던 클레멘트 밸런디검이 오하이오 3구에서 연방 하원의원 3선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민주당 주전파가 같은 민주당 소속의 밸런디검이 아니라 아예 공화당 후보와 손잡고 단일대오를 구성해버렸다. 결국 본선에서 공화당의 로버트 C. 쉔크(Robert C. Schenck)가 52.5%를 득표해 승리, 당선되면서 민주당 주화파는 리더를 잃게 되었다.

1862년에 적과의 동침으로 재미를 본 민주당 주전파는 이후 아예 공화당과 국민연방당을 결성해 1863년 오하이오 주지사 선거에 나섰다. 원래 주지사였던 공화당의 데이비드 토드가 인기가 낮아 민주당 주화파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는 평이 나오고 있었는데, 이때도 민주당 주화파의 후보는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던 클레멘트 밸런디검 전 의원이었다.

이때 민주당 주전파의 존 브로가 자신에게 밸런디검을 누를 수 있는 십만표가 있다는 편지를 링컨에게 보냈고, 링컨은 덕분에 오하이오가 연방을 구할 수 있을거라고 답하며 존 브로의 양당 단일 후보 출마를 지지했다. 결국 본선에서 국민연방당 후보로 출마한 존 브로가 본인이 약속한 것과 비슷한 101,128표 차로 밸런디검을 완파(60.61% vs 39.39%)하고 공화당과 민주당 주전파가 오하이오 주지사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2.3. 1864년 대선과 링컨의 암살

앞선 2년간의 분열에 더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군이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황이 본격적인 연방의 우세로 전환되면서 민주당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있었던 1863년 7월 이전까지만해도 전쟁민주당과 공화당의 연합이 적어도 선거에서는 특정 지역구에 한정해 부분적으로만 진행됐지만 이후에는 아예 민주당 주전파와 공화당의 연합이 전국단위 선거까지 확대된다. 특히 1864년 대선에서는 공화당 일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링컨 대통령이 아예 테네시 주지사[3]였던 앤드루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목하여 선거를 치렀다. 공화당 입장에서도 연방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나마) 단결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서라도 민주당 주전파의 협조가 필수불가결이었기도 했다.

결국 전쟁 장기화로 인한 여론 악화에도 불구하고 링컨-존슨 티켓이 민주당 주화파에서 내세운 조지 B. 매클레런을 누르고 대선에서 승리했고, 이 선택으로 같은날 펼쳐진 연방 상·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과 민주당 주전파와 함께 상원 54석 중 42석, 하원 193석 중 149석을 얻는 대승을 거두면서 큰 효과를 보게 되었다.

링컨이 재선 대통령으로, 존슨이 초선 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인 1865년 4월 9일, 남군을 이끄는 로버트 E. 리버지니아 주 애퍼매톡스(Appomattox)에서 북군 총사령관인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무려 4년이 넘게 진행된 남북전쟁이 종결되었다.

그렇게 공화당과 민주당 주전파의 오월동주도 성공적으로 끝을 맺는가했지만 불안한 동거는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다름 아니라 링컨 대통령이 1865년 4월 15일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 앤드루 존슨 부통령이 직을 이어받으면서 졸지에 민주당 대통령에 공화당 행정부가 함께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2.4. 앤드루 존슨 행정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취임 직후 링컨 대통령의 재건 정책을 승계한다고 천명하고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 급진파와도 좋은 관계를 맺었지만 실제로는 공화당이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금방 균열을 보이고 말았다.

급기야 존슨 대통령은 공화당이 장악한 연방 상·하원에서 가결된 법률안에 연속으로 거부권을 행사했고, 공화당 역시 그런 대통령을 무시하고 법안을 다시 의결해 공포하는 등 극한 갈등을 이어갔고[4] 1867년 전쟁장관 에드윈 스탠튼 해임 문제를 두고 그야말로 끝장을 봐야하는 상황까지 갔다.

이런 모습 때문에 존슨 행정부 출범 이후 다시 공화당 대 민주당의 양당 구조가 뚜렷해지면서 링컨 대통령 시절과 달리 민주당 내에서도 과거 공화당과 손을 잡았던 민주당 주전파의 입지가 크게 약화된 상황이었고, 존슨 대통령은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에게 미움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어찌 보면 공화당 급진파와 지나치게 각을 세우면서 존슨 대통령 스스로 자신을 모두로부터 고립시키고 만 셈이 되었다. 링컨 대통령 시절 공화당 온건파 + 공화당 급진파 + 민주당 주전파 vs 민주당 주화파의 3:1 구도가 역으로 민주당 주전파 vs 공화당 급진파 + 공화당 온건파 + 민주당 주화파의 1:3 구도가 된 셈.
파일:Andrew_Johnson_impeachment_trial.jpg
연방 상원에서 열린 앤드루 존슨에 대한 탄핵 심판

결국 소위 '스탠튼 사건'으로 인해 연방 하원으로부터 역사상 최초의 탄핵 소추까지 당한 상황에서 존슨 대통령과 민주당 주전파는 위기에 빠졌지만 공화당 온건파의 일부 반란표로 겨우 탄핵이 기각되면서[5] 자리를 지켰지만 사실상 레임덕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것은 존슨 대통령 뿐만 아니라 기존 민주당 주전파 세력에게도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과거 연방을 우선시해 공화당과 손을 잡아 살아남은만큼, 연방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끝나고 공화당과 척을 지게 된 상황에서 그들은 존재 가치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2.5. 1868년 대선과 민주당 주전파의 해체

존슨 대통령이 가까스로 탄핵을 피하면서 임기를 지키긴 했지만 재선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1868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 자리는 존슨 대통령이나 민주당 주전파 출신의 정치인이 아니라 민주당 주화파 출신의 호레이쇼 시모어(Horatio Seymour)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 시모어가 본선에서 공화당 급진파가 지원한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완패했고 이후 미국 정치는 완전히 기존의 양당제로 회귀했다. 결국 계파로서 민주당 주전파는 의미를 완전히 잃었고, 사실상 해체를 맞이했다. 이때 민주당 주전파로 활동하던 정치인 중 노예제에 강력하게 반대하던 일부는 아예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남부에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던 일부는 민주당에 남아 남부 출신 인종주의 세력에 완전히 동화되고 만다.

3. 성향

남북 전쟁 국면에서는 남부와 전면적인 전쟁도 불사하는 점에서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나 공화당 급진파와 의견이 일치했지만 전후 처리 문제에서 의견이 갈라졌다. 민주당 주전파에서는 남부맹방에 가입했다가 패해 연방으로 돌아온 남부에 가혹한 처벌을 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부에서의 급진적인 노예제 폐지와 흑인에 대한 시민권 부여가 연방을 다시 분열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이를 주도하던 공화당 급진파와 여러차례 갈등을 벌였다.

결국 이러한 민주당의 분탕질남북 전쟁 전후 재건 시대의 흑인들의 권리회복과 경제자립도 확립에 결정적인 치명타를 입혀 민권 시대 이전까지 100년 이상을 흑인들은 제도화된 인종차별에 시달리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며 현대 미국의 인종에 기반한 빈부격차 현상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1] 'Rhymes with "huff"' #[2] 당시 공화당 내에는 해니벌 햄린, 새디어스 스티븐스 등 링컨보다 더 강경한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많았다.[3] 테네시는 전쟁이 시작되던 1860년 연방을 탈퇴했지만 1863년 윌리엄 로즈크랜스 휘하의 북군이 이미 수복한 상태였다.[4] 대표적으로 미국 흑인의 시민권 보호를 법제화한 1866년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866)에 대하여 존슨 대통령이 1866년 3월 27일에 임기 중 두번째 거부권을 행사하자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에서는 각각 상원에서 찬성 33-반대 15, 하원에서 찬성 122-반대 41로 눌러버리고 거부권을 무효화했다.[5] 딱 한 표차로 부결되었다. 공화당 온건파 중 한 명 정도만 눈 딱 감고 탄핵 인용에 투표했으면 그대로 직을 잃고 당시 상원임시의장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것이다.